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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199739l 4

  

검은 새 - 남혜승 및 박상희

본 글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나아갑니다.




경성블루스 二




연. 외자도 아니고 말 그대로 성씨가 없는 이 이름의 사연을 알게 된 건 어린 나이였다. 쌍둥이인 태형과 투닥거리며 장난을 칠 정도의 나이가 됐을 무렵, 어머니는 작은 방으로 불러 들이셨다. 비가 오던 어느 날, 강 근처의 작은 연못가에서 포대기에 둘러져 버려진 아이가 나였다며. 이대로 두었다간 죽겠다 싶어 데려왔는데 이 말을 꺼내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들었다면서. 사실 이름에 대한 궁금증과 의아함은 늘상 있었지만 함부로 꺼내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오히려 해답을 얻어낸 듯한 시원함이 먼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친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달 제 배 아파 낳은 자식 키우듯 아껴주셨으니, 그에 따른 감사함에 며칠은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나의 인생과 세월은 지금의 어머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사실만으로도 친모를 찾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저를 끔찍이 아끼던 아버지, 상냥한 어머니. 짓궂은 장난이 일상이지만 가장 친한 친구처럼 대해 주는 태형. 태형을 포함해 함께 친한 지민까지. 연은 이 안에서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 연아. "


순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아까부터 한참 불렀는데... "

" 아, 미안.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

" 태형이는 선생님이 찾으셔서 늦는대. 어쩌면 그 광경을 안 본 게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고. "



옆에서 나란히 걷던 지민이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태형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민과 경성 중심가를 걷고 있었다. 잠시나마 태형을 새카맣게 잊고 있었음에 머쓱한 생각이 들어 뒷덜미를 긁적였다. 엉킨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묶고 있자,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태형이었다면 지민처럼 맞서 싸워주었을까. 쉬이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태형의 성격은 그런 행동을 용서치 않을 것 같으니. 태형은 눈에 띌 만한 화젯거리엔 절대 나서고 싶지 않아했다. 그게 부정적인 것이라면 더더욱이. 그러니 본인의 걸상이 집어 던져지고 변깃물에 교본이 빠져 문제가 되어도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조용하게, 착실히. 그런 것들에 강박이 있었다. 어렸을 때의 태형은 무릎에 상처가 나고 옷이 찢어져도 개의치 않아하는 소년스러움이 있었다면, 지금의 태형은 그저 묵묵히 본인의 일을 해 낼 뿐이었다. 그런 태형이 아이들이 구경하는 한 가운데에서 후치오카에게 주먹을 날린다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고개를 내젓고 지민을 쳐다보았다.


' 두고 보자, 고아새끼. '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지민의 얼굴은 미안함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나때문만 아니었더래도 그런 말을 들을 일도 없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지민이 착해서. 어디로 걷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확고한 발걸음이 우리집을 향해 있는 지민이 고마워서. 신세를 진 것 같은 기분에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직 고맙다는 말을 못했는데. 고맙다, 미안하다와 같은 부끄러운 표현을 제때 하지 못하는 것은 태형과 연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옆에서 보는 지민의 얼굴이 은은한 미소를 띄고 있는 듯하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 저... 무슨 하고 싶은 말 있어? "

" 응? "

" 그... 너무 빤히 쳐다보길래. "



민망해 보이는 지민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아차 싶어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교실에서 있었던 일, 교문 앞에 있다가 앞서 나간 일 등. 결론적으로는 내가 저지른 사단을 정리해 주어서 고맙다라는 말을 두서없이 애써 돌려 이야기하니, 말을 끝까지 듣던 지민이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웃긴가 싶다가도, 그저 말을 조리있게 하지 못하고 뱉는 내가 웃기겠거니 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웃으며 눈가 끝에 맺힌 눈물을 살짝 닦아내는 지민. 그런 지민의 손등에 묻은 흙과 쓸린 듯한 생채기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난 한 약방 앞 길가에 멈춰섰다.



" 잠깐만, 다친 거 아니야? 손 좀 봐. "

" 이런 걸로 다쳤다고 하면 김태형이 웃을 텐데... "

" 됐어. 빨리 손 좀 보자. "



지민의 팔을 잡아 끌었다. 조심스럽게 지민의 손등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런 연을 지긋이 내려다보던 지민이 말했다.



