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해를 품은 달 prologue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엄마가 입혀주는 베이지색의 와이셔츠와 군청색 멜빵 반바지를 군말없이 넙죽 받아입던 그 시절.
지금은 이사를 가서 바뀌었는지 그대로인지 잘 모르지만, 내가 그곳에 살던 여덟살 때의 등 하굣길에는 초록색 지붕의 낡고 작은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온다!」
그 때는 버스정류장을 일정한 텀으로 오가는 길쭉한 하늘색의 버스가 마냥 신기해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갈 때마다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버스를 구경하곤 했다.
덕분에 버스기사 아저씨께 ´버스를 타지도 않을 것인데 왜 거기 앉아있냐.´며 종종 호되게 혼쭐이 나기도 했지만, 나는 버스를 구경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칙칙폭폭 기차도 아니고, 옆집 아주머니가 타고다니는 작은 자동차도 아닌 것이 어슬렁 어슬렁 동네를 배회하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게 호기심 많은 어린 내겐 마냥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그 날도 나는 신발주머니를 옆에 얹어두고 나무 의자에 앉아 왔다갔다 거리는 버스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꽤 오랜시간 왔다갔다 하는 버스를 꿈뻑꿈뻑 구경하고 있었을까, 치이이-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로 몇일동안 아무런 핀잔도 없으시던 버스기사 아저씨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 녀석, 거기 앉아서 계속 헷갈리게 할테냐?」
「히익…! 가, 갈게요…!」
「…꼬마야, 잠깐만!」
짜증 가득한 버스기사 아저씨의 호통에 깜짝 놀라 멍하던 눈에 얼른 초점을 찾고 옆에 놓아 둔 신발주머니를 부랴부랴 챙겨드는데 문득 버스기사 아저씨가 날 불러세웠다.
쭈뼛쭈뼛 돌아서 버스기사 아저씨를 마주하자 아저씨가 성가신다는 표정으로 까딱까딱, 이리오라는 손짓을 하셨다. 평소와는 다른 아저씨의 모습에 궁금증보단 덜컥 밀려온 무서움이 더 컸던지라 나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날 왜 부르시지? 이번에야말로 날 제대로 때리시려는 건가…
그 짧은 찰나에 작은 머리통 안에 별의 별 생각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혼났던 기억밖에 없는지라 신발주머니를 쥔 손에 꼬옥 힘을 더하고 신발 밑창을 바닥에 비벼댈 뿐, 선뜻 아저씨가 계신 버스 쪽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자꾸만 주저하는 내 모습에 앉은 자리에서 몸을 한 껏 빼고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시던 아저씨가 ´뭐 하고 있어, 이리와서 버스에 타보라니까.´ 하고 으르렁, 으름장을 놓으셨다.
「저어…버스를 타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그렇지.」
「난 돈도 없고…타는 법도 몰라요…어디서 어떻게 내려야 할 지도 모르고…」
「잔말 말고 일단 타! 돈도, 타는 법도 다 나한테 맡겨라.」
「…어어…?」
「…혼내려는 거 아니야, 임마! 얼른 타.」
「어어? 정말요?」
「그럼! …마지막인데, 네가 마음에 걸려서 그런다. 오늘은 승객도 없으니 마을 한 바퀴 쭉 돌면서 구경시켜주마.」
「우와아!!! 아저씨 감사합니다!」
▒▒▒
「아저씨, 저건 뭐라고 읽는 거에요? 나 영어는 아직 A, B, C밖에 몰라서…」
「뭘 말하는거냐, BUS STOP?」
「우와, 아저씨 영어 짱 잘해! 버스 스탁?」
「스탁이 아니고 스탑. 스탑은 한국말로 '멈추다' 라는 말이지. 버스가 멈추다- 대충 이런 말이니까, 버스가 쉬어가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옆에서 쫑알쫑알 묻는 내 질문에 아저씨는 방긋 웃으시며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주셨다. 버스정류장의 나무의자에 앉아 버스를 구경하는 나를 매번 혼쭐내시던 아저씨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까지 혼나 온 것이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그렇게 처음 타 본 버스의 묵직함과 아저씨의 따뜻한 설명에 신이 나서 세 정거장을 지나칠 때까지, 나는 아저씨가 버스를 타기 위해 서있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버스가 멈추지 않고 눈 앞을 지나쳐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그저 멍하니 서있는 사람들도 내가 이를 늦게까지 알아채지 못한 것에 한 몫 했다.
그것에 본격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것은 처음 내가 탔던 버스정류장으로까지 마지막 두 정거장을 남겨둔 네번째 정거장에서였다.
「근데 아저씨, 왜 사람들을 그냥 다 지나쳐요? 태워야 하는거 아니에요?」
「오늘은 괜찮다.」
「왜요, 왜요?」
「씁! 시끄럽다. 사내녀석이 말 많으면 못 써. 그나저나…너 잠깐 내 옆에 와봐라.」
버스의 노약자석에 앉아 창밖의 사람들을 의아하게 내려다보다 아저씨의 부름에 쫄래쫄래 운전석으로 향했다.
