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나아갑니다.
경성블루스 六
연을 내려다보는 윤기의 동공이 흔들렸다. 윤기는 그녀의 표정에서 굳건한 신념을 느꼈다. 평온하고 잔잔한 북촌의 풍경과 대비되는 상황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리던 그 날, 윤기는 연에게 진 마음의 빚을 어떤 방식으로든 갚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고운 옷을 사 달라면 그럴 터였고, 값 비싼 음식을 사 달라면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얘기가 달랐다. 윤기가 아무 말 않자 연이 먼저 입술을 뗐다.
“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
” 과연 그럴까. ”
망설임 없이 나온 말에 윤기가 욱했다. 손목을 잡아채자,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네 가족이 죽을 수도 있는데. “
” … “
” 어쩌면 가족뿐만이 아니라 네 주변 모두가 죽을 수도 있을 텐데. 그 각오까지도 되어 있다는 건가. ”
“ … ”
“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네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각오도? ”
윤기는 절대, 그녀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이 얼마나 고독하고 참혹한 고통의 길인지, 매일 아침 눈을 뜸으로써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받는 불안의 나날인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는 동지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의열단의 몸집이 커지는 것도 맞지만, 그 안에 그녀가 있는 것은 원치 않았다. 호리한 체구의 그녀를 투입하는 것 자체에도 불신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이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부모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 집에서 독립운동가가 나오면, 그 집의 대는 다 끊긴다는 말이 있지. 이 일에 발을 들인 순간 너 혼자만 걸린 일이 아니라는 얘기라고. ”
말하는 와중에, 윤기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더이상 잃을 것도 없는 나같은 놈이라면 모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묵묵히 가만히 있는 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말이 없는 그녀를 기다리다 손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런데 다시금 공중에서 놓친 연의 손이 윤기의 손을 빠르게 붙잡았다. 손목이 아니라 손을 잡힌 윤기는 이내 멈칫 하고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 할 수 있습니다. ”
“ 뭐? ”
“ 제가 당신들과 뜻을 함께 하고자 하는 건 비단 나라때문만은 아닙니다.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불가피한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 또한 하겠습니다. ”
“ 그게 무슨… ”
“ 믿어주시지요. ”
아니,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윤기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틀었다. 여전히 그녀에게 붙들린 손이 뜨끈했다. 내칠 수 있는 약한 힘이지만 아까의 단호한 말투와 다르게 손은 그러질 못했다. 마침 윤기의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연은 어깨 너머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 그려, 이렇게 간절히 부탁허는디 얘기 정도는 들어볼 수 있잖여. ”
윤기는 말도 안 된다며 뒤돌아 호석을 노려보았고, 호석은 웃으며 연에게 악수를 권했다.
“ 소개가 늦었구만. 나는 여기 민동지의 무지~막지허게 친한 벗인 정호석인디. 그라니까 우리랑 같이 가고 싶다고? ”
“ 예. ”
“ 그렇다믄 고 이유를 들어봐야 쓰겠네. 같이 가겄소? ”
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놓인 잔 안에서 찻잎이 둥글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아지트는 생각보다도 더 허름했고, 더 깊숙히 숨어있었다. 웃으며 차를 건낸 호석은 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윤기는 한쪽에 서서 그런 연을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건지 암만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근디,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고? ”
“ 예, 김 종 자 철 자이십니다. ”
호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윤기가 입을 열었다.
“ 목숨을 걸어야만 소중한 걸 지킬 수 있는 건 아니야.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지켜낼 수 있는 거잖아. ”
“ 언제나 위험 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
“ … ”
“ 작금의 조선이 바람 앞의 등불이라는 것은 길거리 지나가는 꼬마들도 압니다. 하늘 아래 모두가 같은 인간일 뿐이지만 조선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거지보다 천하고, 개보다 다루기 쉬운 것이 조선인이랍니다. 학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집 앞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
민윤기, 그와 눈이 마주쳤다.
