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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일세 전체글ll조회 483l 1

전 백작부인이 전 남편과 낳은 아이. 백작은 키우기를 거부했으나 보듬어 키우라는 전대 백작의 유언에 정 없이 키운 계집. 그게 집안에서의 나의 모습이었다.

백작에게서도, 새로 들어온 백작부인에게서도, 심지어 사용인에게서도 사랑은커녕 호의도 받지 못한 나의 유년은 끔찍했다.

내가 글을 익힌 것은 11살의 봄이었다. 백작에게는 백작 부인과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내 인생의 빛이자 작은 행복이었다. 그는 내게 너무도 다정했다. 그 아이 덕에 나는 한글이며 일어며, 온갖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누나! 같이 공부해요.”

“누나, 나와 꽃놀이 가요. 응?”

누나, 누나. 유키오는 항상 내게 환히 웃으며 애정을 갈구했다. 나의 소심한 대꾸와 기죽은 표정에도 유키오는 내 팔짱을 끼며 웃었다. 누나는 참 착해. 누나는 참 다정해.

 

그 아이의 환한 웃음이면 가정교사는 선뜻 우리 둘을 가르쳤고, 내게도 화려한 외출이 주어졌다.

 

그게 내겐 오히려 하녀가 아가씨가 된 것만 같은 불편함을 준다는 것을 유키오는 몰랐다. 그와 놀다가 그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상하거나, 조금의 상처를 입는 날에, 내가 백작에게 불려간다는 것을, 유키오는 몰랐다. 그와 함께하는 날이면 열에 아홉은 매 맞은 다리가 아파 잠들지 못한다는 것조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가에서 내게 유일하게 정을 주는 유키오가 나는 참 좋았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누나, 누나는 왜 항상 이렇게 차분한 색으로만 입어요? 나는 밝은 색이 좋던데.”

유키오는 내게 이런 말을 하며 곧잘 밝은 색의 옷가지들을 선물하고는 했다. 나와는 안 어울리는 붉은 원피스라던가, 노란색 카디건과 같은. 창백한 얼굴을 띈 내게는 무채색과 어두운 색이 어울렸다.

하지만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긋이 나를 쳐다보는 유키오 때문에.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매일 입어요. 응?”

 

그는 손을 꼼지락대며 자신이 선물한 카디건의 끝자락이 닳을 듯이 매만졌다. 내 얼굴을 한 번 흘낏 보고, 침을 꿀꺽 삼키며 허공을 쳐다보고. 그럴 때면 나는 그가 참을 수 없이 쓰다듬고 싶어져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유키오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해가 갈수록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밤을 샜고, 혼자 방 안에서 밥을 먹으며 공부했고, 목욕하면서도 영어 단어를 읊었다. 그게 나의 구명줄이었다. 이 집안을 나가, 나 혼자 살자. 외국에 나가버리자. 유키오와만 따로 연락하고, 이 지긋지긋한 집을 나가자.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유키오는 내가 공부에 열중하는 이유에 대해 항상 궁금해 했다.

 

“누나는 왜 그렇게 공부를 해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혹시나 유키오가 떼를 쓰며 나를 붙잡아 놓을까 봐, 항상 이렇게 대답하곤 했건만.

성인이 된 날, 유키오는 갑작스럽게 방에 들어와 미성년자인 주제에 내게 술을 건넸다. 말씀드릴 것이 있다며 아버지 방에 들어가더니, 혼이 단단히 났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나는 약간 잔소리를 하며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

유키오는 그런 내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누나, 누나는 나 좋아요?”

“널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니.”

 

평소 같으면 환히 웃었을 내 답변에 유키오는 묵묵히 잔에 술을 따를 뿐이었다.

그날따라 유키오는 말이 없었다. 나 혼자 서양은 이렇다더라, 가지에 초록빛이 돌더라 하는 말만 주절거렸다. 사용인들도 조용해진 야심한 시각, 나는 계속 들어간 술에 어질어질했다.

그 때 조용히 끄덕거리기만 하던 유키오가 물었다.

 

“누나는 왜 그렇게 공부를 해요?”

“······나는 이 개 같은 집안을 나갈 거야.”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나를 두고?”

“이 얘기는 그만하자.”

“나를, 여기, 두고?”

“이 집안에 있다는 건, 내게 악몽이야. 미안해, 유키오.”

 

유키오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왜인지 모르게 이 대화는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도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실수했음을 깨달았으나 그 이전에 내 방의 모든 서적은 집구석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타오르는 서적들, 그 많은 책들을 보며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때,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내가 왜 서적들을 태웠을까.”

