[찬백] F와 1/2 A
W. 레녹
ㅡ 손님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잠시 후 이륙하겠습니다. 좌석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짧은 이륙 멘트와 함께 비행기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직선으로 나아가다가 바퀴가 바닥에서 떨어지는 매끄러운 순간 바이킹을 타듯 심장이 쿵 내려 앉는다. 몇 번을 비행기를 타도 적응되지 않는 불편함이다. 큰 항공사의 승무원이자 청일점인 백현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다른 승무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웃지 않는 얼굴, 미묘하게 친절한듯 아닌듯한 말투. 그러면서도 손님들께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꽤 특이한 승무원이었다. 그렇기에 주로 눈에 띄는 승무원이기도 했다. 그 많은 스튜어디스 사이에 남자 승무원이라니. 절레. 백현 본인이 생각해도 이 큰 항공사에 자신이 합격하고 거의 2년 가까이 비행기를 탔다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승무원실에서 무표정으로 거울을 몇 번 바라보자니 눈은 작고 개새끼마냥 처졌고, 키도 크지 않으며 이목구비도 그다지 뚜렷해보이지는 않았다. 같이 면접 보던 남자아이들 중 잘생긴 애들은 정말 많았는데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올 만한 특징이 자신에게 있었던가? 백현 본인이 생각하는 외모의 장점이라면 하얀 피부와 갸름한 턱선이 전부였다.
" 백현 씨, 밖에 봤어요? "
" 뭐가요? "
이태민이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걸던 스튜어디스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사실 백현은 그다지 연예인에 관심있는 편은 아니었다. 알아봤자 소녀시대 정도.
" 이태민이 누군데요? "
" 백현 씨는 뉴스도 안 봐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재벌가잖아요. 그것도 자수성가한. "
" 어린 나이에 대단하지. 아직 20대라는데 호텔이고 리조트고 사업만 몇 개를 하는데! "
" 아. 연예인이 아니었어요? "
" 연예인이라고도 할 수 있죠! 잘생겼으니까요. 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내가 한 번 꼬셔볼까봐. "
주책이다, 참. 돈 말고는 전혀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해 떠들어대는 스튜어디스들의 담소에 겉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는 백현이었다. 얼마나 잘생겼으면 가수도 아니고, 배우도 아닌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일까. 그런 사람이 승무원이 됐으면 정말 인재였을텐데. 스마트폰으로 금세 검색을 하자 바로 뜨는 사진과 프로필이 보였다. 사람에게는 관심 없지만 사람이 가진 돈에 대해서는 관심 있거든. 백현은 흥미로운 프로필을 읽어내려가며 즐거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 자수성가... 청년 재벌. 뉴스에도 났었네.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돈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지. "
부럽네. 역시 남 돈 벌었단 얘기는 보는 게 아니었다. 부러움만 살 뿐, 본인에게 더 떨어지는 건 없으니까.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거울을 보며 옷 매무새를 갖추었다. 곧 식음료가 나갈 차례였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인지라 무거운 음료보다는 가벼운 스위트 와인과 각종 주스, 깔끔한 홍차 등을 트레이에 올려놓고 끌었다. 각 좌석의 커튼을 열고 손님께 물어보고 가져다주면 되는 일이라 한가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ㅡ 실례하겠습니다. 손님, 어떤 음료로 준비해드릴까요?
A-2 좌석을 열자마자 차분히 이마를 덮은 앞머리와 깔끔하게 커트된 까만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잘생겼다. 백현이 연예인을 몇 번 봤지만 이렇게까지 잘생기진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준비된 멘트가 나오자마자 잠에서 깬 듯 태민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 음료. 무겁게 연 입에서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물 있어요? "
질문과 함께 저를 돌아보는 태민과 눈이 마주쳤고, 결국 백현은 그 자리에 훅 얼어붙어버렸다. 내가 언제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랑 가까이서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을 차린 백현이었다. 눈빛으로는 남자 여럿 게이 만들었을 눈빛임에 틀림 없었다. 아, 네. 에비앙과 탄산수 준비되어 있습니다. 목소리가 떨렸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태민은 웃으면서 에비앙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고, 백현은 자기도 모르게 정해진 멘트를 하고 다급하게 커튼을 닫았다. 존나 잘생겼네, 씨발.
ㅡ
" 꺅! 오빠! 여기 좀 봐 주세요! "
" 찬열아! "
" 찬열아, 여기! 여기 좀 봐 줘!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학생, 조금만 뒤로 물러나! 물러나요! "
" 오빠! "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와 소녀들의 비명. 그 가운데에는 대한민국 대표 천만배우 박찬열이 걸어가고 있었다. 첫 작품부터 얼굴과 연기력으로 이름을 날리고, 퀴어 영화로 대박을 친 이후로 여러 방송과 영화, 드라마, 심지어는 뮤지컬까지 점령하고 있는 대세이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탑 배우 찬열. 그를 뒤따르는 뒷소문과 찌라시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천사 이미지로 싹을 잘라버리는 국민 오빠이자 국민 게이인 찬열이었다. 플랫폼을 걷는 구두소리가 경쾌했지만 플래시와 인파들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이거, 시간 맞추기 어렵겠는데.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왼손에 멋드러지게 찬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며 찬열이 입꼬리를 내렸다가 다시 올리며 웃었다.
비행기에 올라타며 승무원들에게 예의 바른 웃음을 잃지 않으며 자리에 앉고는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수면 안대 쓰기. 메이크업은 또 받으면 되니까. 수면 안대를 푹 눌러쓰고 부족한 잠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사이에 승무원들 사이에 찬열의 이름이 몇 백 번, 몇 천 번은 오르락 내리락 했던 사실은 찬열이 알까? 바쁜 스케줄탓에 원하는 만큼 늦잠을 자 본 적이 언제 였더라. 어떤 이동수단을 타든지 수면안대는 찬열의 필수품이었고, 팬들의 선물 목록 1위이기도 했다. 달콤한 잠에 빠져있던 찬열을 깨운 것은 스튜어디스의 음료 안내였다. 안대를 잠깐 내리고는 눈을 맞추며 괜찮다고 정중히 사양하는 찬열의 행동에 승무원은 몇 번이나 읊어왔던 멘트조차 하지 못한 채 커튼을 닫아야만 했다. 어쩜 저렇게 공인이 겉과 속이 다르지가 않을까? 승무원들이 또 모여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 저번에 탔던 그 아이돌 그룹 말이야. 티비에서 보는 거랑은 완전 딴판이더라고. "
" 아이돌뿐만이야? 배우나 가수나 다 마찬가지지, 쇼윈도. "
찬열은 달랐다. 능글 맞으면서도 장난끼도 다분했고, 그 중에 사람 속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게끔 만들었다. 보는 사람이 하여금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길래 저런 사람이 될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잘생긴 사람은 흔할 수 있다. 잘생기고 연기 잘 하는 사람 역시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며 성격까지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매일 밤 많은 소녀들의 상상에 등장하는 찬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