내가 오는 것을 하나하나 가만히 지켜보던 아저씨께서 흠칫 놀란 표정으로 버스를 차도의 한 가운데에 세웠지만, 어느 누구도 비키라고 크락션을 울린다던가 버스를 두드리며 성화를 낸다던가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저씨와 내가 탄 버스 주위를 쌩쌩 지나치는 자동차들을 보며 끝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만이 멈춰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음표로 가득 찬 내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시던 아저씨가 어딘지 쓸쓸한 표정으로 내게 하시는 말 또한 이상했다.
「너… …달이구나. 빛을 잃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달.」
「저어…난 달이 아니고 지호에요. 우지호.」
「네가 이런 곳까지 떨어진 이유는 널 사랑한 해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해와 달의 사랑은 금기야. 달이 마음에 해를 품는 것만으로도 몸의 절반 이상이 활활 타오르기 때문이지.
해를 불, 달을 얼음이라고 생각해봐라. 둘이 가까워지면 무엇이 없어져 버리는지. 그것을 알면서도 해는 널 사랑한거야.
그 해도 너를 사랑해버리고, 그러다 네가 마음에 해를 품게 만들고, 끝끝내 널 불타게 해버린 댓가로 이 세상 어딘가에 떨어졌을거다. 신이 그 해를 폭파시키거나 없애지 않은 이유는 네가 크면 알겠지만, 사랑이란 것이 어쩔 수가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야.
그 해가 저 멀리로 떨어졌으면 다행인데…네가 움직일 때마다 작은 불똥이 튄다. …그 해가 네 가까운 곳에 있거나, 둘이 만나기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야.」
「…나요, 아저씨가 무슨 말씀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을 조심해라. 네 온몸을 뜨겁게 만들 정도로 너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을 조심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의 마음은 한치 오차도 없고 깨끗한 진심이지만, 그것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 불씨는 빠르게 퍼진다.」
▒▒▒
그 날, 집에 돌아온 나는 할머니의 품에 파고들며 오늘 처음으로 버스를 탄 것에 대하여 신이나서 마구 떠들어댔다.
「할머니, 할머니. 오늘 나 처음으로 버스를 탔어. 하늘색 버스 아저씨 있지? 매일 나 혼내신다는 그 아저씨! 그 아저씨가 오늘은 친절하게 웃으시면서 날 태워주셨어.
이것저것 알려주셨는데…할머니 버스 스탁 알아? 스탁이 영어고 한국말로 멈추다 라는 뜻인데…어, 스탁이 아닌가? 할머니 미안, 이거는 오는 길에 까먹었다…음, 그리고 아저씨가 햇님 달님 이야기도 해주셨다!
잘은 알아듣지 못 했지만, 그냥 다 좋았어. 할머니도 나중에 나랑 같이 버스 타자. 덜컹덜컹 거리는게 벚꽃 축제마다 마트 앞에 있는 미니 바이킹 보다는 못 하지만 진짜 재밌었어.
그리고…그리고오…으음…」
…그리고오, 나 졸려…
난생 처음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느라 온몸이 지쳐버렸는지, 쉴틈없이 다다다다 종알거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할머니의 손길에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다시한 번 버스를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쉴틈없이 달달달 엔진 소리를 내며 작게 흔들리던 낡은 하늘색 버스와 무섭지만 실은 자상한 버스기사 아저씨.
우리가 없는 것처럼 쌔앵- 바람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형형색색의 자동차들과,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배경처럼 서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위로 흩어지는 햇님 달님 이야기.
「이놈이 꿈에서 버스를 탄 모양이네…우리 강아지, 버스가 그리도 타고 싶더냐. 네가 말하는 하늘색 300번 버스는 오늘 아침에 사고가 나서 하루종일 운영하질 않었다. 나중에 할미랑 진짜 버스 타러 가자.」
꿈에서 나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하늘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저녁밥을 먹으라고 깨우시는 할머니의 손길에 눈을 뜰 때까지 버스는 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버스가 왔었을까…?
그 날 따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소한 햄이 푸석푸석 하나도 맛이 없었다.
▒▒▒
「마지막으로…악수나 한 번 해보자.」
「악수요?」
「그래, 악수! 그동안 아저씨가 소리질렀던 거, 이걸로 용서해 줄 수 있지?」
「에이, 아저씨 헷갈리게 한 건 분명 제 잘못인데요, 뭐. 그나저나 오늘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악수!」
「악수! … …이크, 역시 손이 차다. 그렇다고 해가 뿜는 따뜻한 빛에 현혹되지 말거라.」
「네네- 아저씨는 이제 가시는 거에요?」
「응, 나는 이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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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 무슨 똥글이지? |
죄송해요 갑자기 감성 폭발해서 이상한 글 싸지르고 갑니다... 이번 프롤로그 편은 지코의 과거 부분인데 조금 밝은 분위기에요. 지코도 애교많고 귀엽네요. 하지만 앞으로 있을 전체적인 소설 분위기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입니다. 똥글 읽느라 고생하셨어요...감사합니다 :) * 아, 그리고 차들이나 사람들이 지코가 탄 버스의 존재를 모르는 이유는, 이미 세상에 없는 버스이기 때문이에요. 글을 읽으시면 아실 수 있을거에요! 혹시나 해서 덧붙입니다.. :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