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
오늘은 박지민이 나가는 날이다.
나는 옮겨지는 짐들을 바라본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물건들이 점차 빠져나간다. 박지민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옷가지가 든 가방을 메고는 말한다.
잘 있어.
잘 살아, 라고 들린다. 나는 자존심 때문에 붙잡을 수 없다. 문 쪽으로 향하는 박지민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다.
갑자기 집이 흔들린다. 벽을 붙잡고 간신히 선다. 옆에 서 있던 벽장이 기울어진다. 간신히 피한다. 벽장은 벽에 걸려 완전히 쓰러지지 않는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다. 벽장이 만든 틈이 보인다. 박지민이 메고 있는 옷가방을 잡아 끌어당긴다. 박지민은 너무도 쉽게 끌려온다.
-……또한 갑자기 발생한 지진에 많은 시민들이 건물 안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현재 수색을 하고 있지만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사료되며…….
그럼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옆에는 덜덜 떠는 박지민이 있다. 자신의 옷가방에서 옷을 꺼내어 덮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한가보다. 나는 투덜거리듯 말한다.
옆으로 오지.
싫어.
붙어있는 게 더 따뜻할 텐데.
뭐, 얼어 죽을 것 같으면 지가 기어오겠지. 즉각적인 대답에 약간 성질이 난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살아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벽장 너머를 슬쩍 보니, 부엌으로 가서 먹을 것을 가져오는 건 무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 안 마시고 사람이 며칠 살 수 있더라. 3일이었나. 그 안에 구조될 수 있을까. 아니, 당장 얼어 뒤지지 않을 궁리부터 해야 한다. 밤이 되면 더 추워질 텐데 박지민한테 옷 좀 달라고 해야 하나. 켜 놓았던 보일러는 작동이 안 되는 것 같고 옆으로 바람도 숭숭 들어오는데.
갑자기 옆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보일러 작동되고 있는 거였나. 옆을 바라본다. 박지민이 아까보다 가까워져 있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앉아있다. 내 눈치를 보는 박지민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난 정말 쓰레기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연애는 늘 박지민이 내 자존심을 지켜주며 이뤄졌다. 시작 또한 그랬다.
박지민과는 댄스 동아리에서 만났다. 나는 가끔 얼굴만 비추는 곳이었다. 신입을 뽑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딱히 갈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언젠가 보겠지, 뭐. 하지만 친한 형이 가서 꼭 봐야한다며 나를 끌었다. 이번에 들어온 놈들 중에 비범한 녀석이 하나 있다며 가는 내내 옆에서 쫑알거렸다.
티비 보고 따라 추기만 하는 고만고만한 녀석들하고는 느낌부터가 다르다니까? 기본부터 배운 놈이야. 확실해. 네가 면접 때 있었어야 했는데. 분위기가 아주 그냥!
동아리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는 룸에 들어갔을 때 확실히 비범한 놈이 하나 있긴 있었다. 머리색깔이 비범했다. 주황 머리라니. 검은 머리통들 사이에서 눈에 확 들어왔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술을 받고 있는 걸 보니 신입생인 게 확실했다.
김태형, 왔냐.
부원 하나가 아는 척을 해오길래 워, 하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주황 머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방금 받은 걸로 보이는 술을 한 방에 들이마시고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구십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박지민입니다.
순간 같이 구십도로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내가 선배라는 걸 기억해내고는 까딱 고개만 숙여줬다. 옆에서 형이 속삭였다.
쟤가 걔야.
춤은 모르겠고, 머리색은 비범하네.
형은 심드렁히 말하는 내게 혀를 찼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부원들도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김태형, 진짜 오랜만이다!
어쩜 더 잘생겨졌다, 야.
나한테도 그런 소리 좀 해주지?
넌 매일 보잖아.
형이 여자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하는 사이 박지민이 내 옆으로 왔다. 저 멀리서 유령회원에게 잘 보일 필요 없다니까,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말을 무시하고 다가온 박지민은 내게 물었다.
동아리에 언제언제 오세요?
왜 물어봐.
신입, 술 받아야지.
아, 네.
순간 다른 부원이 불쑥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와 박지민에게 술을 건넸다. 박지민은 그 술을 받아 마신 후 손으로 입모양을 가린 후 나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관심 있으니까요.
나는 멍하니 박지민을 바라봤다. 이름이 중성적인데, 혹시 여자애인가. 하지만 아까 술이 넘어갈 때 목에서 움직이는 것은 분명 목젖이었는데. 아니면 취했나. 얼굴은 안 빨간데.
너 혹시 취했니.
아니요.
그럼 미쳤니.
아니요.
또박또박 말대답을 잘하는 걸 보니 취한 것도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럼 설마.
나 남잔데.
알아요.
그럼 대체 왜 나한테 고백한 거야. 박지민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나도 그런 박지민을 딱히 눈 돌리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왜 이리 찐하냐.
