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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20068l 1

  

 기다림 - 남혜승 및 박상희

본 글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나아갑니다.




경성블루스 




“ 야마구치 타카히로. ”


식탁 위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던 세 남자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의 부름에 앳된 얼굴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전부 조선인의 외양이었지만 개중 조선말을 쓰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 예, 아버지. ”

“ 네가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것은 온전히 이 아비의 배려임을 모르지 않을테지. ”

“ … ”

“ 실망케 하지 말거라. 더 이상의 배려는 없을 터이니. ”

“ 새겨 듣도록 하겠습니다. ”


타카히로, 그러니까 정국은 숨 쉴 수 없는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식사자리에서 아들에게 한마디씩 건내는 것은 야마구치 상의 버릇이었다. 체할 것 같아 보이는 정국의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나름대로의 양육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정국은 타인과 소통하기를 어려워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정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본인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시점부터, 자신의 아버지에게 괴리감을 느꼈다. 왜 나의 나라를 버리고 왜놈들의 나라를 떠받들어야 하는가. 조선인들을 죽이고 겁박하는 왜놈들의 우두머리를 칭송해야 하는가. 한때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에 귀가 솔깃한 적도 있었지만, 남몰래 독립꾼들을 도와주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칼에 죽는 광경을 목격한 뒤 정국은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 어린 나이였다. 조선을 사랑한 어머니의 피를 목격하기에는 겁이 많은 소년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정진할 수 없게 되자, 정국은 꼬여버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두 개의 자아는 정국의 심리를 마구잡이로 헤집고 망가트렸다. 정의로 가득 했던 정국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이도 저도 제대로 못하게 된 정국은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하염없는 꼭두각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구치가 입을 열었다.


“ 그나저나 나오키. ”

“ 예, 아버지. ”

“ 이번에 조선일보에서 사람을 뽑는다더구나. 네가 일이 많아 바쁜 건 알고 있다만, 워낙 실력이 출중하니 한 번 얼굴을 비춰보는 건 어떨까 하여 말이다. ”

“ 그렇다면 시간을 비워야지요. 아버지의 추천이신데. ”

“ 역시 내가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

“ 믿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야마구치 나오키. 조선 이름으로 김남준인 그는 정국의 형이자 야마구치의 핏줄과 같은 아들이다. 말 그대로 남준은 야마구치 가의 친아들은 아니었다. 정국이 타인과의 교류를 어려워하고 조선에 마음을 떼지 못하는 것이 눈에 들어올 적, 야마구치는 양자를 들였다. 눈치가 빠르고 센스가 좋던 어린 남준, 제 가문에 도움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야마구치는 그를 마음에 담았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를수록 남준은 정국보다도 친아들처럼 믿음과 사랑을 받았고, 정국은 나날이 더 기가 죽어 아비의 눈치만 보기 바빠졌다. 본의아니게 천생 고아였던 남준과 정치인 아버지의 친아들인 정국이, 마치 타고난 운명을 거스르는 듯했다.


야마구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준과 정국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였고, 그는 손짓으로 행동을 물렸다. 그리고는 하녀에게 물을 건내 받은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엔 정국과 남준만이 남아있었고, 불편함을 느낀 정국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남준은 그런 정국을 스캔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 학교는 나가는 게 어때. 그게 아니면 아버지께 미움 받기 위해 애쓰는 거야? ”

“ 신경 꺼. ”

“ 어떻게 신경을 꺼? 내 동생인데. ”


정국이 남준을 쳐다봤다. 수저를 내려놓고 그릇 옆에 놓인 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남준 역시 정국을 쳐다봤다.


“ 내 동생이 가문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면 안 되니까, 형인 내가 신경써야지. ”


정국은 차가운표정으로 남준을 응시했고, 남준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국은 넘어간 밥알들이 제 안에서 갯수만큼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태형이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새벽 내내 폭우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자마자 하늘은 보란 듯이 개었다. 평소 같으면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도 남았을 연이 고뿔에 걸린 것 같다며 방에서 꼼짝 않고 나오질 않았다. 들어가서 확인하려 해도 걸쇠를 걸어 잠그고는 신신당부를 하니,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어머니에게 연을 맡기고 홀로 대문을 나선 태형은 오늘 그곳에 가야겠다, 생각했다.