“ 이미 이 위험 속에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더이상 잃고 싶지도 않고, 잃어 괜찮을 자신도 없습니다. 내 나라 내 땅에서 이런 죄스러운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버겁습니다. 제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조선을 구하겠다는 것이 제 뜻입니다. ”
“ 목숨을 걸어서라도? ”
“ 걸어서라도. ”
윤기는 그녀의 두 눈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 날, 자신에게 충고하던 눈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오늘 시계를 찾으러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시계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아니, 더 나아가 그녀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일따위 벌어지지도 않았을텐데. 윤기는 갈수록 이 상황이 더 불편해지고 있었다. 호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마침 자리가 하나 비긴 했는디. ”
“ … 이봐, 정호석. ”
“ 우덜이 이번에 아~주 큰 거사가 있그든. 근디 그것이 여인이면 더 좋고, 고 여인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여인이면 더 좋은지라. ”
“ 말도 안 되는 소리. ”
“ 와 말이 안 되는겨. 아, 민동지는 못 들었는갑네. 그 날 혼마찌에 모이는 친일파 가문 몇몇이 여인에 미쳤다드라고 말이지. 뒷얘기로서는 여자 장사도 한다제? ”
정호석, 서글서글한 눈을 한 그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빛에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농담따먹기 하는 게 아니다. 거짓말도 아니다. 사람 좋은 미소가 깔려있지만 그 안의 진심이 날카로웠다.
“ 나가 볼 땐 말이여, 그짝이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어서. ”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건 어머니와 태형, 지민이를 지키기 위해서니까. 더이상 내 사람들을 위험 아래에 두고 싶지 않으니까. 또, 더이상 꿈 속에서조차 아버지의 눈물을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하니까.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언제까지고 태형의 보호 아래 있을 수 없고, 지민의 등 뒤에 숨어 있을 수 없다. 내 희생으로 그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윤기는 헛웃음을 쳤고, 호석이 나무 서랍장 앞으로 걸어가 종이 몇 장을 꺼내와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는 의자를 끌고 와 앞에 앉고서 말했다.
“ 변심, 배신은 없어야. ”
“ 그럴 일 없어요. ”
“ 그래야 할 거여. 고 맹세가 거짓이 돼불믄 그짝이 지키고 싶다던 소중한 것들 다 내 손으로 없애버릴 거니께. ”
그 말을 뱉는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첫만남부터 지금까지 장난기 넘치고 다정한 목소리였던 그는,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온도보다 그 말의 실체가 바늘처럼 따갑게 긴장감을 주었지만. 호석이 신문을 뒤집자, 저번 조선일보에 실린 여러 가문들의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흐릿하게 새겨진 얼굴들도 몇 있었으나 알아볼 리 만무했다.
“ 어떤가. 아는 사람은 없을 기고… 대가리 수가 많제? 다른 건 필요없고, 그짝은 한 놈 눈에만 좀 트이믄 돼. ”
신문을 확 넘기던 호석이 손을 멈췄다. 남자 셋이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었다. 가운데 의자에 앉은 나이든 남성과, 양옆에 서 있는 젊은 남성 둘이었다. 부자지간인가? 눈을 찌푸리며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이번 거사에서 처리할 놈들 중 하나여. 조선인들 등골 빨아먹는 데에 도가 튼 친일파인디, 요놈 하나만 죽여도 위협이 될 기거든. ”
윤기는 호석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저는 그렇다 쳐도, 호석은 무엇을 믿고 저리 쉽게 거사의 내용을 읊어주는 것인지. 윤기 역시도 연을 백 프로 믿지는 않았다. 애당초 그리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니었고. 근데 호석은 진심으로 그녀를 받아들인 양,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남자의 말을 새겨 들으며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 야마구치 가인디, 아들이 둘이여. 장남이 야마구치 나오키, 차남은 야마구치 타카히로. 핏줄은 차남인디, 수상케도 장남이랑만 같이 다니는 것 같드라고. 죽일 놈은 아들 말고 그 작자긴 한디, 알고는 계시라고. 꼬실 놈 식솔 정보는 알고 있어야제. ”
순간 눈이 번뜩 뜨이고, 그림 속의 얼굴이 선명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 아, 감사합니다… 제 물건이 맞네요. ‘
’ 그, 집이 멀지 않으시다면 짐을 들어드릴까 해서. 책, 찾아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설령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두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 봐도 틀림없었다. 자신이 겨냥해야 할 과녁이 그때 보았던 그 남자가 맞았다. 식어버린 차 위에서 더이상 찻잎은 돌지 않았다.
