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염 Prologue
:이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죽기 싫어.
이렇게 속절없이 사라지기 싫어.
“가자. 너 말고 데리러 가야 할 영혼들이 수두룩해.”
눈앞에 나타난 죽음은 생각보다 작고 왜소한 여자아이였어.
“안 죽을 거야?”
죽음이 내 손목의 칼자국을 보며 물었다.
내 시선도 그 앨 따라 내려갔다.
나는 우둘투둘한 흉터와 상처를 쓸어본다.
그 감촉을 잊지 않으려고.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네가 나를 살리려 했다는 증거를 나는 매 순간 되새겨야만 하니까.
피가 튄 벽지가 어지럽게 돈다.
그렇게 빠져들어 왔었나 보다.
피는 말이야, 혈관에서 너무 큰 압력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손목을 그으면 피가 튀어.
내 말에 죽음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너 죽어가고 있어.
안 죽을 거면 빨리 911 불러.
이대로 죽어버리면 너 억지로 끌고 가야 돼.
한두 번 이런 거 아니잖아.”
막상 죽음의 손이 내 손목을 붙들자 차갑고 냉랭한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한편으로는 편안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
날 쫓는 망자들의 영혼들에게서 벗어나 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죽어도 되니.
내 희미한 물음에 죽음은 선명하게 대답했다.
“원한다면.”
말을 마친 죽음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채 나는 홀로 남겨졌다.
완벽한 고독 속에서 나는 울면서 너를 생각했다.
이건 우리의 마지막이 될 수 없어.
우리는 서로 없이는 못 살거든.
“결정했어?”
죽음이 내게 물었을 때 나는 살겠다고 했다.
바보 같겠지만 나는 아직도 살고 싶다.
옆에서 나를 보살피고 있던 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고 의료진이 몰려왔다.
백색 조명이 잠깐 내 눈을 멀게 만들고 팔에 박히는 안정제인지 뭔지 모를 주사약이 혈관으로 흘러 들어갔다.
어둠이 떨어지는 날 감쌌다.
나는 어둠의 딸, 긴긴 밤조차 나보다 어두울 수는 없겠지.
다시 깨어나자마자 네가 내 어깨를 세게 잡고 일으켰다.
내 뺨을 때릴까.
용기 내어 올려다본 넌, 너는 울기 직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나를 참 많이 닮았다.
"심아."
내 침묵에 네가 내 침대 곁에 무릎을 꿇는다.
아름다운 입술을 열어 내 이름을 부른다.
네가 지금 입술에 담는 것은 내 존재다.
내 삶이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음절이다.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너는 내 마음을 다 헤이기에는 아직 어리다.
네가 죽으면 나는 살 수가 없다.
너를 미치도록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만은 살릴 것이다.
그건 너도 어쩌지 못할 내 마음이다.
사실, 우리 둘 다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걸 알기에 너만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
눈을 감고 널 밀쳐낸다.
고갤 돌리고 끝내 등마저 돌린다.
그러나 네 손길이 내 몸에 와 닿고 금세 네 입술이 다가든다.
너는 울고 있다.
나는 그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네 눈물은 외롭고 어두운 비와 닮았다.
너는 비 오는 날 땅이 울리는 것을 들어봤을까.
지금 내가 꼭 그렇다.
수천, 수만, 수억 개의 빗방울들이 스타카토로 내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다.
너를 사랑해서 이토록 아픈가.
이처럼 절절하게 아픈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사랑하는 대신 네게 두 팔을 뻗고 널 어루만지고 입 맞추겠다.
구름이 두텁게 덮이고 흐려지더니 기어이 한바탕 쏟아 내고야 만다.
우린 언제나 무참히 깨지는 비다.
색다른 비의 냄새가 지면을 덮는다.
다시, 비가 내리고 잠이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홀린 듯 젖어 들어간다.
눈물과 후회로 타들어가는 기억에 천천히, 잠식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