“······이 집을, 떠나려고 해서요.”

“내가 널 왜 키웠는지 아니.”

“유언 때문인 거 압니다.”

“아니다. 너도 보지 않았니, 주위 아가씨들이 결혼하는 걸. 사랑이 있더냐. 무슨 이유더냐.”

“······권력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네 유학비용을 치룰 마음도, 지금까지 널 키운 공이 무너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 겐지 쪽이 내가 진행하는 박물관 사업에 큰돈을 대었다.”

“······.”

“그 집 아들이 다리병신이라는 구나. 너도 알겠지, 절름발이 켄토. 그 치가 결혼 상대자를 구한 지 1년이 넘어갔는데도 못 구했다더군.”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백작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켄토와 결혼하라는 것임에 분명했다.

절름발이 켄토, 그는 겐지의 수치였고, 부족한 자신의 몸도 큰 결함이 될 판에 패악까지 부리기로 유명했다. 친일파 집안을 벗어나겠다고, 지긋지긋한 백작 가를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친 지난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분했다.

그러나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식은 두 달 뒤다. 유키오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유키오를 가급적이면 만나지도 말고. 아마 만나기도 힘들 거다. 내일 아침, 유키오는 도쿄 유학을 가기로 했으니까.”

“······왜, 인가요.”

“유키오는 어리다. 그는 아직 감정을 구별하기엔 어려. 너무도.”

“언제 오나요, 유키오는.”

“반년은 지나야 올 거다. 미안하지만, 네 결혼식에 참석하기는 힘들 거다.”

 

유키오의 감정이 어떠한 건지, 알 수도, 궁금하지도 않았으나 내게 유키오를 피할 명분이 생겼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나의 서적이 불살라진 것은 전적으로 유키오의 탓이었기에 그와 대면한다면 손찌검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선 유키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며칠 밤을 뒤척일 것이다.

백작은 새로운 사용인을 내게 붙였다. 하녀 하나와 하인 하나. 사용인들이 번갈아 들어오던 내 방에 고정된 하인이 생겼다는 것은 그저 겐지 가에 보여주는 다정한 아비 흉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새로 온 하녀는 예상대로 뺀질거렸다. 만만한 아가씨, 동떨어진 방. 하녀는 늘 멀대같은 주방 보조와 놀기 바빴고, 아침 단장과 가끔의 방 청소만 도울 뿐이었다. 하지만 하인은 달랐다.

 

하녀가 귓속말하기로, 그는 뒷골목 창녀촌에서 방 청소와 구두닦이를 하며 근근이 밥을 먹었고,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한 천치라고 했다. 부모 이름도 모르며, 글자도 읽고 쓸 줄 모르고, 일본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고. 그래서일까, 그는 처음부터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말을 더듬었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아, 아, 안녕하세요, 하, 하루토입니다, 아가씨······.”

“왜 그렇게 떠니.”

“······예뻐서요.”

 

그는 정말 어리숙했다. 가끔은 하녀 대신 청소를 한답시고 여기저기를 닦다가 유리병을 깨고, 편지를 구별하라고 말하면 창피하다는 것을 역력히 티내면서 저, 읽지 못해요. 하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구석에서 나를 쳐다보았다.

바보같이 성실한 이. 그리고 바보같이······, 순수한 이.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자, 잘자요. 아가씨. 내일 또 봐요."

“아가씨는 왜 그렇게 집 안에만 있어요. 저, 같이······, 외출, 이라도.”

“아가씨, 그림이 참 곱습니다.”

“아, 아가씨. 그렇게 차려입으시니까, 너, 너무 아름······, 아름다워요.”

 

그런 그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와 함께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나는 그가 머리를 빗겨주는 오후만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의 붉어진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일본에서 살았니.”

“아뇨, 저는 부산에서 살았어요.”

“사투리 하나 없구나. 원래 이름은?”

“······말해도 돼요?”

“비밀로 하자. 응?”

"박지민이요. 박, 지민."

“그렇구나. 예쁘다.”

 

그 때 즈음, 켄토에게서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만나자고. 한 번 얘기하자고.

켄토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지민이 일본어를 읽지 못한다는 게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물론 지민은 나와 켄토가 곧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 주제에 관해 지민과 이야기하지 않았다.

 

켄토와 나는 몇 통의 형식적인 편지를 주고받았다. 오가는 편지를 백작이 확인한다는 것은 당연했다. 차가운 문장들이 그와 나 사이를 몇 번 지나자, 식 날짜가 정해졌다. 5월 이었다.

 

“5월의 신부라······.”

