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현성] 2013, 더 파라디(The paradis) 01.
01. 뭔가 바꼈는데
오늘은 요 며칠 새와 달리 해가 쨍쨍 내리쬐기 시작하던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가, 녀석의 허름한 꼴을 따라 하고 나선다면 오늘은 왠지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볼 수 있을 것 같은 안이한 생각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억울해져오는 마음에 한쪽 눈썹을 구긴 우현이 저 앞에 가만히 서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지난 2주와는 전혀 딴판인 채로 말끔하게 빼 입은 모습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헝클어져있던 머리는 언제 또 이렇게 단정해졌는지. 오히려 저를 거지취급하듯 내려다보는 눈빛에 허,하고 웃은 우현이 거만하기 짝이 없어 뵈는 눈동자를 마주봤다.
한동안은 둘 사이에 침묵만이 맴돌았다. 다 떨어져나가는 옷을 입고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로 쭈그려 앉아있는 우현과 달리, 두터운 패딩에 따뜻하게 갖춰 입은 니트까지. 주변에 쌓인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어서 그런건지, 유달리 하얘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가 입 안에 든 막대사탕을 굴렸다. 다짜고짜 제 앞에 멈춰선 그는 그렇게 한동안, 도르륵 거리며 사탕을 굴리는 소리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떡볶이 먹고싶냐."
2주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비록 그 첫마디는 뜬금없기 그지없었지만.
우현의 손에 들린 핫팩이 눈바닥으로 툭,떨어졌다. 그토록 궁금했던 목소리였으니까. 생각했던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묘한 미성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기가 차는 이유는 뭘까, 입을 떠억 벌리고 그를 쳐다보던 우현의 머릿속엔 어떤 직감이 스쳐지나갔다.
거지 취급을 하고있다. 지난 2주동안 그 누구보다 거지처럼 내 앞에 나타났던 그가, 어떻게 말 한마디라도 걸어볼까 하고 제 꼴에 맞춰서 입고 나온 내게 거지 취급을 하고 있다. 동병상련 작전이 물건너 간 것은 둘째 치고, 허탈함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우현이 기가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떡볶이? 그리고 너무나도 말끔히 제 앞에 나타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우현의 면전에 대고 쑥 내밀었다.
"그래, 떡볶이."
그럼에도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건, 쌓여있는 눈 위로 반사된 그의 얼굴이 허탈한 제 기분과는 다르게 뜬금없이 화사해 보였다는 것이다.
* * * * *
알게 된 지는 2주. 그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현의 눈에 들어오게 된 지는 정확히 12일째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에게 관심을 둘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편의점으로 떨어진 찬반을 보충하러 나오는 길에 얼핏 얼핏 보던 사람, 그 뿐이었다. 꽉 채워진 비닐봉지를 덜렁거리며 편의점 문을 나설 때마다 바로 옆 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 형상. 물론 처음에는 할 일 없는 알바생이 농땡이 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곤 입은 옷이 너무나 허름했으니까. 이상하긴 이상했으나 거기까지. 우현은 항상 금방 몸을 돌려 저의 자췻방 쪽으로 발걸음을 바삐 했다.
5일째 쯤에는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생긴 것도 어려 보이는데, 집에서 학대라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나처럼 프리한 복장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편의점에 도착한 우현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날이 갈수록 초라한 행색으로 같은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으니까. 묘하게 쭉 째진 눈을 하고서는 뚱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안 그래도 떨어져 나갈듯이 위태로워 보였던 신발이었는데, 그것은 하루 지나 보니 밑창이 거의 틑어져 있었다. 게다가 입은 옷도. 일부러 오픈 숄더로 만든 것도 아닐 테고, 어깨선이 다 보일 정도로 늘어진 윗옷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단 돈 백원조차 없어 보이는 행색. 걸음을 멈춰 섰던 우현이 편의점 안으로 쏙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불쌍해. 그리고 여전히, 거기까지가 우현이 그에게 갖는 안일한 감정이었다.
다시한 번 말하지만, 단지 '거지'. 거지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현의 눈길을 다시 끈 건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그가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 우현이 집으려던 참치 캔을 따라 집지 않았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우현에게 '거지'라는 타이틀로 이미지를 마감할 뻔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현은 그의 앞에 동전이라도 받아낼 깡통 하나 없다는 게 의아할 정도였으니까. 우현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그가 참치 캔을 계산하는 꼴을 훔쳐봤다. 그리고 나선 그렇지 않아도 크게 떴던 눈을 더욱 더 크게 키워 그가 하는 양을 쳐다봤다. 허름한 옷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그가 꺼낸 것은 카드였다. 캔 하나 사는 주제에 카드 결제.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저 편의점 앞 거지가. 우현은 제 손에 들린 꼬깃꼬깃한 오천원 짜리 지폐와 그를 번갈아보았다.
딸랑, 소리를 내며 그가 편의점을 빠져나가고 나서 저의 것을 계산한 우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 늘어난 옷을 입고 있는 주제에, 그래도 먹고 살려는 모양인지 캔 하나 살 돈, 아니, 카드는 있나보네.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가 먼저 나섰던 문을 열고 편의점 밖으로 나온 우현은 다시 한 번 허탈함에 허,하고 터지는 웃음을 뱉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그는 앉아 있었던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엔 새 식구까지 하나 추가하고서.
