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이야기
01
어린아이가 이불 위에 앉아 낡은 책 한 권을 핀다.
'옛날, 한마을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산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을 동물들이 가엽게 여겨 데려가 키운다는 것, 그리고 그 동물은 세 개의 산을 각각 지배하던 늑대와 토끼와 까마귀라는 것이다. 이 소문은 사람의 입을 타고 산에 둘러싸인 큰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러다 살기 어려웠던 인간들이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산에다 어린아이를 버리는 일이 생겼다. 동물들은 며칠을 지켜보다 결국 부모가 죽었거나 아이를 찾아오지 않을 경우 아이를 물어갔다. 아이들은 동물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대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몇 세기가 지나 산속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동물의 귀와 꼬리, 날개가 있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아직 글자를 잘 몰라 고개만 갸우뚱 거리던 아이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엄마에게 총총 뛰어간다. 엄마 엄마. 아이가 엄마에게 책을 내밀면 엄마는 그 책을 받아들고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다.
"이건 엄마의 이야기이자 아빠의 이야기이고 또 너의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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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에서 한 소녀가 더더 깊은 숲 속을 향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쫓아오는 이 하나 없지만 소녀는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있다. 윽. 차가운 공기에 점점 목이 아파오고 숨이 가파 지기 시작할 때쯤 땅 위로 올라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발목이 꺾여 살짝 부어올랐고 무릎이 돌에 찍혀 피가 흘렀다. 아프다고 눈을 찡그리거나 소리를 지를 법도 한데 작은 신음소리만 내뱉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다시 일어나 걸었다. 해가 지고 있던 하늘은 어느새 깜깜한 어둠이 되었고 이젠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소녀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물소리가 좋고 햇살이 좋은 자리에서 소녀가 눈을 떴다. 꼬박 하루를 넘기고 이튿날 아침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무릎에 이상한 풀이 갈아져 붙어 있었고 부어오른 발목은 붕대라기엔 좀 허접한 천이 칭칭 감겨있었다. 소녀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고 근처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힘들게 일어나 그곳으로 걸어갔다. 나무 몇 그루를 지나니 강이 흐르고 있었고 물속에서 쫄딱 젖은 채 서 있는 소년이 있었다. 소녀는 나무 뒤에 숨어 그 소년을 지켜보았다. 가만히 서 있다가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물속으로 손을 뻗기를 여러 번 와아- 갑자기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소녀는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고 손에 잡혀있던 물고기를 육지로 던지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물고기는 돌 위에서 파닥거렸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흐르던 정적을 깨는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얼굴까지 빨개져 딸꾹질을 하던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 가만히 서 있다 급히 물속에서 나와 물고기를 들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놀란 소녀가 뒷걸음을 치자 소년은 멈춰 서 한 걸음 뒤로 떨어졌다.
"이거 먹을래?"
잠깐 망설이던 소년은 물고기를 내밀었다. 배가 고팠던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소년은 기뻐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녀에게 뛰어가 물고기를 건넸다. 소녀는 아직 팔딱이고 있는 물고기를 보며 당황스러워했고 소년은 그 마음도 모른 채 세상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구워 먹어야 하지 않을까."
소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소년은 이해하지 못 한 표정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두리번거리며 나뭇가지들을 주웠고 소년은 멀뚱멀뚱 서 있다 소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참을 찾던 소녀는 한 품 가득 나뭇가지를 주웠고 고개를 들고 보니 처음 눈을 떴던 그곳이었다. 소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나뭇가지를 쌓았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찾았다. 한참 손을 더듬거리던 소녀는 뭔가 잘못된 표정을 지었고 고개를 들어 여전히 물고기를 들고 서 있는 소년을 보았다.
"내가 있던 곳에 데려다줘."
소년은 영문도 모른 채 근처 바위 위에 물고기를 내려놓고 소녀를 안내했다. 소녀는 소년의 뒤를 따라가면서 계속 바닥을 살폈다.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숲 속에서 이렇게 먼 거리를 나를 데리고 걸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텅 빈속에 혹여 꼬르륵 소리라도 날까 배를 부여잡고 따라갔지만 소년이 안내한 곳에 도착해서도 소녀가 찾던 것을 찾지 못 했다. 소녀는 머리에 손을 짚고 생각하다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떴을 때 땅 위로 나온 큰 나무뿌리가 보였고 그 옆에 소녀가 찾던 것이 있는지 몇 시간만에 미소를 보이며 그것을 주우러 뛰어갔다. 소녀가 소년을 향해 웃으며 손에 들고 흔드는 그것은 작은 라이터였다. 소녀가 이것을 왜 찾아다녔는지는 소녀만이 아는 이유지만 소년은 이유는 커녕 라이터가 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꼬르륵. 찾았다는 기쁨과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소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얼굴이 붉어진 소녀는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흠흠, 빨리 돌아가자."
민망함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소년을 지나쳤다. 빠르게 걷던 소녀는 울퉁불퉁한 돌을 잘못 밟아 비틀거렸고 다행히 넘어지기 전에 소년이 잡아주었다. 고마워. 다시 발을 똑바로 내디뎠는데 발이 바닥에 닫지 않고 몸이 붕 떴다. 소년이 소녀를 안아들었다. 소녀는 무거우니 내려달라며 발버둥 쳤다.
"하나도 안 무거워."
장난기 없는 얼굴로 툭 내뱉고는 그대로 숲 속을 달렸다. 소녀는 너무 빠른 속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머리 위를 지나는 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얼굴이 얼 정도로 차가운데 소년에게 닿는 모든 곳은 햇살만큼이나 따뜻했다. 두 사람이 걸어온 시간의 반도 안 지나 아까 그 장소에 도착했다. 소녀는 갑자기 멈춰 선 소년에 두 눈을 느리게 떴고 소년은 소녀를 내려 주었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녀를 놀라게 한 건 벌써 도착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소년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불쑥 나타난 뾰족한 귀와 소년의 뒤에서 살랑거리고 있는 털이 풍성한 꼬리일 것이다. 뒤늦게 알아차린 소년이 눈을 질끈 감고 힘을 주는 포즈를 취하면 귀와 꼬리가 스르륵 사라졌다. 더 놀라운 관경에 소녀는 완전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너, 너 대체 뭐야. 소녀는 말까지 더듬었다.
"난 호야."
호? 소녀는 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결심이라도 한 듯 두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다시 귀와 꼬리가 나타났다.
"호(狐). 나는 여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