형이 굳이 끼어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고기를 한 점 먹었다. 그리고 조용히 박지민에게 말했다.
좀 있다가 보자.
박지민이 신입생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녀석은 여기저기서 술을 받아 마셨다. 부원들은 그냥 마시는 건 또 심심할 거라며 섞어서 주기까지 했다. 소맥에 폭탄주…….
그러니까 이번엔 진짜로 취했다.
선배! 뭘 볼 거예요!
조용히 술을 마시던 박지민이 갑자기 일어나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안 그래도 형이 아까부터 나를 추궁하고 있던 차였다. 평소면 적당히 자리 뜨는 놈이 왜 지금까지 있냐고. 박지민의 말에 친구놈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여뭐여, 쟤 때문에 지금까지 있는 거였어?
목소리가 너무 컸다. 조그마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게이라는 말이 섞여 들렸다. 평생을 스트레이트로 살아온 나였다. 딱히 호모포비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못했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인상을 찌푸리며 나왔다. 박지민이 졸졸 뒤쫓아 나왔다.
보자면서요!
계속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어느 순간 녀석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문장이 종결되지도 않은 채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박지민이 길가에 엎어져 있었다. 저렇게 있으면 그냥 갈 수가 없잖아…….
야, 야.
얼굴을 들어 뺨을 툭툭 쳤다. 말랑말랑한 것이 쏙하고 들어갔다가 나온다. 하지만 박지민은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박지민을 안아 들었다. 말랑말랑한 얼굴과 달리 몸에는 살이 안 붙었는지 가벼웠다. 볼을 칠 때는 미동도 없더니 안아드니까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중얼거렸다.
선배, 좋아해요…….
애기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뭔가 범죄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이 화악 뜨거워졌다. 그래서 괜스레 녀석을 흔들었다.
일어났으면 일어나지?
그랬더니 녀석은 더 품에 파고들며 말했다.
마포구 망원동이요…….
데려다달라는 건가. 하필이면 집 근처냐. 나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했다.
집 근처라서 데려다주는 거야.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아저씨는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다가 박지민에게서 묻어나는 술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박지민은 비밀번호도 아무렇지 않게 불러줬다. 얘가 술버릇이 안 좋네. 혀를 차며 침대에 녀석을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으려 했다.
박지민의 팔이 내 목을 껴안고는 놓지 않았다. 손으로 잡아서 풀려고 하니 박지민이 등에서 스르르 내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는 나와 눈을 맞췄다. 뭐야.
선배, 좋아해요.
수줍은 목소리로 박지민은 말했다.
눈을 접으며 웃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까 박지민이 쓰러졌을 때부터 술기운이 돌기 시작한 것 같았다. 말랑말랑한 볼이 쏙 들어갈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가끔은 생각을 버리는 게 훌륭한 선택이다. 녀석이 맞춰오는 입술에 나는 호응했다.
다음 날 미치도록 후회하기는 했지만.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나는 박지민에게 짜증을 부렸다.
어제 일은 미안하다. 본심 아니었으니까 잊어버리고.
박지민은 매달렸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안 좋았냐고 물어댔다. 문제는 좋았다는 거였다. 나는 머리를 박박 긁어대다가 물을 한 잔 마셨다. 여전히 속이 탔다.
그래서 뭐, 사귀자고?
네.
당당하다고 생각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박지민은 이어 말했다.
한 달만이라도, 네?
나는 어젯밤을 생각했다. 나쁘지 않았다. 남자를 안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지민이 매달리고 있었다. 자존심 상관 안 하고 나를 붙잡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한 달만.
내 말에 박지민이 입을 맞췄다. 술이 깬 상태인데도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박지민은 항상 먼저 연락했고, 달려왔고, 조잘거렸다.
선배 좋아한 건 작년부터. 저 재수할 때.
재수?
네.
너 동갑이야?
네.
동갑인데 왜 존대해.
선배니까요.
그러고 보니 형이라고 한 적이 없네.
오오, 호칭 정도는 기억해주시는 건가요.
말 놔, 그럼.
그래, 그럼.
불균형한 관계는 위태롭다는 걸 분명 나는 잘 알고 있었는데도 그냥 즐겼다.
언제부터인가 박지민은 야근이라며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안일했다.
그리고 돌아온 박지민에게 이별통보를 받았다.
박지민은 떨고 있는 내게 옷가지들을 건네준다. 나는 조용히 그걸 받아서 덮는다. 좀 살 것 같다.
바람 소리가 무섭다.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이 곳이 무너질까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이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계속 이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렇게 계속 있지 않으면 박지민을 붙잡아둘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박지민은 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태형아아. 나 힘드러어. 누군가와 전화기를 가지고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회사 앞 술집이에요. 박 대리가 술에 많이 취하셔서 데리러 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또박또박하게 들려오는 저음에 나는 말했다.
