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진 인연(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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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황제폐하 납시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가슴이 뛰었다. 어서 빨리 보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먼저 그 분께 가고 싶은 마음에 언제나 달려 나가곤 했다. 달려 나가면 언제나 “그 분”이 눈 앞에 보였다. 바라보며 웃어주는 그 미소가 그렇게 밝았다.
“내가 가겠다고 몇 번을 말해도 언제나 달려나오니.” 그는 매번 웃어주었다.
매일 저녁, 그와 김선은 함께 걷곤 했다.
“오늘 하루는 어떠하였소? 궁 안에 있는 것이 힘들진 않소?”
“저는 괜찮습니다.” 김선은 수줍게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그도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선 어떠하셨습니까? 힘들진 않으셨습니까?”
“난 괜찮소. 옆에서 도와주는 이가 있지 않소?”
김선의 머릿속에 박중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김선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오라버니께서 당부에 당부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알겠느냐. 그 자는 폐하를 위해 폐하의 곁에 있는 자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폐하의 곁에 있는 것이다. 절대로... 그 자의 뜻대로 되선 안 된다.”
김선은 고민했다. 폐하께 말씀을 올려도 괜찮을까. 하지만 지금은...
“헌데, 조금 지치기도 하는 것 같소.”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김선은 놀라며 걱정했다.
“허면 돌아가 쉬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건강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자네들은 잠시 물러나 있게.”
그가 주변의 나인들을 모두 물린 다음 김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소?”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저... 손을 잡고 걸어도 되겠소?”
“예?”
김선의 얼굴이 붉어졌다. 손을 잡는다니, 부끄러워 김선은 어쩔 줄 몰랐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저, 그, 그대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괜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김선이 황급히 대답했다.
손을 잡아야 하나, 어떡하면 좋지? 이런 경우가 처음인데……. 김선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한 말에 자신도 부끄럽고, 김선의 거절하는 듯한 반응에 더 당황하고 실망한 것 같았다. 그의 반응을 살핀 김선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살짝 망설이던 김선은 눈을 질끈 감고 약간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잠깐동안 고개를 숙인 채로 있다가,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것이 정답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손을 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송구합니다, 이러면 안 될 것인데...” 김선이 말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있다가, 김선이 손을 놓자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았다. 그는 기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김선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었다. 김선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김선이 그와 손을 잡은 기억이었다.
“거 참, 누구는 바빠서 애인도 없는데 저것 좀 보십시오.”
갑작스러운 협의 말에 김선은 깜짝 놀라 협을 쳐다보았다. 예전 생각에 잠겨 걷고 있자니 어느새 그들은 백성들이 사는 곳까지 나와 있었다. 협은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가리켰다. 자신의 이야기인줄 알고 놀란 김선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김선은 따뜻하게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보기 좋지 않은가? 어린 아이들인데.”
“그렇다 해도... 아주 천생연분이잖습니까.” 협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저 아이들이 인연이란 말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협은 이내 표정을 풀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인연이라니. 참으로 부럽구나.”
“예전 생각이 나십니까?”
김선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닐세.”
“글쎄요, 인연이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저 늘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돌고 돌아도 결국 만나게 되겠지요, 인연이라면.”
협은 이렇게 말하며 어느 집 문 안으로 들어갔다.
“도착했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김선은 마지막에 다다름을 깨달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집일 뿐인데, 그 안에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김선은 상상할 수 없었다. 지옥일지, 혹은 또 다른 무엇일지.
BGM 소년,소녀를 만나다 - Reyn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