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m on a cold night
Write by. 설작
춥다고 생각했다. 몸을 움츠리고 목도리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너랑 헤어지는 날에도 추웠었는데. 1년이 지나간 일이었다. 미련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래, 1년이나 지났는데. 왜 잊지못하는건지. 또각거리는 구둣소리를 내며 도착한 곳은 지하에 있는 조그만 카페였다. 장사가 잘 되는지라 사람들로 북적여 정신이 없을 법도 했지만 카페의 분위기 때문인지 딱히 거슬리지는 않았다.
"오, 왔어?"
"뭐냐, 어색하게."
"오늘은 좀 늦었네."
여기 내게 인사를 건네는 녀석이 이 카페의 주인. 잘나가는 카페 사장에 잘생기고 목소리까지 좋으니 말 다했다. 전 남친보다 이 녀석이 더 낫다고 내게 말하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 음. 착하긴 하지. 통하기도 뭐 이정도면...됐다. 얜 아니지. 몇년인데.
"술."
"알아. 명색이 카페인데, 너 때문에 바 되게 생겼어."
"처음부터 술을 팔지를 말든가."
"그러게. 팔지 말 걸 그랬다."
매일 출석도장을 찍다싶이 하는데, 그때마다 술을 마시는 나도 웃기고 내가 올 때마다 자연스레 술을 건네는 태형이도 웃긴다. 가끔씩 칵테일 같이 도수가 낮은 술을 내게 건네기도 했다. 그때마다 결국엔 내게 맥주를 다시 줘야했지만. 목도리를 풀며 술을 시키는 내게 태형이는 오늘도 칵테일을 건넸다. 무시할까 했지만 그냥 받아 마셨다. 술은 별로 취하고 싶지않았다. 칵테일을 들고 한 쪽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LP판을 뒤적거리며 구경했다. 올 때마다 했던 짓이라 그것도 잠시, 잠깐동안이었다.
칵테일을 한 잔 비우고 빈 잔을 톡톡 쳐댔다. 그러다보면 태형이가 칵테일 잔을 쏙 가져가 다시 채워주었다. 그러면 나는 잔을 받아들고 태형이에게 말했다.
"바보같냐. 지금."
"뭐가."
"뭐긴. 나 말이야."
이번엔 도수없는 걸로 줬는데 왜 그러냐며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는 김태형. 도수도 없었는데 또 왜 이럴까. 1년이면 다른 사랑찾을때도 됐는데. 찾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나만 이런건지 모른 사람들이 다 그런건지.
"...바보지 그럼."
"....."
"어? 어서오세요- 죄송하지만 자리가 없네요.."
칵테일은 왜 이렇게 맛있는거야. 김태형한테 배워 두던가 해야겠다. 태형이가 손님을 접대하는 동안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자리에 앉았다. 역시. 오늘도 술은 내 목구멍을 넘어간다. 목이 마르지도 않지만. 오히려 따가워서 인상 찌뿌리게 되지만, 그래도 술술 잘만 넘어간다.
"야야. 김여주. 애써 칵테일 만들어줬더니."
"미안. 손이 가더라."
"오늘은 몇시까지 있을거야? 나 오늘 빨리 마감하려고 하는데."
"내가 안 간다고 하면 안 갈 것도 아니면서....이거 마시고 갈거야."
"너 이것만 마시고 오늘은 더 먹지마. 알겠어? 니 간은 무슨 죄야."
"내 간이 걱정해줘서 고맙단다."
한 번 씩 웃고 다시 제 할 일을 하는 태형이 앞에서 나는 조용히 맥주 한 병을 비웠다. 맥주병을 태형이에게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서야 카페에 사람이 없는것을 알았다. 아..이래서 조용했었나보다. 태형이와 카페를 나와서 문을 잠구는 것까지 보고 잘 가라고 인사를 나눴다.
"딴 데로 새지 말고 집 가라. 집."
"알겠다고-"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차가워진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북적거리는 거리를 걸어 조용한 길로 들어섰다. 귀에 감각이 없어졌을 때 쯤이었다. 조용한 분위기에 바람 부는 소리, 간간히 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의 수다 소리도 들렸다. 바람에 흐트러진 목도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한 손은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조용한 길에서 펑펑 울었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참 가관이었을 것 같다.
뚜벅뚜벅.
조금은 묵직한 구둣소리가 들려왔다. 목도리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불빛이 무드있게 느껴졌다. 동시에 심장이 마구 뛰어댔다.
"......."
조금은 굳은 표정. 입김이 공기중에 흩어지기를 몇 번. 어느새 주머니에서 나온 손은 손톱을 가만두지 못하고 작게 톡톡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 바라만 보고있었다. 추워서 빨개진 코가 보였고 도톰한 입술이 보였다. 우연의 일치일 것이 분명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옷을 입은 그가 보여서 눈이 많이 흔들렸다.
"....잘 지냈어?"
"응..."
손톱끼리 부딪히는 행동을 멈추고 질문에 답했다. 잘 지냈냐고 물어왔다. 오랜만에 듣는 그 만의 나긋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콕콕 바람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어디 갔다와?"
".......태형이 가게에."
"아..."
미련하게 선을 그어버렸다. 술을 마시고 오는 길이라고 말하기 쪽팔려 태형이와 이 시간까지 있었다고 얼버부렸다.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그가 후회하고 돌아왔으면 하지만 결국 이렇게 내가 돌아올 틈도 없게 만들었다. 태형이를 알고있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반응일까. 차라리 술을 마시다 집에 가는중이었다고 말하는 게 좋았을까 생각했다.
"...좋아보인다."
"응....너도."
아니다.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우린 다시 사귈 수 없다.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헤어진 순간부터 알고있었을 것이다. 살짝 보이는 눈웃음이 보기 좋았다. 우리는 또 다시 아무 말없이 한참 서로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춥다. 갈게."
"...어, 여주야."
"......"
지민이를 지나치자 그리웠던 향수 냄새가 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지민이의 말에 완전히 꽁꽁 묶여 얼어붙었다. 여주야.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르기가 아직 어색한데. 너는 잘도 부르는구나.
"태형이랑 너, 보기 좋아."
"......."
"미안. 괜히 오지랖이었나. 이제 진짜 갈게."
"....."
"다음에 만나자."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한 번도 멈칫하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찬 바람때문에 식은 눈물이 나를 더 춥게 만들었다. 얼굴이 얼 것만 같았다. 차가운 손으로 눈물 계속 닦고 있자니 또 나와 크기가 비슷했던 따뜻한 손이 생각났다. 자리에 쪼그려앉아 울었다. 눈물을 닦던 손은 목도리를 꼭 쥐었고 언젠가부터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휴대폰도 울렸다. 김태형. 왠지 이름을 보는 순간 더 서러워져서 크게 울어버렸다. 휴대폰 액정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이름이 번져보였다.
"흐으....아...아.."
나는 이렇게 또. 쪽팔리는 짓을 하고 있었다.
***
지민의 귀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로등 불빛이 새어들어오는 좁은 골목에 서있던 지민은 땅을 쳐다보며 구두끼리를 부딫혀댔다. 아직은 무리였을까 여주에겐. 오해도 없이 헤어져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서로 힘들어서, 지쳐서 헤어졌다. 그 뿐이었다. 지민은 여주가 보고싶었다. 왜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별 다른 답은 나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여주를 잊지 못했구나.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자 지민의 눈도 크게 일렁였다. 지민의 구두에 눈이 떨어졌다. 오늘 춥더니, 눈이 오는구나. 서럽게 울고 있을 여주가 생각난 지민은 이어서 추울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지민의 구두에 톡 소리를 내며 눈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