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이란게 다 이런 식이었다. 친절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말 그대로의 빌어먹을 운명이었다. "야, 짭새." "어디, 어디어디." "3시 방향. 그대로 내려서 좆나 뛰어." "몇 번?" "아무데나. 너 먼저 가." "어? 너는?" "시선 끌어야 돼. 단도리 잘 해." 어깨에 친숙한 손이 두번 툭툭 내려앉았다 사라진다. 빼곡한 사람들 틈으로 낮게 속삭이던 우정이 멀어진다. 아이씨, 어떻게 지켰는데. 너까지 잃으면 나는, 치이익- 지하철 문이 열린다. 시선보다 빠르게, 생각할 틈도 없이 발이 튀어나간다. 명호의 붉은 머리칼이 핏자국처럼 잔상이 된다. 우뇌를 삽시간에 죽인다. 소매치기의 생리. 살아남으려면 머리도, 눈도, 손도, 무엇보다 발도 빨라야 한다. 한 탕만 제대로 치면, 이번만 똑바로 해내면, 마지막인겸 진짜 눈 딱 감고 한번만, 이번 판만, 그러다 이렇게. 형을 잃었고 아는 동생을 놓쳤고 이젠 명호까지, 잡아주지 못했다. 가지 말라고 말렸어야 했다. 너 보내느니 내가 잡힌다고, 그깟 지갑 하나에 얼마 들었다고, 그거 포기하고 명호 데리고 같이 뛰든가, 같이 갔어야 했다. 나는 끝까지 못난 놈이었다. 지옥이 다시 나를 불렀다. - 화장실 한 칸을 잠그고 들어와 후드를 벗었다. 변기 레버를 미친듯이 누르고 쏟아지는 물소리에 울음을 타넣었다. 명호야, 명호야, 내 빨간머리 앤, 서명호. 명호야. 한번 거리가 멀어지면 그저 알아서 살아남았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은 이미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기계란건 공범이 있다는 확증이니까. 이 생활 3년차에 내 옆에서 그 눈에 잘 띄는 빨간 머리로 잘도 피해다니며 나와 함께 굶고, 나와 함께 웃던 놈이 명호였다. 낯짝 부끄러웠다. 그런 새끼 손을 저버려? 배때지는 이 와중에도 탐욕스럽게 냉철해 지갑을 열어보라고 아우성이었다. 좌뇌가 눈을 부라렸다. 당장 밥 사먹을 돈도 없었다. 13310원. 고작 13000원짜리 우정. 명호는 말라 비틀어진 꽁초 쪼가리마냥 초라해져 눈자위 어느메에 고스란히 처박혔다. 살려면, 냉정해져야 해. 빨간머리 앤 좋아하시네. 감수성도 같이 처박았다. 때 탄 카키색 후드를 뒤집어쓰며 화장실을 나섰다. 친구 구하겠다고 명줄이고 숨줄이고 다 내놓고 지구대에 제발로 기어갈 범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스라소니. 밤거리 고스란히 나의 독무대였다. 이젠 정말, 독무대구나. 급하게 7번 출구로 올라오자 한창 공사중인 공원이었다. 씨, 뭐야. 무슨 길이 없어. 간이 계단으로 내려가자 역 이름 따라가기엔 심심한 골목 끄트머리였다. 젠장. 편의점은 어디야? 골목 하나 초입에 앉은 씨유를 발견했다. 공허한 위의 기세가 등등했다. 왕뚜껑 하나로 허기만 면했다. 빨간머리는 숨으려고 해도 숨어지지 않는 특징이야. 물어보는게 제일 빠르겠다. 알바를 붙잡았다. "저기요," 무의식중에 콧대에 가느다란 주름 세 줄이 잡혔다. 이미 봤다, '아 씨 냄새'하는 표정. 후드에서 쿰쿰한 냄새가 올라온다. 씨발, 빨래고 나발이고 쩐이 있어야지. "요 근처에, 키 이만한 빨간 머리 남자애 하나 지나다니는거," "여기 널린게 빨간 머린데," 대학가의 상징. 청년 문화의 메카. 널린게 히피고 힙스터고.. 나는 진심으로 이 학교에 침을 뱉고 싶었다. 강남, 신도림, 다 제껴두고 왜 하필 이 곳이야, 찾을 수도 없게. 울컥 치미는걸 납작 눌러두고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며 거리로 다시 나왔다. 