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길]
대기업에 다니던 삼촌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대기업을 다니던 삼촌. 항상 맵시 좋은 옷을 입었고 자동차는 우리 아빠 것 보다 컸다. 삼촌을 아주 가끔 보았지만 삼촌은 나에게 매번 이런 말을 했다.
“정해진 길을 잘 걸으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나는 그런 길에 들어가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었다. 초등학교 때는 IMF로 가세가 기울었지만 엄마를 졸라서 수학과 영어 학원을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는 과외를 원했고 고등학교 때는 매일 잠이 모자라 가위에 눌리면서도 학원을 다녔다. 결과는 내가 원하던 데로 서울 안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갔다. 비록 서울대는 아니었지만.
인서울 대학으로는 모자랐다. 학점은 평균 이상이었으나 최고는 아니었고, 따놓은 자격증이나 인턴 경험도 남들에 비해 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행에 올랐다. 내가 모은 돈, 엄마에게 졸라서 지원받은 돈, 삼촌에게 빌린 돈까지 합쳐서 런던에 있는 유명한 대학원의 석사과정을 마쳤다. 비록 옥스퍼드나 캠브릿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초등학생의 인생 목표가 대기업 취업일 정도의 영악한 아이는 아니었다. 다만 나는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었고, 그 후에는 인서울 대학교에, 그다음은 해외 대학원에, 그리고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래왔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내가 속한 공동체 사이에서, 사회에서 우위를 점령하고 더 높은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선택권이 있고 남에게 나의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그런 권력을 의미하기도 했다. 90년대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권력이란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가 닦아놓은 길에 들어가 최대한 빠르게 그 권력에 이르기를 바랐다.
[모두가 원하는 길]
대기업에 취업 것은 나만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 부모님, 가족, 친척들, 주변 친구들,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이름 모를 내 나이또래 청년들 모두가 대기업을 원하고 있었다.
실제로 대기업 취업을 위해 대학원이 끝나기도 전에 인적성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해외에서 어떻게 인적성 문제집은 얻었는지 석사 논문을 쓰면서 공부를 병행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친구들과 저녁이라고 먹는 날이면 삼성이 좋니, 현대차가 좋니 하는 말들로 서너 시간을 훌쩍 보냈다. 그중에 모든 이의 부러움을 샀던 친구가 있었으니 그 친구는 나이도 어렸고 공대에서 공부 잘하기로 유명했던 친구다.
“형. 저 삼성 합격했어요.”
“언제? 어떻게 석사 끝나기도 전에 취업한 거야?”
“삼성에서 글로벌 인재 뽑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 갔다 왔어요. 얼마 전에 뉴욕 갔었잖아요. 사실 면접 보러 간 거였어요.”
“대단하다 진짜. 진짜 축하해. 진짜….”
진짜…?
부러웠다. 그러면서 드는 묘한 배신감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느꼈을 터. 어떻게 우리가 친구인데 그렇게 좋은 정보를 혼자만 알고 있었는지. 그 친구도 졸업 후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그 후 그 친구는 블루블러드가 되었고 석사논문 제출도 전에 연수원에 들어가 버렸다. 모두가 그를 우러러봤고 부러워했다. 그는 높은 위치를 차지했고 권력을 손에 쥐었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만 봐도 그렇다. 종종 올라오는 글에 대기업 취업이야기가 있어서 읽어보면, 졸업예정자가 삼성 현차 같은 대기업에 취업하기 칼취업은 힘들지 않냐 혹은 대기업에 2년째 취준 중이어서 힘들다는 고민들이 올라온다. 반대로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어디 다니는데 복지는 이렇고 월급은 이 정도 받는다, 나는 인센티브가 많아서 매년 해외여행을 n번을 간다는 소리로 우월감을 과시했다. 익명의 사회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대기업을 다니면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게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오늘도 인적성을 공부하고 면접을 준비한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런 사회적 높은 자리를 선점하고 싶은 욕구는 그들과 똑같았기에 어린 나이에 대기업에 다니는 익명의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동기부여의 땔감으로 삼았다. 나도 언제인가 저렇게 되리.