“ 아깝게 되었군요. 야마구치 상이 저희 조선 일보에서 같이 일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요. ”
“ 저 또한 매우 유감입니다. 현재 학문을 비롯해 여러 일이 있어서 도움을 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아버지의 추천으로 왔지만서도 실은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뻤는데. ”
남준의 앞에 앉은 남자는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봐도 육각형 능력자의 자질을 가진 남준은 이미 여러 곳에서 평가가 된 상태였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를 때마다 그가 서 있는 장소가 나날이 발전됐다.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사소한 모임부터, 거대한 연설 회장까지. 이미 일본 고위 직급과 총독부 인사들에게 눈도장이 박힌 남준은 야마구치 가장의 자랑이었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남준이 고개를 숙였다.
“ 오늘 감사했습니다.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
“ 예, 아버지께 꼭 안부 전해주시지요. ”
“ 그럼요. ”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온 남준은 건물 복도를 걸었다. 지나가는 직원들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벽에 걸린 파일에 민간 신문이 꽂혀 있었다. 이번에 새로 발행될 민간지인지, 위에 대문짝만하게 써진 글귀가 눈에 띄었다.
「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 위대하신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남준은 그 문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위대하다는 말의 정의가 무엇인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생각하던 남준은 정리가 된 듯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 그 이름이 확실한가. ”
“ 이름은 뭐 들을 것도 없었지야. 핏줄 아니라드니, 요상하게 사진 속 아비랑 얼굴이 판박이더구만. ”
호석의 말을 전해 들은 석진은 다소 씁쓸한 표정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석진의 앞에 선 호석은 석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장의 눈이 이렇게 슬플 줄도 알았든가. 임무에서 목숨을 바치고 죽은 동지들의 소식을 들을 때에도 비슷한 눈이긴 했지만, 또 다른 눈빛이었다.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던 것 같은 씁쓸함인 것도 같았다. 호석은 그런 석진에게서 눈을 뗐다.
“ 근디, 괜찮은 거 맞나 모르겄네. 지가 원하니께 데리고야 왔는디… 괜한 짓 한 거면 우짠디야.”
“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그 사내 역시도 예상한 일이었어. 그래도 최대한 늦게 알기를 바랐건만, 종철의 바램보다 일이 일렀을 뿐이다. ”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막을 수 없을 걸세. 더군다나 그의 딸이니. 오래 전, 자신의 가족을 끔찍이 아끼던 그가 동지들에게도 감췄던 딸의 존재를 내게만 알려 주었네. 자신이 죽으면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 부탁은 간간이 들러 그들의 안위를 확인해 달라거나, 배 곪지 않고 살 수 있게 식을 챙겨 달라는 부탁이 아니었다. ”
“ … ”
“ 자신의 길을 똑같이 걸으려 할 자식이 기어코 찾아오면, 죽지 않고 조선의 길을 걸을 수 있게끔 지켜 달라는 의미이지. ”
“ … ”
“ 이제야 오래된 벗의 부탁을 들어줄 때가 되었을 뿐이네. ”
거사까지 이틀. 아슬아슬하게 어둡던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울렸다.
비운의 날을 고대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