“예? 5월요?”

“아무것도 아냐. 나, 오늘 약속 있는 거 알지.”

“네. 켄토 겐지 도련님 만나신다고.”

“······아는구나.”

“그, 김희숙이, 오늘 제일 예쁘게 꾸며야 한다고 해서.”

“아아.”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지민이 물끄럼이 나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사쿠라, 본명은 김희숙인 하녀는 나의 치장을 제일 좋아했다. 희숙이 들뜬 얼굴로 침대 위에 예쁜 옷가지들을 내던졌다. 아주 오랫동안 치장을 하던 희숙이 마차를 확인하겠다며 밖으로 달려갔다.

나는 한참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약혼자를 만나러 가는 여자가 우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때, 거울을 통해 지민이 보였다.

 

“예쁘니?”

“예. 벚꽃 같아요."

“얘도, 참. 그러면 뭐할까. 좋아하지도 않는 인데.”

“······아가씨는, 다른 사람이 아가씨를 좋아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받겠지.”

“결혼은요.”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내가 뒤를 돌아 지민을 보았다. 지민의 눈이 잔뜩 흔들렸다. 만약 그게 지민이라면.

 

“난······.”

 

그 때 백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냉정하게 서적들을 불태우는 모습에서, 유년기의 기억까지도. 그가 유키오의 유모를 마구 매질하는 모습, 허리를 살짝 들고 인사한 하인의 뺨을 몇 번이고 갈겨 피를 토하게 했던 모습, 아끼던 첩이 백작 부인의 반지에 손을 대자 서열을 어겼다며 돈 한 푼도 주지 않고 내쫓던 모습. 내가 도망가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했다.

 

“나는, 그래도 결혼해야 해. 알잖아, 너도.”

 

지민이 묵묵히 등 뒤에서 머리칼을 빗었다. 그 때 희숙이 들어와 마차가 당도했다며 방방 뛰었다. 지민과의 침묵이 버거워 나는 빠른 걸음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기대어 앉았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지민이었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여기 있네요."

“네가 여기는 왜.”

“브로치를 놓고 가셔서요.”

 

아까 분명 거울 속에서 빛나던 브로치가 그의 손 안에 있었다. 언제 떨어진 걸까.

브로치를 받으려던 그 때 지민이 내 손을 피했다. 그러곤 가슴께에 브로치를 달았다. 닿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브로치를 달고서도 한참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당혹스러워 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만 내려.”

 

[전정국/박지민] 백작가(1) | 인스티즈

 

“사랑해.”

 

낮게 울린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지민이 살풋, 애달프게 웃더니 마차에서 내렸다.

 잘 다녀와요.

 마차는 출발했고, 나는 창을 통해 등을 돌리고 선 그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

 

 

 

*

원래는 배우로 구상하고 (태어나 처음으로)찐 글인데 하루토 캐릭터가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지민이길래 갈아엎었습니다ㅋㅋ

정국이도 어울리고지민이도 어울려서 대만족입니다ㅎㅎ

사실 아버지는 안넣으려고 했어요. 너무 휑해서 이정재님 짤 넣었는데 지금 3. 백작(이정재) 추가할까 고민중이에요ㅋㅋㅋ

켄토는 쓰려다가 힘에 부쳐서.. 흑흑.. 켄토는 병약한 미소년이지만 성깔있고 집착 심한 역할로 구상하고 있어요.

남준이랑 윤기도 넣으려고 했는데 과욕일 것 같습니다..ㅎㅎ... 더 캐릭터 늘리면 제가 죽을 듯 해요.. 아무튼 고3인 관계로 자주 오진 못하겠지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고르기글이라기보단 소설인 것 같아서 소설로 변경했어요! 아참 암호닉 어떻게 해야할 지 처음이라 잘 모르겠더라구요ㅠㅠ 접기 기능.. 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알아보고 암호닉 올릴게요ㅎㅎ 감사합니다!!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비회원196.74
[땅위]로 암호닉 신청가능할가요? 글 몰입감이 최고인거같아요! 캐릭터설정도 좋구요!1 다음 편 기다릴게요!!
7년 전
독자1
헐 뭐죠뭐죠 설정이 너무 좋아요ㅠㅠㅠㅠ 좋은 글 감사해요 다음편 꼭!!!! 와주세요 작가님ㅠㅠㅠㅠㅠ
7년 전
비회원31.73
으악 이런 스토리 너무 좋아요 작가님 ㅜㅜㅜㅜ 재미있게 봤어용!! [뀨뀨] 로 암호닉 신청되나요??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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