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남준은 경찰들에게 말한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그릴 수 없습니다.
민윤기를 그리려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싫다니까.
형은 자신의 의사를 잘 표현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얼굴 그려도 되냐고 물을 때마다 저렇게 대답을 하니 나로서는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힘들었다.
형이 눈앞에 없으면 나는 형을 떠올릴 수 없다. 방금 봤어도 머릿속엔 형의 잔상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특징 없는 얼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사람의 특징은 적어놓았습니다.
남준은 품에서 노트를 꺼낸다. 표면이 검은 물감으로 얼룩덜룩하다. 경찰들은 그것을 빼앗는다. 펼치니 남준의 글씨가 빼곡하다. 남준은 경찰들이 그 글자들을 읽기 전에 말한다.
마지막 장을 보시면 됩니다.
종이들이 넘어간다. 경찰들은 마지막 장을 본다.
[무쌍
하얀 피부
검은 머리]
장난해요, 김남준 씨?
남준은 진지하다. 하지만 경찰들은 그걸 모른다. 남준을 윽박지른다.
일단, 화가가 그림을 못 그리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얼굴도 알잖아. 오래 봐왔다며.
형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작품을 구상하는 척 수첩의 마지막 장에 형의 특징을 적었다. 나중에 보고 그릴 수 있을까 해서. 그림을 그리기에 이곳은 조용했고 펜 소리는 너무 컸다. 형은 그림 그리는 소리에 예민하다.
남준아.
검은 머리까지 적었을 때 형이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형이 커다란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곧 떠날 거야.
커다란 창문으로는 밝은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형은 그 사이에 흐릿하게 서 있었다. 가슴에 맨 카메라 렌즈에 빛이 둥그렇게 반사되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어디로.
모르겠어. 잘 지내. 또 올게.
형은 느릿한 걸음으로 나갔다. 그 걸음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02
잠복하다가 돌아온 석진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흥분한 상태이다.
김남준? 그 화가 김남준이요? 와, 저 그 사람 진짜 좋아하는데.
남준을 만나고 온 형사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한다.
만났으면 싫어졌을 걸.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다가 갔어.
네?
형의 얼굴은 동그랬든가 갸름했든가, 눈은 컸든가 작았든가, 코는 높았든가 낮았든가 곧았든가 휘었든가, 입술은 두꺼웠든가 얇았든가.
나는 형을 그릴 수 없다.
근데, 그 인간 유명해?
저같이 좀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죠.
뭐래.
아니, 진짜 몰라요, 형님들? 요즘 떠오르는 신예인데.
그런 거 볼 시간이 어디 있냐. 이 자식, 요즘 한가하나보네? 그렇게 좋으면 이 사건 네가 맡아.
네? 아니, 형님들!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떠나는 형사를 보며 석진이 투덜거린다.
…잠복하다가 이제 왔는데.
그 이후로 제대로 된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검은색만 사용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가끔 하얀색도 사용해 보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형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
아무리 무명이었지만 그래도 그림으로 돈을 근근이 벌어가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 쌀은 줄어만 갔다.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은 버티기에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방 안에 널려 있는 검은 그림들이라도 내놓기로 했다.
어째서인지 사람들은 그 검은 그림들에 높은 값을 매겼다.
[검은색으로만 표현된 처절한 슬픔. 하얀색을 신성시하면서도 슬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오묘한 시선]
03
석진은 초인종을 누른다. 전자음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네, 경위 김석진입니다. 용의자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사실 석진은 그것을 빌미로 남준을 한 번 만나고 싶다.
석진이 남준의 그림을 처음 본 건 약 한 달 전이었다. 오랜만의 휴가에 석진은 항상 그랬듯 싼 미술 전시관 티켓을 끊었다.
석진은 미술 전시관을 가는 걸 좋아한다. 화려한 색채들 사이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걸 즐긴다. 딱히 미술에 관심 있다기보다는.
그 날도 마찬가지로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있었다. 석진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정말 단순한 그림이었다. 미술을 모르는 석진조차도 이 그림을 그린 과정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도화지를 검은색으로 거칠게 칠하고 그 위에 흰 물감을 부었구나.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려한 모든 것들을 잡아먹는 것 같은 그림.
