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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일.


2007년에 나는 열일곱이었다. 지금 보다는 더 탱탱하고 하얀 피부와 직모의 앞머리로 눈썹까지 덮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다. 그때도 키는 다른 애들보다 훌쩍 커 180이 넘었고 얼굴은 (유일하게) 지금과 똑같은 쌍꺼풀 없는 큰 눈에 웃상의 입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주머니에는 항상 부모님께서 생일선물로 주신 내 보물 1호 아이팟 나노가 있었고 귀에는 아이팟 나노와 연결된 하얀 이어폰이 끼어져 있었다. 아마 그때는 24시간 중 절반은 노래를 들었고 지금의 병이 있기 전이라 모든 음악을 가리지 않고 들었다. 물론 그때는 알고리즘이 선곡해 주는 노래가 아닌 내가 직접 넣은 mp3파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지만.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다양한 노래가 있었다. 아이돌, 발라드, 힙합, 인디, 팝, 얼터너티브 락, 종종 연주곡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부터 ‘대중가요’를 많이 좋아했는데 최신 음악도 열심히 들었지만 가슴을 울리는 90년대 발라드를 좋아했다. 특히 찌질한 남자를 표방하는 뮤지션을 좋아했다. 토이나 윤종신, 김연우, 윤상 같은 90년대 가수들을 파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별 노래로 가득한 플레이리스트 사이에 설레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바로 . 하울이라는 가수가 불렀다는데 사실 가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고 단순히 한 해전 본 드라마 〈궁>에 푹 빠져 1년 넘게 내 아이팟 나노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이 노래를 듣곤 했는데 그건 아마도 신채경과 이신의 몽글몽글하면서 구구절절하기도 한 드라마 속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대부분의 소년들이 그러하듯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 사랑이 궁금했다. 지금의 사랑은 외로움이나 공허함을 채워주는 감정인데 그 당시에는 궁금증이었나 보다. 열일곱 살이면 궁금하기도 했겠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랑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새로 입학한 학교, 새로운 교실에 앉아 같은 반 친구로 만난 여자애와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야 한도윤! 언제 왔어? 입학식 끝나고 바로 달려왔냐? 한참을 찾았는데.”


“맨 뒷자리 차지하고 싶어서 일찍 왔지.”

“또 노래 듣고 있냐? 하루종일 듣네 아주 그냥…. 무슨 노래 듣는데? 나도 좀 듣자”


“아…. 아니 그냥 뭐 좀 듣고 있었어. 이제 애들 슬슬 들어오나 보다. 너도 빨리 자리 잡고 앉아.”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용준이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갑자기 용준이 다가와 한쪽 이어폰을 가져가려던 걸 나는 도로 빼앗았다. 용준이는 살짝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 이어폰을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 건 나의 철칙(이라고 하기엔 의미 없는 고집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들어오는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애들, 여자애들 섞여서 들어오는데 한 여자애가 눈에 띄었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컬이 들어간 검은 머리에 하얗고 갸름한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다. 왠지 그 아이의 교복 셔츠는 유독 하얗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데 왜 그 아이만 더 눈에 띄었는지 내 눈은 그 아이에게 고정되었다. 그 아이가 들어오면서 검고 긴 머리를 휙 하고 넘겼다. 


쿠다당 탕탕!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버렸다. 자리에 일어나면서 내 허벅지가 책상을 들어 넘어뜨리고 옆에 있던 용준이까지 놀라게 해 버렸다.


“뭐… 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뭘 좀 봐서.”


“귀신을 봤냐? 여고도 아닌데 여고괴담이야?”


책상이 넘어지면서 교실로 들어오던 다른 친구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러 명의 눈빛이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져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책상을 일으켜 세우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그 여자애를 봤다. 교실 반대편 자리에 앉은 그 아이는 검고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덕분에 얼굴이 좀 더 자세히 보였다. 오밀조밀하지만 또렷하게 배치된 이목구비를 자세히 보았다. 눈은 고양이처럼 똘망했고 윗입술은 아랫입술보다 얇고 피부는 하얘서 투명해 보였다.


그때 아이팟 나노에 연결된 이어폰에서 가 내 귀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사랑인가요

그대 나와 같다면 시작인가요


노래를 듣고 있는데 마침 그녀가 눈에 들어와서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반했는데 마침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노래가 나오는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심장이 평소 보다 조금은 더 세게 진동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약간 심장이 간지러웠다. 17년 인생에 처음으로 내 마음에,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는, 그런 감정이 생겼다.


그때는 3월이었고 봄기운이 풍기며 날씨가 좋아 푸른 파랑의 하늘과 뭉게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밝은 그런 날이었다. 


그런 봄의 시작에,

나는 한 번의 바라 봄에 윤슬을 좋아하게 됐다.


첫사랑이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철이 없었던 것이 어떻게 사람을 좋아하는데 통성명 한 번, 말 한 번 해보지 않고 겉모습만 보고 좋아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열일곱다웠다. 