" 후치오카가 괴롭히면 말해. "

" 그럼? 싸우려고? 그러다 너 진짜 학교 못 다녀, 지민아. "

" 착한 연이. 내 걱정 하는 거야? "

" 걱정은.... 그리고 착한 걸로 따지면 네가 더 착하지. "

" 그런가. 나 안 착한데. "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 그래도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좋은 것도 같네. "



내 손에서 저의 손을 빼낸 지민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 이리 와서 앉아라. "


태형은 고개를 숙이고 타케우치 선생의 앞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았다. 팔락이며 넘어가는 종잇장 소리, 다각다각 쓰여지는 펜의 소리 등이 불규칙적으로 교무실 안에 울리고 있었다. 타케우치는 태형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아들. 영락없는 조선인. 책상 위로 올려놓은 검지손가락이 탁 탁, 소리를 냈다. 양장 교복을 단정하게 갖춘 옷 매무새하며… 학급 태도와 성적이 우수한 것은 의외인데.



“ 그래, 이번 시험에서 유독 높은 성적을 받았더군. 교내에서 매우 우수한 편이던데. ”

“ 감사합니다. 타케우치 선생님께서 좋은 가르침을 주셨기때문인데요. ”

“ 역시 다른 조선인 학우들과는 차이가 있군. ”



타케우치는 어깨를 으쓱였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체크 와이셔츠 깃이 빳빳하게 모양을 잘 잡고 있었다.


“ 학교에서도 너의 우수함을 깊이 받아들였다. 일본인보다 좋은 성적을 내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지. ”

“ … ”

“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네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대일본제국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나 타케우치의 도리가 아니겠나 하는 것이 말이야. “ 



태형은 당황하지 않고 타케우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야마구치 가에 대해 알고 있나? ”



야마구치? 태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때 머릿속에 며칠 지난 지민과의 대화가 스쳐지나갔다.



‘ 조선총독부가 철도국을 신설했다는데? ’

’ 그 기차 하나에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싶다. ‘

’ 돈 많은 정치가들의 힘이겠지. ‘



그리고 읊은 지민의 입에서 나왔던 이름. 야마구치. 분명하다.



“ 그 집에 아들이 둘 있는데, 매번 그 댁으로 교본을 가져다 주러 간단다. 귀찮은 일이지만서도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니 어길 수도 없고. ”

“ … ”

“ 그런데 네가 그 일이 잘 맞을 듯해 보이네. 그 댁 사람들에게 잘 보여 연줄이 닿는다면 취직 걱정도 없을테고. ”



인심 쓰듯 말하는 타케우치의 목소리엔 들뜸 비슷한 것이 돋보였다. 본인의 일을 덜 수 있다는 기쁨인 건지, 조선인에게 아량을 베푸는 스스로에 대한 감탄인지는 모르겠으나 태형 역시 기분 나쁠 이유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태형이 그려나가고자 하는 미래는 더욱 가까워짐이 맞았기에.



“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 그 집 가문이 원래 조선인이거든. 지금이야 뭐, 이름도 바꾸고 줄도 잘 섰으니 특급 대우 받고 있지만. 조선 이름이 뭐였던가…. 기억이 안 나네.”



타케우치가 자신의 턱 끝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떠올리긴 무리라고 느꼈는지, 그리 알고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인 태형이 교무실의 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 그렇지, 전 씨였던 것 같은데… ”



태형은 손잡이를 잡아 돌려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태형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고, 어떤 일로 불려 갔었는지 물어도 영 시원찮은 대답이 돌아왔다. 당분간 돌아오는 주의 첫 요일에는 혼자 하교하라고, 갈 곳이 있다는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걱정되는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더이상 묻지 말라는 듯 단호한 태형의 의지가 선명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 어머니가 너랑 따로 와서 얼마나 걱정하셨는 줄 알아? 자기때문에 내가 진땀 뺀 건 알지도 못하고. ”

“ 그건 내가 말해 놓을게. 엄마가 원래 걱정이 좀 많은 사람이야? ”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마당에서 마주친 어머니는 태형이 아닌 지민과 같이 있음에 의아한 얼굴로 내 팔을 쓰다듬으시며 눈길을 주셨다.