그 날 석진은 집에 오자마자 남준을 검색했다. 미술관에서 봤던 것 외에도 그림이 여러 장 떴다. 석진은 그 그림들을 클릭했다. 한 장 한 장 자세히 봤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모든 그림들의 중심 부근에 하얗고 부드러운 곡선이 여러 개 그려져 있다는 걸.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석진은 모른다.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주위 사람들이 닦달했다.
너 그림 또 언제 내?
왜.
그냥 뭐.
부모님은 드디어 아들이 성공했다면서 감격해하며 돈을 끊었다.
이제 누나들 결혼 준비도 해야 하는 거 알잖아. 힘들면 말하렴. 다시 보낼게.
계속 그리기로 했다. 그릴수록 힘들었다.
그즈음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석진은 남준의 집안이 생각보다 화려해서 놀랐다. 중세 시대 성을 생각나게 하는 내부였다. 만화경 내부의 문양을 규칙적으로 배열해놓은 듯한 벽지와 석진 키의 세 배쯤 되는 길이의 창문, 그 창문을 덮고 있는 얇고 하얀 커튼. 석진은 그 커튼을 매만지다가 남준이 가리키는 소파에 앉는다. 남준은 석진의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는다. 석진은 의아해하지만 이내 정면을 바라본다.
저번에 웬만한 조사는 다 받은 걸로 아는데요.
혹시 그 사이에 마음이 변하셨을까 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민윤기 씨 얼굴 진짜 그려주실 수 없으신가요?
남준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석진은 남준이 화가 났음을 느낀다.
그게, 자기도 그릴 수 없다면서 버티더라니까.
다른 형사가 해준 말이다. 석진은 슬그머니 질문의 방향을 돌린다.
아니면 민윤기 씨 사진 새로 발견한 건 없을까요.
얼굴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진은 한 장도 없습니다.
근데 왜 불편하게 옆에 앉으셨어요, 제가 저쪽으로 갈까요?
석진이 장난스레 말했지만 분위기는 더 딱딱해지고 만다.
아니요, 이제 할 말 없으면 가주시죠.
석진은 그렇게 쫓겨난다.
04
뺑소니라고 했다.
민윤기 씨 바지 주머니에서 김남준 씨 번호가 나와서 전화드렸습니다.
민윤기는 처참하게 뭉개졌다. 그나마 온전한 건 쉽게 부러질 것 같은 손목과 발목. 나는 하얀 천 밖으로 삐져나온 것들을 차마 잡을 수 없었다. 대신 의사가 내 손에 무언가 놓았다. 나는 그것을 쥐지도 못했다. 가끔 보았던 것이라서. 의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이건 민윤기 씨 유품입니다.
지민은 오랜만에 돌아온 석진의 앞에 케이크를 구워다 준다. 석진은 볼 빵빵하게 케이크를 입에 넣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니까?
뭐 그런 병이라도 있나보지.
에이, 그런 병이 어디 있어. 아, 박지민, 너 근데 차 언제 가져올 거야. 나 곧 비번인데. 부모님 보러 가야한다고.
미안, 미안. 담주에는 가져올게.
지민이 손을 바르르 떤다.
나는 형 곁에 오래 있었음에도 형을 잘 모른다.
부서질 것 같은 형. 없어질 것 같은 형. 형을 생각하면 불안하기만 해서 정작 형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 아. 그래서 난 그 흰 천을 잡아 들췄고.
김남준 씨!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토를 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때뿐이었다. 나는 형의 시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그 때의 감정이 형을 상상할 때마다 보이던 검은 공간을 치고 올라왔다.
내 눈은 맛이 가 버린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그 화려한 감정에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정신 차려보니 모든 준비는 끝나있었다.
[김남준의 그림에는 절망만이 가득했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분노가 담긴 작품을 내놓았다. 분노는 주황색으로 표현되었다. 하얀색을 덮은 주황색이 피처럼 검은색 위에도 흩뿌려져 있다.]
석진은 새로운 남준의 그림이 낯설다. 낯설다기보다는 불길하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느낌이다. 석진은 컴퓨터 화면을 끄고 수첩을 집어 든다.