대부분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면 그렇듯 나도 윤슬과 말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교실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다른 여자애들의 말을 끊고 그녀에게 “안녕?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라고 말이라고 꺼낸다면 주변은 조용해질 것이며 윤슬과 나의 관계는 말을 터보기도 전에 부담스러워 일그러질게 뻔했다. 그래서 나름 계획을 세웠다.


다음날부터 나는 반 애들 중 제일 먼저 교실에 도착하는 아이가 되기로 했다. 텅 빈 교실에서 윤슬이 몇 시쯤 오는지 관찰할 심산이었다. 그녀가 조금 일찍 오는 편이라면 반 아이들이 별로 없을 때 대화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6시 반의 학교는 텅 비어있는 다른 세계 같았다. 아주 작은 소리도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히 들렸고 내가 움직이면서 내는 옷 스치는 소리, 발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아이팟 나노에 연결된 이어폰을 끼고 있었지만 누군가 걸어오는 작은 소리를 듣기 위해 아무 노래도 틀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는데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오는 것 같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네요. 그녀가 들어오죠.


윤슬이 들어왔다. 나는 순간 놀라 안 그래도 무쌍의 큰 눈이 더 커진 채 그녀를 맞이했다. 아무래도 열일곱의 나는 여러모로 내 진짜 의도를 감추며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건 잘 못했다. 나는 놀라버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


그녀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군가 교실에 있다는 사실에 놀랄 법도 한데 그녀는 열일곱의 나이에도 잘 감추는 사람이었다.


“안녕?”


그녀는 내 자리 반대편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녀와 첫마디를 나누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녀의 자리로 다가갔다. 그녀에게 가까이 갈수록 심장은 더 크게 진동했지만 오히려 이럴 때 나는 임기응변을 잘하는 편이라 능청스럽게 말을 걸었다.


“나만큼 학교에 일찍 오는 사람은 못 봤는데. 너도 엄청 일찍 오는구나?”


“부모님이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나도 일찍 나와. 보통 집에 혼자 남아 있는 것보다는 학교에 와서 애들 기다리는 게 더 좋거든.”


“나도 그런 것 같아(?).”


“너도 부모님이 일찍 출근하셔?”


“어..? 어. 우리 부모님도 엄청 일찍 출근하셔. 맞아. 맞아.”


이런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능청스러운척하는(사실 그렇게 하고 싶은) 내 속내를 들킨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이런 그녀의 모습이 나보다는 조금 성숙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근데 우리 서로 이름은 알고 있나? 나는 윤슬이야. 성이 윤이고 이름이 슬이야.”


“나는 한도윤. 자리는 저기 창가 쪽 자리.”


“네가 첫날에 책상 넘어 뜨리고 애들 놀래킨 애구나. 안 그래도 애들이 엄청 놀랐다고 다들 난리였어.”


“아 그때는 옆에 용준이랑 장난치다가 그만. 하하”


사실 너 보고 놀라서 그런 건데. 하지만 그런 말은 첫 대화에서 할 수 없었다. 겉모습만 보고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풋내기 같은 모습은 보여줄 수 없었으니까. 


“너는 보통 학교 일찍 오면 뭐 해?”


“나? 나는 노래 듣고 있어. 책 읽으면 졸리고 공부는 하루종일 할 건데 굳이 싶어서.”


“어? 노래? 나도 노래 많이 듣는데. 요즘 자주 듣는 노래 있어?”


“요즘에는 토이 노래 자주 들어. 좋은 사람. 이거 엄청 좋아하거든.”


“진짜? 생각보다 토이 노래 듣는 사람 만나기 힘든데. 나도 좋은 사람 좋아해. 이거 초등학생 때 엠넷에서 엄청 틀어줘서 많이 봤거든.”


“맞아! 나도 오후에 집에 가서 엠넷 보면 그렇게 많이 나왔어. 그 토끼인형이랑 모델 같은 여자랑 마르고 뿔테 낀 남자 나오잖아.”


“그 남자가 유희열이야! 유희열 얼굴 몰랐어?”


“유희열? 유희열이 누구야?”


윤슬은 90년대부터 토이를 좋아해 온 골수팬 선배들을 보면 아주 크게 혼날 말을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게 너무 재밌어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4살일 때 데뷔한 토이의 음악 유니버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토이를 이야기하는데 작은 빅뱅이라도 터진 듯 우리의 유니버스도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늦잠 자고 싶은 마음을 제쳐두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학교로 향했다. 그녀는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교실에 들어왔고 나와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슬이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노래이야기. 그다음은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했고, 그러고 나서는 〈무한도전>의 좋아하는 멤버나 주말에 유재석과 강호동이 나오는 〈엑스맨>이 종영된다는 이야기, 그 후에는 전날에 있었던 용준이와 겪은 고등학생 남자애들이나 겪을 바보 같은 에피소드나 가족과 했던 대화도 서로 나누었다. 


매일 아침. 

다른 애들이 오기 전에 둘만 있는 교실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그 세계는 한없이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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