기왓장이 올라선 지붕이 가득한 저의 동네와는 다르게 서양식 건물이 줄지어있는 거리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신식 건물을 가로지르는 태형은 선망이라는 감정을 알 것도 같았다. 교본을 쥔 손에 땀이 찼다. 그토록 염원하던 미래가 저 가까이에 있을 듯했다. 

타케우치 선생이 건내준 쪽지엔 간략한 주소가 적혀 있었다. 주소를 보고 따라가자, 클래식한 양장점 맞은편에 일본식 목조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말이 주택이지, 대저택만한 크기에 태형은 침을 꼴깍 삼켰다. 때마침 대문을 열고 관리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쓰레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 누구신가요? ”

“ 실례합니다. 저는 타케우치 선생님의 제자인데, 선생님을 대신해 교본을 전하러 왔습니다. ”


태형을 위에서부터 쭉 훑던 여자는 고개를 까딱 하며 봉투를 내려놓고 안으로 안내했다. 

자갈이 깔린 일본식 정원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오자, 넓은 내부와 신기한 인테리어들로 이루어진 공간이 태형을 맞이했다. 벽에 걸린 화려한 일본도와 함께. 현관 앞에 서서 고개를 돌리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고, 계단 끝에 서 있는 발이 시선에 들어왔다. 시선을 올리니 앳된 얼굴의 정국이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四 | 인스티즈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四 | 인스티즈


태형은 정국을 보고 기분이 나빠졌다. 친일파 새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태어나길 일본인인 놈들은 미우고 말았지만, 조선인이라는 놈이 일본 놈들 뒤에 붙어 살아남기 바쁘다니. 그런 생각이 드니 저 계단 끝에 서 있는 놈도 하등 쓰레기같은 존재겠거니 하는 마음이 불쑥 솟았다. 허나 태형은 감정적인 마음이 들수록 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면이 있었다. 태형이 싱긋 웃자 정국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그런 태형을 내려다봤다. 물을 가지러 갔던 여자가 돌아오더니 계단 위 정국을 발견하고 말했다.


“ 아, 도련님! 타케우치 선생께서 보낸 제자라 합니다. 교본을 가지고 온 듯한데, 올려 보낼까요? ”


정국은 태형의 등장이 심히 불편했다. 타케우치 선생이 아니라 기껏 해 봐야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라니. 그것도 조선인. 제 아비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타케우치는 출셋길이 막히고도 마땅할 일이었다. 한숨을 깊게 내쉰 정국이 손을 휘휘 저었다. 대충 교본만 두고 가라는 이야기였다. 그때, 태형이 말했다.


“ 타케우치 선생님께서 야마구치 상의 둘째 아들인 타카히로 씨를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

“ … ”

“ 이래 보여도 타케우치 선생님께 인정 받은 성적입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맡겨 주십시오. ”


태형의 말에 정국은 낮에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더이상의 배려는 없다는 차가운 어투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정국이 태형을 올려 보내라 일렀다.





태형과의 간단한 과외가 끝난 뒤, 이른 저녁 정국은 홀로 북촌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끼 낀 담벼락을 지나 구석으로 들어가니 작은 책방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문학은 잔뜩 꼬여버린 정국의 심리를 안정화시켜 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문에 걸린 종이 딸랑이자 노파 한 명이 커튼을 걷고 나왔다.


“ 누군가 했더니, 국이구나. ”

“ 요새 좀 뜸했죠. 죄송해요. ”

“ 아니다. 네 마음이 안정되어 오지 않는 게로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 여겼구나. ”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깊은 노파는 정국의 속내를 아는 듯 따스히 웃었다. 정국이 이 노파의 책방을 찾기 시작한 지도 5 년. 정국이 어느 가문의 어떤 위치인지 정확히 알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망가진 내면만큼은 이해해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정국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 책장들 사이로 들어갔다. 손가락을 올려 읽을 서적을 고르던 정국이 문득 손가락을 멈추고 조금 전, 태형의 말을 곱씹었다.


“ 역시 타케우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해가 빠르고 센스가 좋으시군요. 야마구치 상. ”

“ 저에겐 얻어낼 것이 없을 겁니다. ”

“ … ”

“ 아비가 기대 없는 아들이니,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


태형은 펜을 내려놓고 정국을 응시했다.