민윤기. 버스정류장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용의자이다. 근처 편의점 CCTV에 잡힌 유일한 생존자. 근처를 지나간 차들의 블랙박스까지 뒤졌는데 민윤기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체더미에서 발견되었다. 우연일까, 계획일까. 석진이 폼을 잡고 있는데 형사가 묻는다.
어제 뭐 알아낸 거 있냐?
아, 몰입 깨게. 석진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아니.
아씨, 우리 욕만 드럽게 먹다가 끝나겠네, 이거.
석진이 한숨 쉬며 대답한다.
그러게 말이야.
옷을 챙겨 입고 칼을 들었다. 칼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05
석진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일찍 집에 왔다.
김남준이 왜 여기 서 있지? 석진은 자신의 집이 맞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입구에 붙어있는 ‘전단지 안 받아요’ 글씨체는 지민의 것이다. 다시 문 앞을 바라본다. 멀대 같은 키, 김남준이 맞다. 석진은 밝게 묻는다.
김남준 씨 무슨 일이에요?
여기 박지민이라는 친구 살지 않아요?
석진은 몸을 흠칫 떤다. 남준의 목소리가 무겁다. 일단 아니라고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문이 열린다.
어, 형 왔네. 왔으면 쓰레기 버리는 거 좀 도와주지……. 옆에는 누구야.
아, 박지민. 타이밍 진짜. 석진이 속으로 투덜거린다. 지민이 석진의 썩은 표정을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본다. 그 와중에 남준의 가벼운 인사가 비집고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뺑소니범.
석진은 얼굴을 찌푸린다. 지민은 들고 있던 쓰레기를 떨어뜨린다. 석진이 남준에게 묻는다.
무슨 소리예요?
혀, 형…….
지민은 몸을 덜덜 떤다. 그런 지민에게 남준은 다가간다.
너 맞잖아.
무슨 말 하시는 거예요? 아니, 잠깐!
순식간에 남준이 지민의 멱살을 잡는다. 석진은 그 사이에 몸을 쑤셔 넣는다.
아니, 말로 해요, 말로!
지민과 석진은 얼굴이 띵띵 부어 있다. 남준 하나를 못 감당한 탓이다. 형사들이 석진을 놀린다.
쯧쯧, 김석진 다 죽었네.
옆집의 신고 덕에 경찰이 출동했다. 그래서 현재 경찰서. 남준은 잡혀서 취조 중이다. 지민은 뺑소니를 인정했다. 곧 취조 당할 것이다.
석진은 먼 산을 바라보며 지민에게 묻는다.
왜 감췄어.
지민은 우물쭈물 대답한다.
무서워서…….
에휴, 감방 잘 다녀와.
석진은 덤덤히 말한다. 잘못한 사람은 응당 벌을 받아야지. 지민이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다.
남준은 윤기의 카메라를 내민다. 형사들은 답답해하며 말한다.
민윤기 씨가 피해자라는 걸 그냥 말했으면 됐잖아요.
그럼 이 카메라를 가져가실 거 아니에요.
김남준, 너희 피해 정도가 심각한 건 아니라서 그냥 합의 정도로 끝낼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감방을 넣기에도 지민이가 위험할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위험해 보이는 걸.
카메라 속의 형 사진은 너무도 간절했다. 누가 나의 지금을 알아줘, 라고 발버둥치는 듯했다. 전화기도 없는 형은 셔터를 마구 눌러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진 속의 엇나간 초점과 렌즈에 묻은 눈물, 피가 나는 너무도 아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박지민을 찾아갔던 것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찍힌 박지민 사진은 박지민이 뺑소니범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나는 어디에라도 울분을 풀어야만 했다.
아마 그 울분은 윤기 형을 잡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던 것 같다. 지금 깨달아봤자 뭐 소용없지만.
나의 정신은 붕괴했고 여기는 어딘지도 모를 정신병원이다. 온통 하얀색인.
형.
가끔 나는 하얀 벽을 보며 형을 부른다. 검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나는 그렇게밖에 형을 기억하지 못한다. 형은 왜 자신의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Hold me tight+피땀눈물 듣다가 쓴 글.
남준의 병은 실제로 있는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