가장 중요하게 부모님이 내가 대기업 가는 걸 누구보다 원했다. 그들의 사랑의 방식은 내가 가장 잘되길 바라는 것이었으므로 나도 이해할 수 있는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을 충족시켜주고 싶었다. 하반기 취업 공고 기간이 다가오자 그들의 바람은 언어화되어 나에게 전달되었다. 어머니는 밥을 지으시면서도 내게 삼성전자나 삼성물산 둘 중 하나는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아버지는 대기업 나온 삼촌에게 쪽을 많이 당했다며 제발 우리 아들은 현대차그룹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걱정하지 말라며 아들 스펙에 머리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안도시켰다. 사실 속으로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흔들렸지만. 나는 그럴수록 자기소개서를 고치고 인적성 문제집을 더 풀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안 될 거라는 불안감이 잠재워졌고, 그게 쌓이니 이제 나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다고 믿었다.
[대기업. 취업. 실패.]
서류전형은 대부분 통과였다. 물론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직무나 분야의 회사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중에서 한 두 개는 인적성에서 상위권을 차지하지 못해 떨어졌고, 한 두 개는 PT 면접이나 기술 시험을 본 후에 전문성이 부족해 떨어졌다. 다행히도 마지막 몇 개 남지 않은 기업에서는 최종 임원 면접까지 갔다.
그래서 최종 합격한 곳은 바로.
없다.
나는 모든 대기업이라고 불리는 곳에 지원서를 넣고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았지만 결국 단 한 군데도 합격하지 못했다. 나는 인서울 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에서 석사를 한 유학생 엘리트라고 믿었는데. 그러면 아무리 치열한 경쟁이었어도 뚫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오만이었다.
[패배자]
떨어지고 난 뒤 부랴부랴 중견기업들도 지원을 했다. 이미 시기가 많이 지나 그것마저도 힘들었지만 한 곳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통과해 취업에 성공하기는 했다.
그리고 합격 문자를 받고 느낀 건 패배감이었다. 내 실력, 스펙, 경험에서는 이 정도 수준에서 만족해야 하는데 과연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이때까지 사회가 정해놓은 길에서 좋은 위치를 선점해 잘 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대기업 취업은 실패해 버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건 한남동에 산다는 유학생시절 친구의 행보였다. 그 친구는 패션과 라고 했었나, 관심이 그냥 많다고 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명품으로 온몸을 두르고 다니던 친구였다. 인스타그램을 보니 그 친구는 이른 나이에 사업자를 냈다고 했다. 패션 관련 마케팅 사업을 하는 것 같았는데 차도 새로 뽑고 여전히 명품을 쇼핑하며 잘 사는 모습을 피드와 스토리를 샅샅이 뒤지며 확인했다.
사실 권력이라는 건 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돈의 풍족함으로 주어지는 완전한 자유. 그냥 부모님이 이루고 그걸 물려받을 수 있어서 어디서나 선택지가 있는 그런 자유. 그 친구의 자유로운 모습에 나는 완전히 찍어눌림 당했다. 나는 돈 걱정이 없을 정도로 물려받을 수 있는 풍족한 재산의 부모님을 갖지 못했고 유일한 길은 삼촌처럼 대기업에 취직하는 일이었는데 그 마저도 실패해 버렸다.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살아온 것과는 상관없이 한순간에 패배자가 되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인스타그램 속 친구처럼 살 수 없는 패배자. 나는 영원히 패배자로 남을 것만 같았다. 내가 죽을 때까지 아주 얇고 길게. 아주 오래오래.
대기업의 취업하지 못한 실패의 꼬라지는 이런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노력해 왔던 것들을 부정당하는 모습.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나를 보며 패배감을 느끼는 모습.
[대기업에 취업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합격한 중견기업은 3개월만 다녔다. 눈치챘겠지만 수습기간 후 정직원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입 교육과 업무에 소홀했던 이유는 있었다. 첫 출근과 동시에 나는 사업자를 등록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삼촌이 말한 정해진 길로 가면 대기업에 취업해 성공한다고 믿었지만 대기업 취업 실패 후 그런 생각의 꼴은 크게 변형되었다. 정해진 길을 이탈해보고 싶다는 생각의 전환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버릴 수 있는 건 무엇인지 고민했다. 인간 한도윤의 삶이 어디에 이를지 상상했고 결과적으로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
정해진 길이 아닌,
남들이 모두 원하는 길이 아닌,
내가 원하는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