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한 음악이 흘렀다. 붉은색 타일 위로 놀아나는 여러 개의 발이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 사납게 움직인다. 바(Bar) 쪽으로 걸음을 옮긴 우현이 의자를 뒤로 빼며 재킷 단추를 풀었다. 블랙 러시안. 입에서 튀어나간 주문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잠잠한 바텐더에 의자에 옷을 걸쳐둔 우현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요.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 손가락을 뻗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자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우현을 향한다. 조명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는 불그스름한 머리칼. 블랙 러시안 하나. 무대 위를 향하던 시선은 제게로 옮긴 것이 분명한데, 턱을 괸 손을 사뭇 풀러 내리지 않은 성규가 빙긋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그제야 테이블 위로 엎어지듯 나른한 기지개를 켠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서 못 들었는데, 뭐 주문했지?”
“블랙 러시안이요.”
말끝마다 거슬리는 반말을 딱히 지적하고 싶지는 않아 가만히 있었더니 내내 반말이다. 데려다 줘야 하는 몸이 있는지라, 거하게 취할 순 없어 칵테일을 주문했더니 우습다는 듯 한 저 표정도 짜증나고.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들지 않는 바텐더를 위아래로 훑던 우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쿵, 쿵 울려대는 음악과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땀에 젖은 얼굴이 익숙하다. 제 몫으로 내어진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킨 우현이 잔을 내려놓자마자 성규의 입이 열린다.
“아는 여자구나?”
“…….”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의 우현을 힐끔 쳐다본 성규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척하면 뻑이지. 결혼할 여자라도 되나 봐? 금세 또다시 뒤바뀐 우현의 표정. 어? 방금껀 긴가민가했는데. 맞췄나 보네. 피할 틈도 없이 코앞까지 다가온 성규의 얼굴에 눈만 끔뻑이는 우현과 그런 우현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성규의 얼굴 사이로 푸르스름한 잔이 불쑥 끼어든다. 자, 이건 서비스야. 언제 준비했는지 데코까지 완성 되어있는 잔. 떨떠름하게 받아든 잔을 차마 단숨에 마시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으니 다시 빼앗아 간 성규가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며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두었다. 성규의 움직임만 쫓던 우현이 제 눈앞에 피워진 불꽃을 보며 비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별로야? 여자들한텐 인기 짱인데. 뚱한 표정의 성규가 의자를 끌어다 우현의 앞에 앉았다.
“몇 살?”
“저기, 근데 왜 아까부터 반말질입니까?”
푸시시 소리를 내며 사그라지는 불. 영롱한 파란빛을 여전히 내뿜는 칵테일 잔의 표면을 쓸어내리자 성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불만이면 너도 놔. 다트 판 앞에서 다트에 열중인 남자무리를 흥미 없이 곁눈짓하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가려구? 부스스한 빨간 머리가 눈앞에서 자꾸만 어른거린다. 눈을 감고 미간을 꾹꾹 주무른 우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여자 아까 룸잡아서 들어갔어.”
이어지는 성규의 말에 홱 뒤를 돈 우현이 눈썹을 밀어 올리자 성규가 어깨를 으쓱였다. 말해달라고 한 적. 없잖아? 신경질적으로 옷을 잡아채 든 우현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출구로 모습을 감추자, 성규가 끝내 비워지지 못하고 여전히 그득 채워진 푸른색의 칵테일 잔을 집어 들었다. 톡 쏘는 뜨거움이 목구멍을 타고 사라진다. 아쉽다. 입맛을 다셨다.
Bloody Romance
W.DKN
A.
“그땐 왜 먼저 갔어요?”
“피곤해서요.”
정아가 창문에 팔을 기대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오늘도 굳이 데리러 올 필요는 없었는데. 말없이 운전하던 우현이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턱을 매만졌다. 나도 딱히 오고 싶진 않았어요. 무미건조한 우현의 반응에 결국 화가 났는지 안전벨트를 풀러 내린 정아가 낮은 목소리로 내려달라 말했다. 내 말 안 들려요? 내려달라구요. 결국 갓길로 거칠게 차를 세운 우현이 정아에게 시선을 돌린다. 뭐가 불만인데?
“애초에 우리사이는 철저히 계약된 사이 아닌가?”
“반말 하지 마요.”
“불만이면 너도 놓던가.”
