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울리는 피아노 소리에 어느샌가 나는 일어나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난 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새까만 밤. 오직 달빛만이 비추고 있던 그 곳. 새까만 밤, 그 속의 당신.
달빛은 유난히 밝았다. 이상하리만큼 멍한 내 머릿속을 울리는 피아노 소리. 순식간에 주위를 울리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리듯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다가.
순간 흩어져버린 당신을 바라보는 내 초점 없는 눈동자. 그 밝던 달빛을 다 받아내며 처량하게 홀로 서 있던 나.
꿈속에서조차 버림받은 나 자신이 처량해서 일어났을때는 조금 울었더랬다. 꿈에서만큼은, 따뜻해도 괜찮잖아.조금은 헛된 희망 가져도 괜찮잖아. 꿈이니까.
울컥한 마음이 들어 창 밖을 바라보니,
"....아, 눈이다."
새까만 밤, 새하얀 달을보니 아스라이 생각나는 꿈속의 기억.
우현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눈내리는 밤은 포근했다. 꿈속에서의 기억이 오버랩되면 될수록 가지는 헛된 희망에 발이 이끄는 대로 터덜터덜 얼마나 걸어갔을까, 순간 작게 들려오는 피아노소리에 우현은 순간적으로 멈춰섰다.
혹시나 성규일까 기대하며 조심스레 발을 떼 점점 다가가니 더 선명해지는 피아노 소리에 작게 떨던 우현이 본 것은,
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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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한기가 들었다. 부스스 일어나 보일러를 틀고는 다시 침대로 풀썩, 쓰러지듯 누운 성규는 무심결에 창문으로 본 눈으로 인해 또다시 밀려오는 명수의 기억에 눈을 가렸다. 다짐하면 할수록 또렷해지는 명수가 미웠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자신을 알기에, 성규는 명수를 원망하지도 못했다.
자신을 처참히 버렸던 명수일지라도 아직 잊지못한건 성규이기에, 하나 둘 떠오르는 기억들에 또다시 상처를 받아야만 했다. 병신같았지만 김성규는 아직 김명수를 채 다 잊지 못했으므로.
자꾸 떠오르는 생각들을 피하려 침대에서 일어난 성규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두웠고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살이 아리는 느낌에 가디건이라도 챙겨오지 않은 자신을 타박하며 성규는 천천히 걸었다.
이따금씩 명수는 새벽에 전화를 했었다. 막무가내로 나오라고 화를 내다 어쩌다 싫다고 거절이라도 하면 그대로 성규의 집으로 찾아가서 미친듯이 문을 두드려댔었다. 결국 밖으로 나온 성규가 살갑게 말을 걸어도 명수는 아무 말도 않은 채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기 바빴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걷다가 어느 순간 성규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명수에 놀란 성규는 그날 밤이 새도록 명수를 찾아다녔었다. 물론 못찾고 집에가서 미친듯이 전화만 해댔지만.
그런 이상한 새벽산책이 반복되다보니 어느 순간 명수가 없어지면 자연스레 집으로 터벅터벅 들어가는 성규였다. 그 다음날이 되서 물어보면 인상만 쓸 뿐, 아무 말도 없는 명수에게 성규는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성규 혼자 좋아하는 관계를 끝내준 명수에게 고마워서, 김성규는 그저 고분고분 따랐다. 어쩌면 애초부터 마음따위는 받아준게 아니였었다. 김명수가 원하는 건 김성규 몸 하나였으니. 그래도 성규는 좋았다. 비록 자신의 몸을 좋아하는 김명수이지만, 그의 곁에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바라는 게 많아진 성규에게, 명수는 그저 몸이나 대라며 독한 말들만을 내뱉었다. 그말에 상처받으면서도 성규는 사실 안심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 때문으로라도 김명수는 내 곁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 사실때문에 오히려 위험할수도 있다는 것을 성규는 몰랐다. 우선은 명수가 곁에 있는게 중요했으므로. 서서히 미쳐갔다. 자꾸 자신을 애태우며 기다리게 하는 명수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죽을 생각을 하다가 명수의 한마디에 또 미친듯이 사랑을 갈구하다가, 버려지다가.
자신까지 버리며 그렇게 성규는 명수를 사랑했다. 명수에게 항상 성규는 목말라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들에 쓰게 웃다가 괜히 주위를 한바퀴 둘러본다. 그 순간, 약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성규는 귀를 귀울였다.
미약한 소리였지만 분명히 피아노 소리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생각날듯 말듯한 멜로디에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성규의 표정이 순간 굳어진다. 다리에 힘이 풀린 성규는 휘청거리다 가까스로 벽을 잡아섰다.
저 노래는 분명히,
명수의 자작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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