박지민이 자기 집 주소 안 읊어요? 택시 태워 보내세요.
자칫하면 제 집 주소를 부를 것 같아서요.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갈 거니까 꼼짝 말고 있어요.
입고 있던 차림에 슬리퍼만 신고 나왔다. 추워서 팔로 몸을 감싸 안고 달렸다.
박지민이 낯선 사람 등에서 칭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박지민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박지민을 안고 있던 남자를 째려봤다. 양복을 깔끔히 차려입은 남자는 그 시선에 자기소개를 했다.
김남준이라고 합니다. 박지민 씨가 속한 부서 부장입니다.
안 물어봤는데.
말이 유치하게 나갔다. 아마도 내가 지금 비교된다는 느낌을 받아서일 거다. 나는 내 모습을 내려다봤다. 체육복에 난 구멍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들어 일정한 간격으로 무릎 뒤쪽이 부풀었다가 빠지는, 기현상이 연출되고 있었다. 갈아입고 나올 걸.
그렇게 체육복 바지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박지민이 몸을 떨며 말했다.
태형아, 나 추워…….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택시를 잡으려 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나는 다리를 달달 떨며 지나가는 택시 없나 도로를 계속 주시했다.
갑자기 김남준이라는 사람이 내 앞으로 불쑥 들어왔다. 자신의 양복 마의를 벗어서 박지민을 덮으며 말했다.
몸조리 잘하시고, 다음 주에 봬요.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자기도 추울 텐데 흐트러지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형아아.
침대에 누울 때까지 박지민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내 이름만을 불러댔다. 나는 무시했다. 그냥 술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왜라고 안 대답해줘?
자.
이불을 덮어준 후 나가려했다. 박지민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헤어지자.
나는 박지민을 바라봤다. 술주정이라기엔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 장난으로 받아칠 생각도 하지 못하며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놈 때문에 그래?
그래서 박지민을 나쁜 놈으로 몰아갔다. 박지민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불을 끄며 말했다.
그래, 그럼.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어이없는 끝이다.
구조대는 오지 않는다. 박지민은 자지 않으려고 내 옆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태형아.
……어.
이틀 만에 처음이다. 박지민이 나를 먼저 부른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대답하려 한다. 일부러 뜸을 들이고 대답한다.
하늘은 내 편인 거 같아.
무슨 개소린가 싶다.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나. 멍하니 바깥을 바라본다.
무의식적으로 그 때의 나는 박지민도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난 게 맞다고 믿었기에 부질없는 희망을 주는 생각은 애써 지워버렸다.
하지만 후에 김남준에게 모든 것을 전해 들었을 때는 나는 모든 것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게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벽장 안에 있는 물건들은 중력에 이끌려 시간이 갈수록 쏟아져 나오려 한다. 주변에 있는 막대기로 손잡이가 열리지 않도록 고정시켜 놓았지만 끼익거리는 소리가 위험의식을 일깨워준다.
박지민은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벅차는 듯 눈이 깜빡거린다. 박지민의 의식이 점멸해가는 게 보인다. 나는 가까스로 손을 올려 뺨을 두드린다.
야, 야.
볼이 푸석하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 피부가 좋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그 때, 어딘가 무너지는 소리가 사람 소리와 섞여 들린다. 그런데 비명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환호에 가깝다. 구하러 온 건가. 무의식적으로 나는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린다.
박지민, 살았어.
기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다만 그렇게까지 기쁘지 않을 뿐. 시간이 느리게 가길 바란다. 조금만 더 이렇게 같이 있길. 사람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는 의식을 잃은 박지민을 안으며 몸을 웅크린다. 벽돌 더미들이 치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나마 있던 지지대가 사라지면서 이 안에 간신히 유지되던 균형이 깨진다.
깨진 균형에 콘크리트 천장이 무너져 벽장 위로 떨어진다. 그 충격이 벽장 손잡이 사이에 끼어있는 막대기까지 전해진다. 막대기가 부서지며 벽장 안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져 내린다. 옷가지들 사이로 롤러스케이트나 킥보드가 보인다. 내가 왜 저걸 저기다가 쑤셔 넣어 놨을까, 고민할 시간이 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느리게 가길 바란 건 아니다.
내 눈 앞에 롤러스케이트 헬멧이 다가왔을 때 박지민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몸을 돌린다. 물건들이 강하게 등을 때린다.
나는 정신을 잃는다.
//
여기!
한 소방관이 외친다. 다른 소방관들이 모여든다. 등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소년과 그 소년의 품속에 안겨 있는 또 다른 소년이 있다. 그들을 안아들고 위험한 곳을 빠져나온다.
앰뷸런스!
간호사들이 그 말에 달려와 안겨있는 소년들을 받아든다. 머리에 붉은 기가 도는 소년을 받아든 간호사가 그를 알아보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한다. 소년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목을 잡더니 다급하게 말한다.