불만이면 너도 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며칠 전 바텐더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흐트러진 우현의 표정을 보며 여자가 불쾌해 보이던 표정을 싹 지운 채 입 꼬리에 웃음을 걸었다. 적어도 지킬 건 지키자구요, 우리.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요, 우현씨. 여자의 클러치가 창문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복잡한 심정에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 우현이 입을 뗐다. 지킬 건 지키되, 서로는 건들지 말지?
“내가 언제 건드렸는데요?”
“매번.”
아니야? 우현의 말에 굳게 입을 다문 정아가 문고리를 거세게 붙잡았다. 더 이상 말해봤자 입만 아프겠네요. 여기서 내려줘요. 알아서 갈 수 있으니까. 철컹, 대답도 없이 열린 문에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차 내부로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린 차창에 희미하게 켜져있던 불마저 틱, 꺼져버린다.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다. 세게 내려친 손에 클락션 소리가 듣기 싫게 울렸다. 꼭 제 마음처럼.
“이야, 손님 많네?”
갑작스레 등장한 재규에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성규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다. 여전하구나? 잭 다니엘로 하나. 의자를 빙글, 빙글 돌리며 장난을 치던 재규가 방금 전까지 성규가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옮긴다. 손을 뻗으려는 찰나, 제 앞에 놓이는 잔에 금세 손을 거둔 재규가 책이 아닌, 잔 위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성규의 손을 잡아채어 억지로 입술을 부딪쳤다. 붉게 물든 머리칼이 헤집어지며 좋은 향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안주가 없네.”
“갖다 줄게. 기다려.”
제 눈앞에서 벗어나려는 성규의 손목을 잡아 챈 재규가 재빨리 술잔을 들어 성규의 위로 쏟아 부었다. 필요 없어. 병 입구에서 흘러나온 술이 어깨를 적셔 보드라운 팔을 타고 뚝, 뚝 흘러내렸다. 오늘 안주는 너거든.
“니 피냄새가 요새 들어 더 진하게 풍겨 와.”
“…….”
“도저히 안 찾아올 수가 없더라구.”
이불 속에 파묻힌 하얀 살결을 따라 뜨거운 입술로 가볍게 키스한 재규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올렸다. 알아. 올 줄 알고 있었어. 흡족한 미소를 띤 재규가 성규의 젖은 와이셔츠 단추를 풀러 내리며 천천히 배, 가슴, 목 순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른 배에 혀를 내어 아래에서 위로 핥아 올리던 재규가 스믈스믈 위로 올라가며 성규의 쇄골에 이를 박았다. 성규의 잇새로 짓눌린 입술이 하얗게 질린다. 몸에서 풍기는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에 대지도 않은 술을 잔뜩 들이킨 것 마냥 축 늘어진 몸이 거칠거칠한 이불에 이리저리 긁힌다. 눈을 감았다. 온 몸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는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규의 입술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살덩이와 혈흔. 방 안을 채우고도 남을 듯 한 검붉은 피. 너무나도 명백한 성규, 자신의 피. 그제야 성규가 재규의 몸을 밀쳐냈다.
“섹스라면 나도 오케이야. 하지만 내 피는 안 돼.”
“…….”
노곤한 몸을 이끌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성규가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 하나를 집어 물었다. 필터 끝을 입술에 물고 불을 켜 한 모금을 진득이 빨아내자, 잔뜩 취해있던 공기가 금세 탁한 담배연기로 뒤바뀐다. 언제부터 그렇게 비싸졌어? 김성규. 성큼성큼 걸어와 성규의 와이셔츠를 뜯어내다시피 벗겨낸 재규가 말없이 성규의 흐린 초점 위로 시선을 두었다. 네 주인 지금, 빡! 돌았다고. 재규의 눈이 금세 혼탁해지더니 붉은 빛을 내뿜으며 흉측한 본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핏덩이 같은 눈동자 속에 담긴 제 모습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던 성규가 재규의 얼굴위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분명히 말했어. 지난번에도 그랬지.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말라구.
“분명히 한번쯤은 무시할 줄 알았어.”
“…….”
“두 번은, 없어.”
당신은 내 예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어. 우두커니 선 재규를 지나치며 엄포를 놓았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거야. 찾아오지 마. 순식간에 사그라진 열기에 방 안이 춥게만 느껴졌다. 재규가 뜯어놓은 와이셔츠 덕에 활짝 벌려진 속살. 쇄골과 어깻죽지 사이, 중간지점 즈음 되는 목덜미에 선명히 남겨진 자국.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치는 성규의 붉은 머리칼이 넘실거렸다.
Say_
아마 다음편은 좀 늦게 들고오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도 반갑게 맞아주세요 :D 첫화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