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짧음주의 (눈치)
기생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그대로 멍해졌다. 물론 정국이 심상치 않는 존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을 알아챌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당연히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정국이 피를 먹어야 사는 흡혈귀라는데, 어찌 태연하게 정국을 대하겠나. 미약하게 떨리는 아이의 손을 본 여인이 싱긋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걸 왜 말해준 건데요?"
"그냥, 알고 있으면 너한테 도움되잖아."
"뭐가 도움이 돼요."
"그 자가 언제 널 죽일지 몰라."
"…절 건드린 적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아껴뒀다가 시간이 지나면 잡아먹을 수도 있지."
도움은 개뿔. 헛웃음이 나오는 아이였다. 머리 위에 얹힌 가증스러운 손을 내치고는 제 집으로 뛰어갔다. 그간 봐온 정국에게 저를 노리는 기미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미호에게서 지켜주면 지켜주었지, 절대 나를 해할리 없어. 이 상황에서도 정국을 철썩같이 믿는 아이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정국의 처소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호석의 말이 맞았다. 산신령이 아니라는 말. 그렇지만 인정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내가 아는 분은 결코 나쁜 존재가 아니야. 허나 모순적이게도 아이는 정국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 거라는 제 믿음과는 달리 산에 가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는 꼭 갔었다면 이젠 두어 번씩만 산을 올랐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분위기가 요상하군."
"그럼 네가 사는 곳으로 가는 게 어떤가."
"아니네. 말을 줄이겠네."
그나마 윤기의 짓궂은 농담 덕분에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풀렸다. 정국과 아이, 단 둘이 있을 때면 아무 말 않고 있기 일쑤였다. 역시 정국도 그것을 느꼈다. 저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재잘재잘 말이 많던 예전과는 달리 간간히 안부를 묻는 것을 빼고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수가 없었다. 오두막 근처에 알록달록하게 핀 꽃을 조심스레 따서 아이에게 갖다주어도 아이는 잠시 웃기만 했다. 그뿐이었다. 차차 정국도 아이의 눈치를 보며 옆에 망부석처럼 앉아있기만 했다. 왜 그러느냐 묻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이었으나 쉽사리 묻지도 못했다. 제 물음으로 인하여 아이가 영영 떠나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몇날며칠을 아이만 기다렸으나 오라는 아이는 오지 않고 윤기만이 뒷짐을 지며 정국의 오두막으로 왔다. 제 곁에 있어주는 건 고마웠다만 기분이 더럽게도 윤기에게는 아이의 향취가 농후하게 배었더라.
"아이를 만났소?"
"어찌 하다보니 만나게 되었네. 제 부모를 돕느라 오지 못하는 것 같으니 염려는 말게."
다른 때보다 예민한 정국에도 윤기는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였다. 제게 아이의 일상을 알려주는 윤기에게 은혜를 베풀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 자에게 아이의 소식을 들어야하나, 울분이 차오르기도 했다. 허나 지금 당장 정국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아이에게 가보아도 저를 피할 것 같으니. 하염없이 아이가 오기를 고대하는 정국이다.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붙잡고 푹푹 한숨을 쉬어댔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니 제 먹이를 찾으러 기생집으로 가야했다. 그런 정국을 따라 윤기도 함께했다.
"그 아이를 왜 그리 기다리는 것이오."
"뭐, 딱히."
"단지 아이가 크면, 아이의 피를 먹겠다는 연유 때문이오?"
"…내 그럼 어떠한 연유가 있겠소."
"내가 보기에는 있다만."