호흡기!
그 소년은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숨이 끊어지고 만다.
//
환자 부모님께서 연락이 안 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를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양복에 붙은 먼지를 털며 말한다. 간호사는 몇 장의 종이를 내민다. 나는 이름을 적으려 한다. 김남준. 손끝이 떨려서 몇 번이고 손을 턴 후에야 다 적는다.
간호사는 손을 주무르는 내게 묻는다.
지금 영안실에 있어요. 보시겠어요?
……아니요.
보면 미련하다고 욕하며 때릴 것 같다. 나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다.
같이 실려 왔다는 사람을 보고 싶은데요.
그쪽도 아시는 분인가요? 저쪽으로 쭉 들어가시면 있어요.
간호사가 말한 복도로 쭉 들어오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한다. 김태형. 박지민이 그렇게나 읊어대던 이름.
나는 박지민의 생각에 반대한다. 김태형은 알아야한다.
누워있는 김태형을 보며 생각한다. 반드시 살아나라고.
中
온몸이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 무겁다. 얼굴 한쪽과 손은 따갑기까지 하다. 가까스로 눈을 뜬다.
나는 거친 모래 위에 엎어져 있다. 몸을 간신히 일으켜 얼굴과 손에 붙은 모래를 떼려한다. 잘 안 떼어진다. 그러고 보니 옷도 몸에 들러붙어있다. 옷을 잡아당기니 찰박거리는 소리가 난다. 어디서 젖은 거지. 모래는 내가 누워 있던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른 상태이다. 덕분에 나의 몸도장은 고스란히 모래 위에 찍혀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위로 꺾는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보게 된다.
물이, 아니 강이 떠있다.
빛이 굴절되어 달은 평소보다 더 가까워보인다. 믿을 수 없어서 손을 강 속으로 넣는다. 넣고 손을 휘젓는다. 물은 떨어지지 않는다. 꺼낸 손은 젖어있다. 몇 번 그 짓을 반복하다가 문득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온 거지.
다시 모래바닥을 바라본다. 내 몸도장은 조금씩 흐릿해져가고 있다. 주변에 발자국이라곤 내가 방금 일어나면서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없다. 위에는 강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위에서 떨어진 건가.
내가 이전에 뭐하고 있었나 생각을 해보려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아니, 내가 이전에 살아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뭐지.
일단 주변을 둘러본다.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외로운 건 싫다. 이곳은 너무 어둡다.
다행히 있다. 주황 머리가 눈에 띈다. 나는 다가간다.
내 발소리를 들은 건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던 사람은 나를 향해 돈다. 조그마한 손이 힘없이 달랑거린다.
순간 생각한다. 저 손을 잡고 싶다고. 왜? 내 묻힌 기억 속에 이 사람이 있는 건가? 알 수 없다. 다만 그 손을 내밀어주길 바란다. 내가 먼저 잡는 건 이상하니까.
나와 다르게 그 사람은 젖어 있지 않다. 마른 와이셔츠가 바람에 팔락인다. 그 사람이 가볍게 웃는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어딘가로 총총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 웃음에 나는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다. 순간 스쳐지나간 생각을 무시하고 나는 그 걸음에 맞춰 따라 걷는다.
//
타박상이 좀 심해서 그래요. 깨어날 거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이걸 걱정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마른세수를 한다.
자리를 지킨 지 이틀, 김태형은 일어나지 않는다. 의사와 간호사는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나는 믿지 못한다. 박지민의 어머니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기 때문에.
박지민이 김태형을 처음 본 건 병원에서라고 했다.
나는 미국에 유학을 가 있었다. 그래서 박지민의 부름에 빠르게 달려오기는 했지만.
남준이 형…….
도착했을 땐 이미 박지민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상태였다. 장례식도 혼자 치렀다고 했다.
혼자서 어머니의 곁을 지킨 박지민의 심정은 어땠을까.
박지민의 아버지는 외교관이시다. 그는 당시 파견되어 있던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 그곳에 발이 묶인 채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박지민은 나를 불렀다.
여태까지 박지민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사촌 형인 나에게 많이 의지해왔다. 장난스럽게 내가 노안이라서 그렇다고 말하는데, 가끔은 진심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젠장.
어쨌든 나는 늦었고 박지민은 많이 힘들어했다.
박지민은 울고 있었다. 계속 울어댔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기본적으로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울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의사 새끼는 내가 해결해주겠다고 하며 휴지를 가져다가 눈을 가려주기도 하고 콧물이 나오지 않도록 코를 막기도 했는데 소용없었다. 할 수 없이 수건을 가지러 갔다. 짐을 마구 쑤셔 넣어놔서 찾는데 꽤 오래 걸렸다.
수건을 가지러갔다 온 사이 박지민은 울음을 그친 듯 보였다. 박지민은 막대사탕을 쪽쪽 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애라서 나는 왜 저 생각을 못했을까 후회했다. 나는 물었다.