코가 찡했다. 많이 바라냐.. 한번이라도 내 편 좀 들어주지. 운명이 나를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잡히지 않았다면 아직 역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교선지는 늘 그 공식이었으니까. 1번부터 9번까지 모든 출구를 돌았다. 수없이 휘황찬란한 옷과 웃음들 사이에 꾀죄죄한 떡진 머리칼 그 하나가 안 보였다. 한 번 더 돌았다. 하, 새끼 가만히 좀 있지. 내가 찾는다고 그렇게나 말했었는데. 안 보였다. 한번 더 돌았다. 네번째 돌던 때, 공사중인 공원 한복판 뻥 뚫린 에스컬레이터로 나와 목을 놓아 울었다. "으아아.. 명호야.. 어어어어.." 우는 법을 잊어 괴물같은 울음소리만 성대를 찔렀다. 속으로 넘어가는 법만 알던 물줄기가 이제 와서 왜 부르느냐고 야속하게 자꾸 기도를 막았다. 히겁, 히겁, 숨이 꼴딱거렸다. 둑을 터트릴 법한 눈물 한 방울이 모자라 나는 자꾸 토해내기만 했다.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게 뭘까. 나는 왜 만삼천원에 널 팔아넘기고도 내 당장의 배때기가 더 중요할까. 명호야, 나는 뭐가 이따구로 못났냐. 나는 왜 지옥에서 태어났냐. 이젠 꽉 찬 뱃속이 죄책감을 지독하게 짓눌러내리며 뒤룩뒤룩 터전을 잡았다. 아아, 나만 없으면. 나만 없었으면. 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안 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알콜중독을 피해가지 않았을까? 빚쟁이들에게 집을 다 팔리고도 쫓기는 신세는 면하지 않았을까? 형은 무사하지 않았을까? 찬이가 계속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 명호를 놓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구더기같은 생각이 온 몸을 휘감아 넋을 까무룩 놓으려는 찰나였다. ".. 기요, ㅈ... ㅈ..기.." 지지직거리는 잡음을 뚫고 말소리가 들렸다. 뇌가 덜컹덜컹 흔들린다. 수족이 묵직하다. 한순간 질량을 다시 얻은 몸집이 지구로 곤두박질친다. "정신 들어요? 이 날씨에 밖에서 이 차림으로.. 나 보여요?" "아, 저기," "말 할 수 있겠어요? 일단 우리집으로 가요. 보니까 이 생활 꽤 한거 같은데 이 날씨엔 객기 부리다 얼어죽어요. 당신 죽을뻔 했어요." 몸을 뒤척이자 낯선 부스럭 소리가 들린다. "핫팩 그대로 안고 있어요. 저체온증 걸려요, 진짜." 옷이 푸른색인데, 경찰인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경계 태세를 갖춘다. 시야가 아직 흐리다. 그래도 내 몸은 내가 지키는거야. "누구세요?" "하..? 저 누구 해치고 막 그런 사람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니, 누구냐고." "안 물어요! 그냥 와요, 당신 지금 상태 안 좋아." "씨발, 말 안 해?" "사람 살려주러 왔으니까 곱게 오지? 이 날씨에 동사하기 싫으면." 담요를 꺼낸다. 생각해보니 내가 걸친건 고작해야 얇은 카키색 후드집업 한 장이다. 패딩은 명호에게. 칼바람이 부는 서울 한복판에, 초가을용 후드 집업 한 장. 곧바로 뼈를 파고드는 추위에 얼이 빠진다. "이거 봐, 이거 봐! 이럴 줄 알았다고, 내가." 다리가 휘청하기가 무섭게 등을 받쳐 담요를 두른다. 이제 촛점이 잡히려나 하는데, 여자다. 많아봐야, 반오십? "하여튼 하고 이 동네 여기 제정신 아닌 사람 널렸어. 당신 오늘 운 좋았어. 허구헌날 마시고 토하는게 일인 새내기 꼬맹이들이 아니라 웬 10대 어린애가 울다 지쳐 정신이 나가는데 내가 요 앞집 안 살았으면 당신 진짜 죽었어." 