방금 전에 사간 참치 캔의 내용물은 벌써 절반이나 없어져 있었다. 마치 그의 머리카락 색깔을 닮은 갈색 새끼고양이.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반쯤 묻은 그는 캔에 코를 박고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는 고양이를 멍한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림잡아 10초 정도 지났으리라 생각된다. 자리에 멈춰서 제 쪽을 쳐다보고 있는 우현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천천히 눈을 들어 우현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처음으로 그 눈을 마주봤다. 그를 알게 된 건 벌써 5일. 그를 눈에 담게 된 건 오늘부터 1일. 이상하게 묘한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우현이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카드 결제 하는 거지 만큼이나 말도 안되게, 볼품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눈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으니까.
…대책 없이 묘한 눈이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 궁금해 무작정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7일째부터였다. 날이 갈수록 초라해져만가는 옷차림을 하고서는 가까이라도 다가갈라치면 잔뜩 날이 선 눈으로 흘겨보기만 하던 남자. 우현은 그가 웅크리고 앉은 편의점 건너편에 대놓고 앉아 그를 관찰했다.
"…뭔데, 씨발."
그렇게, 9일째 들어서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욕지거리를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경계태세를 갖추던 남자는 매일 저녁 즈음 이상한 남자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도 역시나 검은 머리의 훤칠한 남자를 따라 나서는 그를 본 우현이 속 어디쯤에서 무언가가 뒤틀리는 느낌을 경험하며 손에 들린 콜라 캔을 소리나게 찌그러트렸다.
벌써 제가 본 남자들만 해도 다섯명 째였다. 우현이 거울 앞에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똑같이 거지처럼 보이면 좀 덜 경계해주려나. 오늘은 기필코 말이라도 한 번 걸어 볼 거라고 다짐한 우현이 그가 입은 옷처럼, 무릎이 다 늘어난 츄리닝을 입고서는 멀쩡한 머리를 까치집으로 만들었다. 원래 인간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더 편해 하는 법이니까. 거울에 비친 저의 초라한 모습에 씨익 웃은 우현이 여느 때보다 추레한 꼴로 집 밖을 나섰다.
"거지새끼."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말끔하게 나타난 그는 한 결 해사해진 모습으로 우현을 돌아다보았다. 그 옅은 미성에 어울리지 않는 욕과 함께 픽 웃은 남자가 발걸음이 느린 우현에 맞춰 자리에 멈춰 섰다.
"떡볶이 얻어먹으려면 빨리 좀 걸어."
놔두고 가버릴테니까. 이윽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에게 더욱 바짝 따라붙은 우현이 바쁘게 발걸음을 따라 놀리면서도 속으로는 궁시렁댔다. 누가 누구보고 거지래. 지금까지 계속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노숙하 게 누군데.
지금 뭔가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우현은 남자가 저를 졸졸 쫓아가던 자신을 돌아다보며,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
"…할 만 하네."
* * * * *
앞서 걸어가던 남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어느 작은 옥탑방이었다. 이름은 뭐야? 몇 살이야? 한껏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건 궁금한거다. 그저 걷기만 하고 있는 남자의 뒷통수에 대고 묻고 싶은 질문들을 쏟아낸 우현은 급기야는 혼잣말까지 했다. 대답도 없네. 혓바닥이 잘린 것도 아니고. 아까 보니까 잘만 말하더만, 사람 그렇게 무시하는 거 아니야. 입을 삐죽인 우현이 틱틱대면서 덧붙였다. 물론 나, 거지도 아니고.
…거지는 너겠지. 마지막 말만은 입 안으로 삼킨 우현이 멈춰선 집의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 올라갔다. 그러다가 계단 옆쪽에 놓인 화분에 발이 채이는 바람에 흐트러진 화분이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 씨팔! 슬리퍼를 신은 탓에 맨발에 통증을 입은 우현이 끙끙대면서 주저 앉았을 때, 온갖 질문 공세에도 벙어리처럼 씹어대기 일쑤였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화분 깨졌으면 넌 뒤진거였어."
다친 발을 감싸며 주저 앉은 우현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뭐,뭐?"
"안 깨졌네."
"야. 지금 내가 다쳤는데!"
"니가 뭔데."
바닥에 쓰러진 화분을 바로 세우면서 잎파리를 정리한 남자가 얼떨떨하게 굳어있는 우현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떡볶이 좀 준다고 따라오라니까 거지새끼가, 화분하고 맞먹으려고 하고있네."
그리고 우현은 말하고 싶었다. …그럼 내가 사람인데, 화분보다 못할 건 또 뭔데?
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옥탑방 안으로 들어가버린 남자의 행동 반경을 눈으로 좇다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성격 지랄맞네. 또 저가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는 모양인지, 활짝 열려진 문을 쳐다보던 우현이 두 손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사는 환경은 꼭 저를 빼닮는다고 한다. 우현은 틱틱거리며 현관 안으로 들어선 순간에서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집어 던진 남자가 현관에 선 우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아까부터 내뱉는 차가운 말보다 백 마디는 더 하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 들어올거냐는 눈빛. 우현이 몇번의 헛기침 끝에 집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사온지 얼마 안 된건가. 우현이 남자의 지랄스러운 성격처럼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상자 더미들을 제외하고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옥탑방 내부를 보면서 생각했다.
말 걸기 전이나, 후나. 역시나 묘한 사람인 건 확실한 것 같다고.
파라디 시작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필사적으로 돌아온 규닝이 근데 사실 아직도 인스티즈에 연재를 할지 안할지는 고민즁..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