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만남이지. 아파트 안에서 황인준이 나왔다. 카드키를 내려놓고 머쓱하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괜히 나가는 애를 붙잡고 먼저 인사했다. 안녕. 아직까지 빨간 머리를 한 황인준 또한 나에게 인사했다.
같이 갈래? 나는 황인준의 제안을 듣고만 있었다. 집 들어가야 되는데.... 계단 위에서 황인준을 내려다 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황인준이랑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게 신기했다. 만날 놈들은 만난다, 이 말인가. 이제노는 알았을까? 자기 친구와 내가 같은 아파트라는 걸.
황인준을 따라 어색하게 걸었다. 편의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아직 정수기 설치를 안 해 1.5리터 짜리 물병을 사러 다녀야 한다고, 집에 있는 사람은 넷인데 자기 담당이 돼 불만이 많다고 했다. 어색한 둘 사이의 정적을 깨려고 황인준은 최선의 노력을 했다.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가방이 무거웠다. 가방끈이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황인준이 우유를 마시라고 건넸다. 두 손 사이에 있는 우유가 차가웠다. 품 안에 차가운 물이 들어있는 패트병을 안은 채로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깐 황인준이 얼른 먹으라고 손짓했다. 흰우유. 초등학생 때 키 크겠다고 한번에 210미리리터 짜리 우유 세 팩을 먹은 적이 있었다. 크게 배탈이 난 이후로 처음 만지는 우유팩이었다.
집 가서 마실게, 고마워. 정말 우유를 마시든지, 아니면 집에 있는 동생을 주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2 B Loved
1
W 스테
"네가... 이제노 친구니?"
"응, 맞아"
"나도 이제노 친구인데..."
나재민이야. 머리를 긁적인 나재민이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받아 쥔 황인준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뭐 하자는 거야. 스무디 빨대를 문 채로 비꼬니 나재민이 나를 째려봤다.
휴대폰을 만지던 이제노가 이제 갈까? 라며 자리 정리를 했다. 둘은 아무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참, 황인준은 까만색으로 머리를 뒤덮었다. 내일 학교에서 보면 분명 머리색이 빠져 노래질 게 뻔했다. 나재민이 그랬으니까.
그동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사실 아닌 척 하면서도 반에 전학생이 온다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그 당사자가 친구의 친구이더라도, 이미 실제로 본 사이여도.
편의점을 같이 간 이후로 황인준과 별 다른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건데, 나재민의 부탁으로 네 명이 카페에 모인 거다. 자기도 친구 얼굴 보고 싶다며 이제노의 팔을 잡고 방방댔다. 거절할 줄 모르는 이제노는 바로 다음날인 오늘, 일요일에 약속을 잡았다. 황인준 또한 그런 성격인지 부탁하니까 바로 나왔다.
학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이제노와 나는 그 둘과 떨어졌다. 황인준과 나재민이랑 멀어지자마자 나는 뒤늦게 생각이 났다. 저 둘만 두고 어떻게 갈 수 있지? 나재민의 성격이라면 금세 친해질 수 있겠지만, 삼 일 만난 황인준의 성격이 내가 파악한 대로라면 둘은 어색할 게 뻔했다. 먼저 계단을 오르던 이제노에게 말했다.
"쟤네 두고 가도 될까?"
"응, 금방 친해질 것 같은데"
인준이 그렇게 내성적인 애 아니야.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노와 같이 계단을 올랐다. 나는 셋보다 넷이 더 좋을 것 같아. 황인준이 불편하지 않다는 걸 어필하는 말이었다. 이제노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홀수는 남은 한 명이 섭섭해.
그럼 이제노와 나재민은 섭섭한 적이 있었을까? 예상일 뿐이었지만, 경험에서 나온 듯한 말투였다. 따로 섭섭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그게 애들의 배려에서 나온 결과일 거라고 생각했다. 셋 중에 혼자 여자였으니까.
갑자기 찝찝해진 마음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진짜 섭섭한 적이 있었으면 어떡하지.... 정말 미안한 마음에 두려운 것이었다.
*
등교하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황인준을 만났다. 검은색 물이 조금 빠진 머리색을 하고 있는 황인준이 머리를 매만지더니 손을 올렸다. 안녕.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게 어색해 보였다.
"헐. 누구야?"
"친구"
"누나 왕따잖아... 친구가..."
아니야. 고개를 저은 동생이 먼저 버스에 탔다. 쟤 왜 저래? 버스 타는 걸 모를 거라 생각한 내가 황인준을 챙겨 같이 버스를 탔다. 동생이 앉은 자리 앞에 나란히 선 둘은 어색하게 서 있기만 했다.
동생, 아니, 웬수 박지성이 남자친구냐고 물었다. 아닌 거 알면서 꼭 저렇게 까불어. 고개를 좌우로 젓자 아쉽다는 듯 다시 폰을 만지는 박지성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황인준은 웃음이 터졌다.
"왜?"
"아니, 너무 웃겨서"
"하나도 안 웃겨"
한숨을 쉬고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나재민 아니면 이제노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문자를 보낸 사람은 앞에 있는 박지성이었다.