막대사탕 어디서 났어?
몰라.
박지민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울어서인지 얼굴이 붉었다.
//
총총거리는 걸음을 쫓아오다보니 주위의 환경이 많이 달라져 있다.
강은 여전히 떠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깔려 있고 저 멀리 보이던 이 곳의 끝은 가까워져 있다. 마치 벽처럼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도록 막고 있다.
나는 그 벽 사이에 서 있다. 꼬깃한 채로 마른 옷은 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도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옷을 잡아당겨 피려 한다.
앞서 가던 사람이 멈춘다. 나는 그 너머를 슬쩍 본다. 요상한 동굴이 있다. 기묘한 모양의 돌들 사이로 어둠만이 짙게 깔려 있다.
깜깜한 건 싫다.
발을 뒤로 물린다. 앞의 사람이 모래소리에 뒤돌아본다. 그리고 묻는다.
무서워요?
손을 내민다. 조그마한 손이 낯설지 않다. 나는 그 손을 잡는다.
//
김태형, 이라고 했다. 나는 물었다.
그게 누군데.
유학 생활 막바지에 어떤 회사에서 나를 스카우트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당연히 수락했다. 미국 생활을 정리한 후 바로 그 회사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박지민이 있었다.
나를 보고 흥분하기에 왜 저러지 했다. 박지민이 나를 부르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그러니 당연히 나는 박지민의 축 처진 모습만을 보아왔다.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성적되는 대학들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는데 홍대에서 공연을 하는 거야. 거기 있었어.
그래서 조잘조잘 떠드는 박지민은 많이 낯설었다. 나는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고 듣고만 있다가 간신히 물었다. 그게 누구냐고. 박지민이 일부러 안주를 잔뜩 입에 넣고 말해서 내가 몇 번이고 물어본 후에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 음. 나 위로해준 사람.
언제.
어, 음.
잘만 말하더니 질문하니까 입을 꾹 다물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술을 건넸다. 박지민은 술을 건네면 묻는 말에 솔직해지는 경향이 있다. 웬만한 건 술만 먹이면 술술 말한다.
언제 처음 만났는데.
그러니까…….
입을 열기 시작한다.
//
손 안에 잡힌 손의 감각조차 익숙하다.
기억의 편린이 어디선가 반짝인다.
//
김태형은 사람을 좋아했다. 자존심이 있어서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꼭 누군가가 다가왔다. 다가온 사람들을 대하는 김태형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가왔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넘쳐나게 되었다. 그는 넓어져가는 인맥이 딱히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름 모두를 신경 쓰며 고루고루 친하게 지냈다.
그랬던 김태형이 사람에게 소홀해진 것은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항상 이해관계가 자리 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김태형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간과했다. 아무리 변해봤자 아이와 청소년 사이의 간극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고등학생 때처럼 사람을 사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청소년과 어른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
김태형은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부장을 바라봤다. 그는 다리에 붕대가 감겨져 있는 상태였다.
곧 공연인데…….
누군가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자기 들으라고 하는 소리라는 사실을 김태형은 알았다.
김태형은 댄스 동아리 소속이지만 가끔 관현악 동아리를 도와줬다. 색소폰을 불 줄 알기 때문이다. 인원이 부족하면 종종 충당해주었다. 그래서 댄스 동아리 부원들은 김태형에게 협상 테이블에 서라고 말했다.
너 걔들이랑 친하잖아. 잘 좀 말해봐.
쟁점은 공연 시간이었다. 관현악 동아리는 일찍이 금요일 저녁 시간을 선점했다. 댄스 동아리 부원들도 그 시간을 원했다.
불금이잖아! 불금인데 자라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툴툴거리면서 내뱉었다.
김태형은 결국 거부했다. 부장은 다른 사람을 대신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치열하게 다퉜다. 그 와중에 같이 간 부원이 위와 비슷한 어감의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관현악 동아리 부장은 판을 뒤엎고 그 부원의 멱살을 잡았다. 댄스 동아리 부장이 싸움을 말리기 위해 끼어들었다.
김태형은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저 논란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는 것이 싫었다. 논란이 끝나더라도 저 사람들을 마주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가 자신을 비꼬는 말을 내뱉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김태형은 잠적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김태형은 천천히 그쪽을 향해 다가갔다. 검은 머리의 박지민이 울고 있었다.
김태형은 박지민을 보며 동년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였으면 아이 하나가 울고 있으면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그이지만, 그날따라 위로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었기에.
김태형은 주머니를 뒤졌다. 막대사탕이 나왔다. 박지민의 손에 쥐어주었다. 박지민은 끅끅거리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사탕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꼭 까달라고 하는 거 같아 김태형은 귀찮게, 라고 중얼거린 후 지민의 손에서 사탕을 뺏어들었다. 낑낑거리며 껍질을 벗겨내고는 다시 쥐어주었다.