“ 야마구치 상, 혹시 그런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

“ … ”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야마구치, 아니 타카히로 씨는 아버지께 그런 자식일 겁니다. ”


코웃음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정국은 그 말이 진짜라면 제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를 잠깐이나마 바랐다. 어떤 마음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형의 눈빛에서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정국은 그 무게감이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에게 쳐놨던 경계가 한층 허물어진 것 또한. 손바닥만 한 시집 한 부를 뽑아든 정국이 코트를 여매며 노파에게 다가갔다.


“ 빌려가겠습니다. 값은 얼마를 치루면 될까요. ”

“ 값은 됐다. 늘 그랬듯, 다시 돌아와 주기만 해 주렴. ”

끝까지 값을 지불하겠다던 정국은 결국 노파의 손에 코트 주머니 깊숙히 시집을 찔러 받고 책방 밖으로 쫓겨났다. 이 은혜를 또 어떻게 갚아야 하나, 라는 생각에 목덜미가 근질해졌다. 



어느새 하늘은 주황빛 노을이 짙게 떠올라있었다. 푸근해진 날씨때문인지 답답한 기분을 느낀 정국이 코트를 벗어 팔에 걸쳤다. 풀과 담으로 가득한 길을 지나자 하천이 눈에 들어왔다. 졸졸 흐르는 물에도 따스한 노을이 올라타 있었다. 일렁거리는 노을빛 물결이 인상적이라 눈에 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깜짝 놀라 뒤돌아본 정국은 침을 꼴깍 삼켰다. 

방금 막 다른 쪽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온 연이었다. 이미 빗물에 씻겨져 나가 피가 많이 눈에 띄진 않았으나, 아무래도 붉은 자국이 많이 남아있어 몰래 빨래를 하고 돌아가는 찰나였다. 의복을 입은 연과는 다르게 양장을 걸친 정국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임에도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정국이 불편해하는 것들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다른 조선인과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이란 것은. 정국이 아무런 말 없이 연을 내려다보고 있자, 연이 책에 묻은 흙을 탁탁 털며 건냈다.


“ 멀리서 보았는데, 그 코트에서 빠져나온 물건인 듯해서요. ”


그녀의 의복과 손에 쥐어진 책을 내려다 보던 정국은 시선을 천천히 올려 얼굴을 쳐다보았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의 헉, 했던 느낌이 다시 또 일었다. 

가지런하지만 세련되지만은 않은 눈썹과 고동색의 눈. 노을빛을 받아 조금 붉으스름해진 피부와 해가 미끄러지는 듯한 콧대, 생기가 도는 입술이 느리게 자신의 시야 안에 영화의 한 컷 프레임 찍히듯 이어졌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 짧은 순간, 책에서 봤던 구절이 떠올랐다.


「 一见钟情(일견종정) : 첫눈에 반하다 」


저 맑은 고동색 눈동자 안에 나는 어떻게 비추어지고 있을까. 그런 생각까지 마치자, 정국은 스위치에 불이 켜지듯 정신이 돌아와 짧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연이 그런 정국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 아, 감사합니다… 제 물건이 맞네요. ”


정국이 책을 건내 받았다. 연은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바닥에 내려놓았던 빨랫짐을 챙겨 들었다. 양장을 입은 정국이 편한 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묘했다. 어젯밤 총을 든 그 남자보다, 무기도 없는 이 자가 더 불편하다는 점이. 정국은 자리를 뜨려는 연의 모습에 잠깐 당황하다 손목을 낚아챘다. 낚아챘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바로 놔버렸지만. 어쨌든 정국은 이대로 헤어져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아, 저기… ”


정국의 눈에 연의 짐이 눈에 들어왔다.


“ 그, 집이 멀지 않으시다면 짐을 들어드릴까 해서. 책, 찾아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

“ 아… 괜찮아요. 이 짐은 제가 드는 게 편해서. ”


당연했다. 피가 닦였을 지언정 다른 이의 손에 맡기는 것은 아직 마음이 편하지 않았으니. 연은 살풋 웃어 보이며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정국은 그런 연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이 말려 들어갔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던 오른손에 아직 그 두께와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정국의 심장이 무언가를 예고하듯 쿵쿵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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