구미호와 흡혈귀 사이에 알 수 없는 눈빛이 오고 갔다. 정국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자 윤기는 살포시 웃었다. 이내 정국이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를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됐다. 오직 제 먹잇감으로만 지금까지 봐왔다고 믿었는데. 또한 제 마음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그것을 표현한다면 다시 예전의 일이 되풀이가 될까 두려웠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정국이 머릿속을 비우려고 애썼다. 젠장, 저 구미호놈 때문에 심란하기만 하고. 윤기 모르게 속으로 구미호 욕을 잔뜩 풀어놨다. 금세 그 마음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
아이가 숨을 가쁘게 쉬며 산으로 급하게 올라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가 반가워 곧장 오두막 안에서 빠져나온 정국이 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맑던 얼굴에 눈물이 주구장창 흐르고 있었다. 붉어진 뺨에는 곳곳마다 눈물 자국들이 남았다. 꺽꺽거리며 울던 아이가 숨이 찼는지 기침을 했다. 아이의 어깨를 잡고 정국이 심각하게 물었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얼른 말해보거라."
"소원, 소원을 들어주세요. 산신령님이시잖아요, 끅! 부모님이, 흐으…"
"……."
부모가 몸져 누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에게 웃어주고 밭일을 가르쳐주던 부모님이 잠자리에서 쉽게 깨어나지를 못했다. 열다섯이나 먹었으니 제 부모가 병에 들었다는 건 당연히 알았다. 그러나 평범한 신분에, 형제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아이였다. 땀을 흘리는 제 부모의 곁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다가 문밖에서 들려오는 태형의 목소리에 얼른 뛰쳐나가 그의 앞에서 절규했다. 태형아, 우리 부모님이 이상해. 눈을 안 떠. 땀만 흘리셔. 태형도 놀라 급하게 제 부모를 모셔왔다. 태형의 부모 덕에 한시름 걱정을 놓았지만, 그 작은 집에 저 혼자 깨어있다는 게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밖에 나가 신을 신었다. 정국이 산신령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았으나 일단은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어릴 적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졌듯 제발 이번에도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에게 가는 길이라서 그런지, 무거운 어깨에도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그의 모습이 언뜻 보이자 아이의 눈물샘은 다시 터져버렸다.
"우리 부모님 좀, 끅, 안 아프게 해주세요."
정국의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아이의 진심이 가득한 소원을 못난 저가 들어주지 못한다. 아이의 떨리는 손을 제 차가운 손으로 꼬옥 잡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루어줄 터이니, 그만, 그만 울거라."
"……."
"제발 울지 말거라. 네가 울면 나는, 가슴이 미어진다."
오늘따라 유난히 작은 아이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정국이 서툰 손으로 토닥토닥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에 더 심하게 울음을 토해내는 아이였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들어주겠다고 하는 정국에게 고마워 자신의 팔로 정국을 안았다. 아이의 그리웠던 향취가 제 코끝에 머물렀으나 아이의 피에 대한 욕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시각까지, 달보다 수많은 별이 빛나는 시각까지 정국과 아이는 서로를 안고 있었다. 오늘만은 윤기가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느새 울다가 지쳐 잠든 아이를 보고는 웃음을 짓는 정국이었다. 제 등에 업혀 예전에 아이가 알려주었던 아이의 집으로 향했다.
눈을 뜬 아이가 제 눈을 만져보았다. 역시나 밤송이만하게 부은 제 눈두덩을 어루만지다가 벌떡 일어나 제 주변을 살폈다. 부모의 옆이었다. 산신령님이 데려다주셨구나. 어제보다 한결 나아진 부모의 얼굴을 보고 세안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다름 아닌 약초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이것도 산신령님의 선물이구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 대신 준 선물. 간만에 아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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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의 아이분들 = 내꼬 꺄륵
찬란 / 정꾸꾸까까 / 만듀 / moonlight / 밤을 걷는 선비 / 뮤즈 / 뉸기찌 / 룰루랄라 / 데이지 / 침구 / 빵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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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주일만에 찾아오고... 네 저는 대역죄인.......
골디는 잘 보셨지요?! 네 저는 잘 보면 안 되는데.... 대역죄인.....
이 글 쓰고 나서 꿈에 매일 방탄이 나와요...! 독자분들 꿈에도 다정한 정구기가 나오길 바랄게요
늦게 온 주제에 심히 짧기도 하다 퍽 난감하군...
도깨비 오스트 캬아!
드디어 둘 사이에 사랑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ㅠㅅ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