박지민은 자신을 애로 봤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 나빠져서 울음도 멈추지 않고 그냥 들고만 있었다. 작은 반항이었다. 김태형은 그게 또 기분이 나빴다.
먹어.
박지민은 그 말을 하는 김태형의 인상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박지민은 당돌하다. 그러니 김태형을 속일 생각을 했지. 박지민은 울던 걸 멈추고 물었다. 계속 울어서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왜 주는 거예요?
나 안 먹으니까.
왜 안 먹어요? 먹으려고 산 거 아니에요?
안 땡겨.
김태형은 귀찮다고 생각했다. 역시 안 하던 일은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박지민은 그런 김태형에게서 배려를 읽고는 말했다.
고마워요, 대신 사과 받는 기분이네.
김태형은 이 꼬맹이가 물어봐달라는 건가, 순간 고민하다가 물어봐줬다.
누구한테 사과 받을 일 있어?
의사선생님이요. 살인자 새끼.
생긴 것과 다르게 격한 말에 움찔한 김태형을 슬쩍 본 박지민이 우물거리며 이어 말했다.
의료과실인데 죄송합니다, 그 한 마디 하고 갔어요. 다음 환자 있다면서.
김태형은 박지민의 말에 수술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름 시위하고 있는 거죠.
아, 의사선생님이 그쪽 많이 닮았어요, 라고 덧붙여 말하고는 사탕을 꺼내어 핥았다.
김태형은 남의 실수로 인해 순식간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소년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내 과실에 남 탓을 하고 있다고. 자신이 나가서 잘 처신했다면 되는 거였다. 순식간에 달리 연결된 사고의 회로에 놀란 김태형은 순간적으로 말했다.
고마워.
박지민은 당연히 김태형의 머릿속을 읽지 못하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가요?
그냥…….
손은 성의 없이 머리를 긁적이는데 반해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박지민은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뭐지. 내가 뭘 했지.
그러다가 문득 박지민은 행동 하나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했다.
실수는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때문에 자신은 몇 날 며칠을 여기서 울었다. 슬픔과 억울함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만들어진 눈물은 끊이지 않았다. 저 남자의 사탕 하나로 자신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런데 또 저 남자는 자신의 말에 무언가를 느끼고는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고맙다는 그 말은.
박지민은 우연의 기묘한 카테고리에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생명의 존귀함과 부질없음. 사람에 대한 사랑과 증오. 양립될 수 없는 것들을 우연은 강한 힘으로 둘이 같이 있도록 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박지민은 김태형이 좋아졌다는 거다. 자신을 무시한 의사선생님과 닮아서 빨리 꺼져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저 사람을.
박지민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김태형은 멀어지고 있었다. 박지민은 그 때 당시에는 약간 두려웠다.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얌전히 김남준을 기다렸고 그 일을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우연이 다시 김태형을 자신의 앞에 나타나도록 했을 때 그제야 인정했다.
김태형은 기울어진 시소의 받침대 자리로 기어들어가 했어야 했던 일을 늦게라도 끝마쳤다. 자신을 봐서 한 번만 넘어가달라고, 그리고 잘못하신 건 맞는데 저희 쪽에서 잘못한 것도 있으니 시간만 바꿔주신다면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겠다고 관현악 동아리 부장에게 빌었다.
모든 것은 박지민 덕에 가능했다.
덕분에 축제는 무사히 끝났다. 모두들 김태형의 성과에 만족해했다. 자신들은 원하던 시간에 공연을 성황리에 끝냈으니까.
하지만 김태형은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던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나가는 걸 주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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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조각은 이어지는 부분의 기억들을 끌어당긴다. 그렇게 알게 된다. 어떻게 내가 이곳에 왔는지까지.
말도 안 되지만 여기는 저승이다. 저 강은 신화 속에나 나오는 스틱스 강일 것이다. 저 물을 마시고 기억을 잃었으니까. 동굴 얘기는 모르지만, 나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있는 박지민을 본능적으로 잡아끌려고 했다.
갑자기 강이 심하게 출렁거리더니 물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다가 이내 쏟아진다. 쏟아지는 물에 박지민의 손을 놓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우적대다가 강물을 삼키고 만다.
이 강이 스틱스 강임을 기억해낸다. 또 잊을 수 없다. 나는 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박지민을 바라본다. 동굴 안에는 물이 안 들어간 듯 박지민은 흐트러져 있지 않다.
물살에 휩쓸리며 나는 점점 더 위로 올라간다. 강은 차갑지만 중간 중간 따뜻한 것이 느껴진다. 눈물이 나고 있는 것 같다고 짐작만 할 뿐, 확인할 길은 없다.
박지민이라는 세 글자를 머릿속에 몇 번이고 새긴다. 이번에는 잊지 않을 거다.