뭐라는건지 모르겠다. 명호는? 지금은 그냥 명호가 보고싶다. "씨발, 명호 데려와." "아, 걘 또 누구야! 일단 당신 목숨부터 챙겨." "가만 안 놔둔다. 명호 데려와." "당신 지금 이 상태로 나를 가만 안 놔두겠다고? 제정신이야?" 여자가 버럭 성을 낸다. 지지 않는다. "그러게 누가 돌보래, 씨발? 놔두면 됐잖아. 존나, 당신 알 바 아니잖아!" "야, 너 같으면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걸 보고만 있냐?" 명호가 스쳐간다. 나를 부른다. 미소가 맑다! 지훈아! "닥쳐!!" 벙찐다. 본능이 주머니에서 튀어나온다. 맥가이버 칼이 서슬 퍼렇다. 어딨는데, 명호야. 여자가 표정을 바꾼다. 목소리가 깔린다. "잘 들어." "... 씨발." "다시 말하지만, 나는 사람 살리려고 왔어." "존나, 명호야.." "명호고 명태고 일단 당신부터 살고 나면 찾아줄게. 약속할게. 당신이 피터팬이든, 나발이든, 내가 무조건 찾아줄게. 적어도 내 앞에서 사람 죽는 꼴, 나는 보기 싫다. 그러니까 일단 우리집으로 가. 온수 잘 나와. 좀 씻고, 빨래도 좀 하고, 사람다운 모습으로는 있어야 명호인지 하는 그 사람이 당신 알아볼거 아냐." 누구보고 누굴 믿으래. 속아넘어간게 한두번이야? 어디서 기만질이야. "약속한다잖아." 여자가 담요니, 핫팩이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떨어트린다. 양손을 든다. 무릎을 꿇는다. 사뭇 진지하다. "옷 필요하면 내 가디건 줄게. 속옷 필요하면 사다줄게. 양말 신어. 필요한거 막 써. 괜찮아. 우리 동생 같아서 그래. 제발 좀 와. 말 좀 들어. 왜 세상 모든 어린애들은 말을 안 듣냐.. 너 죽는다고.." 손 끝에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 정신도 자꾸 무뎌진다. 뼈 속 가득 고원이 자리잡는 것 같다. 바람이 자꾸만 분다. 멈추지 않는다. 명호는 계속 웃는다. 명호야, 명호야.. 다음 생에선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눈을 뜬게 신기했다. 재차 믿기지 않아, 몇번이고 눈을 깜박거리고 손발을 꼼지락거려보았다. 살아있었다. 그 칼같은 밤을 어떻게든 견디고, 내가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천장의 낯선 무늬를 포착하기까지가 시간이 걸렸다. 초점은 여전히 나를 애태웠다. "말 더럽게 안 듣더니," 방문이 열렸다 닫혔다. 들어본 적 있는 여자 목소리. 소스라쳐 몸을 일으키니 부연 얼굴이 다가온다. "봐봐, 결국 이렇게 올거면서." 생각해보니 이 옷이 아니었다. 회색 후드에 수면바지. 습관적으로 소매에 감춰둔 맥가이버 칼을 찾았다. "그거 지금 빨래 돌리고 있어. 급한대로 내 옷 입혔어. 내가 한거 아냐. 내 남친이 수고 좀 해줬다. 좀 있다 정신 차리면 나와서 아침 먹어. 남친 요리 잘해." 그리고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내가 찾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거 막 쓰지 말고. 위험해." 생각해보니, 자기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지?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여자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씨발, 니가 뭔데."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말을 잇는다. "찾아준댔잖아, 명호." "하, 니가 무슨 수로?" "찾았으면, 어쩔건데."