박지성 [발전 가능성 100퍼ㅋ 잘생겼으니까 누나가 꼬셔봐]
이게 진짜 미쳤나. 한번 더 뒤통수를 때리려고 했을 때, 갑자기 멈추는 버스에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 중심을 잃어 황인준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급하게 황인준과 멀어졌지만 민망해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단순히 황인준과의 거리가 가까워서가 아니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민망해서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황인준에게 사과했다. 동생 때문에... 미안해. 황인준이 괜찮다고 했다.
황인준을 데리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교실에 앉아 있는 이제노 옆에 앉았고, 황인준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앞자리 의자에 앉아 뒤돌았다. 이제노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어떻게 같이 왔냐고 물었다.
"같은 아파트라서... 나오다가 만났어"
"아 맞다"
너한테 말하는 거 까먹고 있었어. 이제노의 허술함이라고 말하기도 뭐 했다.
황인준은 교실을 둘러 보더니 이제노 책상에 있는 낙서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이제노 진짜 반장이었네. 며칠 전 이제노가 수업 시간에 졸아 내가 한 낙서였다. 반장 졸지 마. 이제노는 웃으며 황인준에게 물었다. 나 반장처럼 생겼어? 황인준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재민이 등교했다.
"야 황인준~ 교무실 가자마자 쌤한테 털리겠다"
사람 보자마자 안 좋은 소리를 해. 황인준이 웃으면서 나재민과 인사했다. 주말에 둘 사이를 걱정했던 게 생각났다.
*
처음으로 셋이 아닌 넷이서 급식을 먹었다. 이제노와 나재민은 급식을 다 먹으면 바로 운동장으로 나갈 거고, 나는 평소처럼 교실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황인준은 운동에 관심이 없는지 구경만이라도 하겠다고 같이 운동장으로 나간다고 했다.
이제노와 나재민이 먼저 급식실에서 벗어나고, 황인준과 내가 뒤늦게 급식실에서 나왔다. 황인준은 길을 잘 모르는지 앞서 가려고 하다 금방 멈춰 나를 기다렸다. 같이 가자. 황인준이 같이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걸 구경하자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들은 내가 나가는 거 싫어해.
"왜?"
"구경하고 있으면 욕 먹어"
"누가 욕하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황인준이 물었다. 이제노랑 나재민 좋아하는 애들이... 운동장까지는 같이 가 줄게. 황인준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오니 벌써부터 흙먼지를 날리며 공을 차는 이제노와 나재민의 모습을 보고 금방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5교시에는 졸리고, 땀 냄새 나고.... 어쩌면 가장 열심히 뛰는 이제노와 나재민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혼자 있을 황인준이 괜히 신경 쓰였지만, 민망하면 금방 교실로 들어올 거라는 생각에 먼저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서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불편한 무리들이 현관 앞에 있었다. 그 자리에 더 있으면 괜히 신경을 건드릴 것 같아 먼저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피하려고 했는데, 굳이 자리에 있던 황지윤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벌써부터 심란했다.
"제노랑 재민이는 금세 버린 거야?"
"뭐?"
"쟤 처음 보는 앤데"
팔짱을 끼며 턱짓으로 축구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 황인준을 가리켰다. 알 바 아니잖아. 날이 선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굳어 있던 표정이 더 굳어졌다. 꼭 이렇게 한번씩 시비를 털어야 마음이 풀리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다. 시비 걸 거면 그냥 올라갈게. 그 자리에 더 있다가는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것 같았다. 이미 기분은 상한 지 오래였다. 이제노와 나재민은 그냥 친구일 뿐이었다. 나는 둘한테 별 다른 작업을 건 적이 없었고, 이성으로 생각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소속감이 강한 이제노와 나재민은 남들과 괜히 엮이는 걸 싫어할 뿐인데, 초등학생 같은 생각을 하는 황지윤이 싫었다.
이제노를 좋아하는 황지윤. 1학년 때부터 꽤 오랫동안 좋아했던 걸로 알고 있었다. 항상 이제노와 같이 다니는 나를 질투했고, 싫어했다. 초반에는 좋게 말하던 황지윤이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자 이제노가 아닌 나에게 활을 돌렸다. 나는 노력했다. 이제노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의 황지윤을 응원하고, 도와줬다. 단지 이제노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모두 내 탓으로 돌려서....
"세 명은 너도 버겁지 않아?"
"..."
"하나만 해라"
굳이 올려가려는 나를 붙잡아 하는 말이었다. 1년이 넘도록 들어온 지겨운 말에 화가 나기 직전이었다.
"야 돌았냐?"
펑. 대리석 바닥을 세게 치고 튕겨 나간 배구공이 구석으로 굴러가다 벽에 부딪혀 멈췄다. 큰 소리와 바로 자신의 옆으로 튕겨 나간 공에 당황한 황지윤이 화를 냈다. 나재민이 굳은 표정을 하고 자리를 피하려는 황지윤을 잡았다. 내가 화내기도 전에, 나재민이 먼저 화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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