달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나는 달빛이 이렇게 강했나 생각하며 눈을 찡그린다. 물속에 부유하고 있는 빛의 입자가 보인다. 몽환적인 장면에 정신을 놓을 뻔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니 가라앉던 몸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문득 이렇게 계속 가다간 달과 부딪히지 않을까 걱정한다. 숨이 슬슬 막혀온다. 꽤 오래 참았지만 곧 한계이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풀리려는 찰나 달이 나를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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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생각은 김태형으로 돌아온다.
내가 김태형에게 뿌린 떡밥은 통했다고 박지민은 말했다. 그 말을 하는 박지민은 서글퍼 보였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건 안 돼?
힘들어할 거야.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박지민은 김태형을 너무 잘 알았다. 자존심을 세우는 게 귀엽다고 말하기도 했고 때로는 짜증난다고 했으며 솔직히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자존심을 세워서 되는 일이 있을까.
종종 박지민은 혼잣말 식으로 물어왔다. 당시에는 김태형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추리닝 차림의 김태형은 내 옷차림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기분이 매우 나쁘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지민이 말한 그대로였다. 좋게 보면 감정이 드러나는 게 귀여웠고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사이인데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짜증나기도 했으며 저렇게까지 다 드러나면 대체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이 던져놓은 떡밥을 물 거라고.
사실은 떡밥을 던질 생각 따위는 딱히 하고 있지 않았다. 그 말만 아니었어도.
박지민이 자기 집 주소 안 읊어요? 택시 태워 보내세요.
박지민이 힘들다고 하는 걸 들은 적은 거의 없다. 고모의 죽음을 회상할 때 한 번씩 힘들었다, 라고 탄식처럼 내뱉을 뿐이었다. 개새끼. 나는 욕을 참고 대신 도발을 했다.
자칫하면 제 집 주소를 부를 것 같아서요.
누군가 내 멱살을 잡는다. 김태형이다. 나는 놀라서 입을 살짝 벌린다.
환자분! 안정을 취해야!
박지민 어디 있냐고!
주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찬찬히 김태형을 관찰하고 있다.
녀석의 눈은 나를 정확하게 응시하지 않고 있다.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흔들리면서도 목소리는 굵고 날카롭게 내지른다. 일종의 절규 같다.
간호사가 강제로 주입한 약에 의해 김태형은 쓰러진다. 나는 그제야 밀려오는 숨을 몰아서 연거푸 쉰다.
김태형은 미친 것처럼 보인다.
下
깨어나니 생각나는 이름은 박지민이다. 당연히 내 이름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이름 칸에는 김태형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그럼 박지민은 누구일까 고민한다.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어서 저승에서의 박지민의 모습, 이승에서의 박지민의 모습이 차례로 떠오른다.
박지민이 김태형이라고 말한다. 박지민과 함께한 나를 본다. 거지같다. 그러다가 김남준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보호자처럼 옆에 앉아있는 김남준을 바라본다.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더러운 결말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답을 아는 질문을 녀석의 멱살을 잡고서 녀석에게 퍼붓기 시작한다.
박지민 어디 있냐고!
오른쪽 팔을 누군가 붙잡는다. 따끔한 느낌이 난다. 의식이 흐릿해진다.
꿈조차 꾸지 못한다. 깜깜한 곳은 너무나 무섭다.
눈을 뜬다. 김남준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모든 건 당신을 위한 거였어요.
귓가에 웅웅 울려댄다.
박지민과의 관계부터 알려드리는 게 좋겠죠. 저 지민이 사촌 형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 아니라고요.
지민이한테는 당신밖에 없었어요.
당신이 자존심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박지민은 그냥 자신을 나쁜 애로 만들기로 한 거예요. 저만 입 다물어주면 당신은 진실을 알 수 없을 테니까.
자신만 나쁜 인간이 되면 자신이 백혈병 환자로 침대에 누워 있어도 당신은 날 떠난 놈 꼴좋다, 이러면서 지나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약에서 깨자마자 생각한 건 나는 또 남 탓을 했다는 거였다.
모든 걸 김남준 탓으로 돌리려 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멍한 머리 탓에 김남준의 말이 이해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김남준은 사라졌다.
나는 박지민에게서 깨달았으면서도 박지민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다. 차라리 강물을 마시고 모든 걸 잊고 올 걸 그랬나보다.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본다. 달리 할 게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에는 온통 박지민과 관련된 기억들뿐이다.
슬픔에서 회복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아픔과 관련된 기억을 점차 흐릿하게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박지민과 관련된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스틱스 강물을 마셨는데도 잊지 않은 기억이다. 그렇게 쉽게 흐릿해지지 않는다.
내가 지우고 싶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지우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기억은 더 선명해지니까.
나는 포기한다. 그냥 모든 걸 인정해버린다.
나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병신에 쓰레기다. 박지민은 죽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걱정해서 더 거지같이.