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명호를, 찾았다고? 메모지 한 장을 칼 끝에 꽂아준다. "네 친구 찾아준 사람으로서, 잔소리 한 마디도 못하냐." 설익은 글자가 적혀있다. 여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날카롭게 말을 덧붙인다. "지구대야. 보석금 내줄테니까 너나 걔나 사람 구실 똑바로 하면서 살아. 애꿎은 사람 지갑 털고 다니지 말고." 물끄러미 그 숫자들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애쓰는데 다시 방문이 열린다. "그리고 좀 씻고. 욕실은 오른쪽. 타월은 수납장에. 속옷은 급한대로 편의점거 사다가 넣어뒀어." 다시 닫힌다. 뇌에 마중물을 끼얹어준듯, 생각이 작동한다. 그러니까, 명호를 찾았다고. 이 메모지가 단서라고. 이게 지구대라고. 지구대 번호라고. 여기에 명호가 있다고. 보석금을 내줄거라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우리가.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여보세요?" "지훈아-!" 명호다. 세상 모든 전구에 빛이 들어온다. 내 친구, 내 명호, 얼마나 찾아 헤맸는데, 명호야, 명호야. 발가락 저 끝부터 쩌릿한 무언가가 삽시간에 정수리를 때린다. 잊은지 오래된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처럼 후두둑 후두둑 아침부터 그렇게 내린다. 순간 몹시 그리웠던 것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고소한 아침밥 냄새, 정신을 깨우는 분주한 생활 소음, 옷을 고르는 소리,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의 느낌, 이불의 촉감, 양치질을 하는 소리, 수면바지의 보드라움, 마룻바닥에 발이 붙었다 떨어지는 살소리, 나를 깨워줄 사람이 있다는 든든함. 육감. 다시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그러지 않을거라는. 저 사람은 뭘까. 뭐길래 생판 모르는 나를 깨우고, 핫팩을 안기고, 담요를 두르게 하고, 무릎을 꿇고, 집에 들이고, 옷을 갈아입히고, 때에 전 옷들을 빨고, 널고, 씻기고, 자기의 깨끗한 침대를 온통 내어주는 걸까. 뭐하는 사람일까. 이렇게 사람을 잘 믿어서 어쩌자는걸까. 어쩌라는 걸까. 나는 이런걸 감당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날더러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이 간지러움을 없애라는걸까. 전화기를 들고 울다 웃었다. 엉치뼈 끝에서 고물고물, 뿔이 자라난다. 웃었다. 뿔은 점점 더 두꺼워져 엉덩이가 아팠다. 계속 웃었다. 살갗이 찢기나 싶을때, 뿔이 뽁 하고 빠져나왔다. 아주 깊은 똬리까지도 내 몸을 빠져나갔다. 명호도 웃었다. 우는건가. 아무렴 어때. 오늘은 웃어도 괜찮을거 같다, 명호야. 엉치뼈에서 빠져나간 뿔이 다 녹을때까지 오늘은 웃기만 하자. 걱정 하나 없이, 우리 밥 굶을 염려 없이, 헤어질 불안 없이, 오늘은 하늘을 삼켜 웃기만 하자. 붉은 머리 명크스 너의 곁에 스라소니 W. 훈피 내가 있을게. 우리 오래 잊었던 장난도 치자. 많이많이 삼키고 꺼내보지 않고 살았던 것들 그거 오늘 다 펼쳐보자. 꼭 그러자. 우리 약속하자. 세상의 한구석, 내가 모르던 지상에서 또다른 아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