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와 편의점 알바생의 상관관계
04
10시가 넘어간 밤공기는 더없이 추웠다. 깜깜해진 거리를 조금은 휘청거리며 걸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줄곧 땅만 바라보며 복잡해진 머릿 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촬영 분량을 모두 끝내고 커피를 드리며 인사를 드렸을 때, 무시하며 지나가던 스태프들의 그 표정과,
회사로 불려가 실장님에게 들었던-감독님이 다시는 너 자기 작품에 내보낼 생각 없다더라. 이번 드라마도 겨우 받아낸 거였는데. 제발 너 자신 관리 좀 하자, 응?- 수많은 잔소리들.
그래도 아침에 그 남자 말 하나만 믿고 어느때보다 열심히 했는데.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괜스레 눈을 흘겼다. 허탈함과 섭섭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몇 걸음 걷다 바닥에 잔잔히 퍼진 불빛에 술기운 때문에 열이 오른 얼굴을 들어올렸다. 저 멀리 편의점에서 나와 문을 닫고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반가움과 함께 여러 감정이 뒤섞여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저기요."
그 남자를 불러버렸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약간 흐릿해 보였다. 그대로 달려가 남자의 앞에 멈춰섰다.
"저 오늘,"
"......"
"그쪽 말 듣고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유일하게 나를 살갑게 대해주던 남자가 앞에 있어서 그런 듯 싶었다. 울면 안되는데. 속으로는 울컥하는 마음을 눌러참으면서도 이미 눈물은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 진짜, 진짜... 오늘은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
"사람들한테 미움만 받았어."
결국 크게 울음이 터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나와 눈을 맞추며 내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그 모습때문인건지, 내 자신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골목길엔 내 울음 소리로 가득 찼다. 오늘 하루, 어쩌면 이때동안 참아왔던 서러움이 터진 것 같았다.
끅끅거리며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찰나, 남자가 손을 들어올리더니 소매로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 오로지 시선은 나에게 향해있었다.
"왜 이렇게 미움만 받았을까, 예쁜데."
"........."
"많이 속상했겠네요."
코 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조곤조곤 달래는 투에 펑펑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도 나 무시하고- 라는 말로 시작해 억울했던 오늘 하루를 말하느라 애를 썼다.
내가 말할때까지 남자는 아무 미동 없이 내 말을 들어주었다. 어쩌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것도 같았다.
진짜 왜 나한테만 그래. 한참만에야 끝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창피함이 조금씩 밀려왔다. 눈화장 다 지워졌을라나.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얼굴 빨개질 필요 없는데."
"...죄송해요."
"저한테 사과할 이유도 없구요."
얼떨결에 이 늦은 시간까지 붙잡고 신세한탄이나 했다는 생각에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는 전혀 개의치않고 입고있던 후드집업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고는 뭐, 얇게 입은건 조금 속상하네요- 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 걱정에 괜찮아요- 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내가 안괜찮아요-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렇게 계속 서있기만 할거예요? 라고 물어보며 집으로 가자는 고갯짓을 했다.
그 남자와 함께 얼마 안되는 거리를 발맞춰 걸었다. 괜한 어색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남자 또한 조용했다.
계단을 올라 집 앞에 섰다.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돌아서려던 참이었다. 연이어 계단을 올라 내 앞에 선 남자가 손 줘봐요- 라며 입을 열었다.
"네?"
"손, 내밀어보라구요."
그 말에 살짝 손을 펴 내밀었다. 남자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막대사탕과 초콜릿 여러개를 내 손에 놓아주었다. 순간 상황이 이해되지않아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건 내 선물."
"......"
"그리고 이건 내 위로."
내 머리 위로 남자의 손이 얹혔다. 남자는 내 머리를 두어번 톡- 톡- 쓰다듬어주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뻘쭘해진 마음에 눈을 굴렸다. 그러다 급히 어깨 위에 걸쳐져있던 후드집업을 집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이 이거. 말을 더듬었다. 남자가 웃음을 흘리며 받아들었다.
"오늘 진짜..죄송했구요...제가 나중에 꼭 밥사드릴게요."
"그럼 우리 내일 또 만날까요?"
"네?"
"전 시간 항상 많거든요."
곰곰히 생각을 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스케줄도 없으니 나 또한 시간이 많았다.
"그럼 내일 11시쯤에...어떠세요?"
"저야 좋죠."
"그럼 내일 여기서 만나요."
말을 다 끝마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멋쩍음에 남자 눈도 제대로 못마주치고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뒤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곧,
"집에 들어가서 또 울지 말구요."
"네?"
"내일 데이트 기다리고 있을게요."
남자의 목소리에 등을 돌리자 남자는 고개만 쏙 내밀고 말을 건넨 뒤 들어가버렸다. 이미 닫긴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데이트. 남자랑. 내가. 딱딱 끊어진 그 세단어를 중얼거리다 한참만에야 나도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