더러운 자존심이 자꾸 남을 공격하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소용없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버린다. 자존심은 내가 반응해주지 않자 슬슬 무뎌진다.
그렇게 되니 일상은 반복의 연속이다.
아침에 일어나 병원 앞 정원에 있는 연못을 바라본다. 가끔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는 손을 넣어 물 밑에 빈 공간이 있나 확인해보기도 하고 직접 들어가기도 한다. 물속에서 눈을 뜨고 동굴이 없나 찾아본다. 혹은 그 물을 마시고 내 기억에 이상이 없나 확인해본다.
점심엔 카드놀이를 한다. 정확히는 카드 쌓기 놀이를 한다. 홈베이스를 지나다가 본 건데 한쪽이라도 위태로우면 쓰러진다는 게 인상 깊어서 기억해놓았다. 사람들은 내가 쌓아놓은 카드를 보고 말한다. 하우스 오브 카드. 뭐라뭐라 설명도 덧붙여서 해주지만 단어가 어려워서 그냥 그렇구나, 한다.
해가 지고 어슴푸레하게 어둠이 찾아오면 나는 지어놓은 카드집을 모두 부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밤이 오기 전에 미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자려고 노력한다. 새벽까지 잘 수 있도록 수면제를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꿈을 못 꾼다. 깜깜한 건 싫다.
이 하루가 계속 돌아온다.
김남준이 언젠가 찾아와서 말했다.
이런 꼴 보려고 말해준 거 아니라고. 불쌍한 박지민 몫까지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라도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해준 거라고.
나는 말한다.
잘못 생각했어.
내가 그 자존심을 진즉에 버리지 못해 후회하고 있다는 걸 김남준은 몰랐던 모양이다. 나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김남준을 비웃었다.
너 멍청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불편하다. 박지민 하나 보러 가는데 김남준이 따라 붙는다. 귀찮다.
박지민은 유리 너머 항아리 속에 있다고 한다. 시신을 불에 태워서 넣어놓은 거라나.
박지민 영혼을 봤는데. 육체보다 조금 더 작았던 거 같아. 근데 나보다 강했어.
김남준은 내 말을 깔끔히 무시한다. 꽃다발을 앞에 두고 눈을 감은 후 고개를 숙인다.
나는 유리벽 너머에 있는 사진을 본다. 유리벽을 쓰다듬는다. 김남준은 말한다.
그거 못 열어요.
열 생각도 없다. 계속 쓰다듬으며 너무 차가운 벽이라고 생각한다. 저승의 강물도 이랬던 것 같은데.
저승의 강물. 사물 정도는 탓해도 되지 않을까. 저승에서 박지민을 봤을 때 알아채지 못한 건 아마도 강물을 마셔서겠지. 내가 손을 놓게 된 것도 그 강이 갑자기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택시 손잡이를 잡는다.
강물을 마시지 않은 건 내 선택이었다. 더 이상의 시간은 의미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신호에 걸린 택시 문을 연다. 김남준이 차마 잡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뛰쳐나온다.
김남준의 시야를 벗어나 올라온 이곳은 높다. 사방의 하늘이 모두 푸르다. 어두운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해를 바라본다. 하늘이 맑아서인지 평소보다 쨍쨍한 듯하다. 저승에는 달이 떠있던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게 내가 사는 길이었을 거라고. 분명 살아 돌아온 것 같은데, 아닌 것 같다.
눈을 감는다. 떨어진다.
물속이다. 제대로 왔다. 분명 아침이었는데 하늘에는 달이 떠있다. 나는 물을 크게 들이마신다. 자연스레 정신을 잃어간다.
기억들이 물속으로 흩어진다. 편린이 되어 달빛에 빛난다.
기억이 없음에도 나는 너를 따라갔다. 그러니 다음 생에서도 아마 너를 따라갈 것이다. 그래서 이번 생의 나는 완전히 버리고 따라간다. 어떤 나로 환생하더라도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
택시 기사에게 돈을 지불하고 김태형이 달려간 방향으로 달린다. 어딘가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뒤늦게 으스러진 김태형의 시신을 발견한다.
간신히 유지하던 냉정이 깨진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바닥에 손을 짚어 몸을 지탱한다. 김태형에게서 흘러나오는 피가 손을 적신다. 느껴지지 않는다.
시신은 너무 자극적이다. 이 자극적인 영상은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모든 게 내 탓인 것 같다.
박지민의 계획을 반대할 수 있었다. 그냥 김태형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라고 말하던 박지민을 더 빨리 그 집에서 빼내올 수 있었다. 서둘러 수술을 시킬 수 있었다. 쓰러지고 일어난 김태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한 명은 살릴 수 있었다.
떠오르는 모든 장면마다 나는 숨이 막힌다. 마치 끊이지 않는 재난이 일어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난영화의 마지막에서 생존자는 행복해했나.
House of Card+Save me+I Need You
쓰고나니 인소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