“ 아, 태형이는 선생님께서 보자셔서 좀 늦는다고 했어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오랜만에 뵙네요. ”



지민이 방긋 웃었다. 어머니 역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긋 웃으며 지민이의 등을 쓸어 내렸고. 손으로 밥을 먹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지민을 바라보자, 지민은 괜찮다며 극구 손사레를 치다가 결국 어머니의 손길에 못 이겨 이른 저녁 밥까지 얻어 먹고 갔다. 가방을 정리하는 태형을 삐딱한 자세로 쳐다보다가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고, 곧바로 태형이 말을 걸어왔다.



“ 어디 아픈 곳 없지? ”

“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봐. ”

“ 아니, 뭐… 그냥. ”



낮에 있었던 일을 모를 터인데, 빈틈을 콕 집어오는 태형의 말에 땀이 삐질 났다. 사내인 너보다도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비아냥 댄 뒤에야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왔다. 뭘 모르는 것 같다가도 가끔 보면 저렇게 눈치가 빠르다.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향했다.




’ 야, 교문 앞에서 싸움났대. ‘

‘ 진짜? 누구랑 누구? ’

‘ 몰라! 근데 여학교 애랑 후치오카 토오루란 말이 있던데. ’

’ 바보야. 그런 건 싸움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패는 거지! 토오루가 남자애도 아니라 여자애를 건드렸다고? 이상하네. ‘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일본인 남학우들의 말소리에, 지민과 태형이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 조선인 여자애던데. 그~ 피부 하얗고 머리 긴 애 있잖아? 후치오카 여동생이랑 같은 반인. ‘



지민은 태형을 슬쩍 쳐다보았다. 듣지도 못한 마냥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태형의 목울대가 파도를 탔다. 그 모습을 본 지민은 그대로 전력질주했다. 그런 지민의 뒷모습이 계단을 꺾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던 태형은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숨을 내쉬며.





연은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당장 내일 아침 학교에 가면 자신의 걸상이 마구잡이로 낙서칠이 되어 있진 않을까,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으며 학교를 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마음 하나 참지 못하고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와 걱정이 쓰나미처럼 몰아쳤다. 결국 어머니와 태형이 충분히 잠들고도 남았을 시간에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딴 마음이 있던 건 아니고… 잠깐 바람을 쐬고자 함이었다. 집에 있자니 제가 한 짓에 가족들이 피해를 보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편치 않았고, 멀리 나가자니 이 늦은 시간에 불량선인 취급 당하는 건 더욱 피하고 싶었다.


집 앞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하천을 바라보았다. 졸졸 흐르는 물 소리와 바람에 풀이 스치는 소리, 벌레가 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세상이 죽어버린 듯한 조용함이었다. 눈을 감으니 후치오카의 얼굴, 덕희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 등 떠올려서 감정적이기만 할 그림들이 머릿속에 감겼다. 하늘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 아버지, 저 잘한 거 맞죠. 그렇다고 해 주세요. ”



돌아오지도 못할 대답을 꽤나 오래 기다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보처럼 이게 뭐하는 거야. 짧은 한숨을 내쉬고 집에 들어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때, 어디선가 우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잠깐 굳은 듯 서 있자, 담벼락 옆의 좁은 골목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었는데, 잘 알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자꾸만 마음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런 식으로 행동했던 일의 최후가 낮의 그 사건이었음을 참회하던 찰나에도, 침은 꿀떡 삼켜졌고 발은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의 앞에 서 안쪽의 깊숙한 어둠을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무런 무기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괜찮을까?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발이 멈추었다. 이러다가 또 태형이나 어머니에게 짐이 되면? 담벼락을 짚고 있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조금씩 뒷걸음질치며 고개를 옆으로 젖히던 순간, 갑자기 어둠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 연의 손목을 붙들고 골목 안으로 이끌었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거친 손바닥에 저지된 탓에 막힌 소리만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숨 쉬기도 어려워 눈물이 핑 도려는 그때, 배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닿이는 느낌이 들었다. 밝은 골목의 바깥에서 어두운 골목 안을 바라볼 때와 다르게,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서서히 형태를 드러냈다.



“ 조용히 해. ”



가쁜 숨소리에 섞인 거칠고 낮은 목소리. 그제서야 입술 위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팔뚝과 이마에서 흐르는 피, 흙먼지로 지저분한 복장.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리 다쳤음에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조선인. 



“ 소리내면 배에 구멍난다. ”

“ … ”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二 | 인스티즈

“ 그리 되면 나도 일이 골치 아파지니 협조 좀 해 줘. ”


빗속에서의 그와 첫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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