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NE - Warm On A Cold Night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은 구름사이로 무겁게 걷어지고 있었다.
승철과 지수는 여러 구조의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석민은 또 다른 해커 팀원인 원우와 함께 뒷정리를 하느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모두가 잠에 빠져들고 하루중 유일하게 고요할 수 있을때 그들은 보이지 않는것을 위해 함께 고군분투했다.
'A1'. 한 명의 전직 경찰과 다섯 명의 레이서, 그리고 두 명의 해커로 이루어진 그들의 팀이다. 알파벳의 시작인 A와 숫자의 시작인 1을 합쳐 그야말로 모든것의 처음, 베스트라는 의미가 내포된 뜻으로 약 7년 전 오늘 이지훈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A1의 주 목적은 차 사업이다. 큰 그림으로 보았을때 다른 일반 자동차 사업과 다를게 없었다. 팀원중 개발자, 즉 엔지니어가 있어 새로운 차를 만들어내고 딜러를 통해 해당
차를 매매하거나 그 답례로 기업에게서 고가의 금액을 받기도 한다. 전 세계적인건 아니여도, 적어도 미국과 동유럽내에서는 익히 알려진 브랜드라고 자부할 수 있다.
지하 3층을 포함하여 총 13층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건물에는 없는게 없을 정도로 호화스럽다고 할 수 있다. 지하 1층부터 2층까지는 폐차장으로 설계되어 있고, 그들이 판매
하는 차가 차례대로 전시되어 있는 곳은 지하 3층이다. A1을 찾는 고객을 응대하는 로비는 1층에 준비되어 있다. 2층에서 13층은 전부 A1 팀원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졌
다.
야외 수영장은 가장 꼭대기인 13층에 있으며, 석민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팀 내 파티장은 11층. 2층에서 4층까지는 그들이 묵고 있는 룸이 있고, 내부는 호텔도 저리가라 할
정도의 격을 지니고 있다. 모든 층의 복도 사이사이에는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어 가끔 팀원들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귀찮아서 옷을 안입고 나갔더니 카메라가 나를 찍
고 있더라, 너무 사생활이 없는게 아니냐- 하는 것들 등. 지훈은 늘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5층은 그들의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곳이다. 앞서 말했듯, 내부는 호텔과도 같다. 리더가 직접 고용한 메이드들이 새벽부터 밤까지 음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6층에서 8층까지
는 정보국이다. 최첨단 장비를 통해 사용 가능한 위성을 끌어오면 그 어떤 곳까지도 전부 다 들여다볼수 있다. 이 쯤 되면 알 수 있듯이, 이 팀에서 해커가 필요한 이유다. 모
든 기업이 그러하듯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뺏기지 않기 위해 보안요소를 단단히 설치한다. A1도 마찬가지였다. 건물 내에 블랙박스가 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팀 원이 아
닌 사람은 쉽게 뚫을 수 없는 보안이 설치된 것이다. 총 다섯번의 인증을 거쳐야 해당 층의 출입이 가능하다. 나머지 8층 과 9층은 운동시설이, 10층은 사격장이 준비되어 있
다.
결국 그 큰 건물중에서 달랑 총 두 개의 층을 제외하면 이 건물은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비밀기지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문제가 생겼다. 덕분에 팀은 때아닌 진땀을 빼야했고 그 '문제'는 지금으로부터 나흘 전에 벌어진 일에 비롯되었다.
- 2017/04/03 AM 01:50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빼갔어. 이렇게 교묘할 수가 없는데."
새로운 디자인과 엔진을 개발하던 도중에 치트키를 해킹 당했다. 주요 파일을 모아둔 프로그램에 총 아홉개의 보안을 걸어두었는데, 누군가가 그 방어벽을 너무나도 손
쉽게 뚫어버린 것이다. 해당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원우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어떻게 막은건데. 대체 어떤 새끼가 뭘 원하고 이런짓을. 원우가 아무 미동도 없는 지훈을 흘
끔 쳐다보다 답이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훈은 그저 웃음기 없는 얼굴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다행인건 핵심 치트키는 지켜냈다는거야. 그건 너와 내 지문 없이는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거든."
지훈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후회가 됐다. 지문 인식 프로그램이 대략적으로 5억에 육박하는 고가인데다 정식으로 배포하는 회사와 프로그램 갯수도 많지 않았다. 테스트용으로 고작 몇 가지만 들여온게 잘못이였나. 돈을 더 지불해서라도 가져왔어야 했는데. 지훈은 헛웃음이 나왔다.
"해킹 패턴은 대략적으로 지수가 알아낸것 같아."
"얼핏 들었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당장은 해독이 필요한것 같던데, 네가 가서 도와줘."
"그런데 상대방 위치를 찾기가 애매해. 위성이 안잡혀. 좌표가 홍콩에도 있고, 그리스에도 있고, 또 시리아에도. 이 곳을 제외한 모든곳에 있어."
"분산작전을 쓴거야. 너무도 옛날 방식이지."
"우리를 멍청하게 본건가? 그게 더 실망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방법은 많으니까."
"그 녀석들 위치는 내가 찾을테니, 다른걸 더 봐줘."
"그래."
원우는 자켓을 챙겨 입고 대충 정리한 파일들을 손에 모았다. 그리고는 지훈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서 그 곳을 나섰다. 지훈이 오른쪽으로 넓게 트인 유리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고, 언제봐도 이 곳의 아경은 트집 잡을 곳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4일 전, 그 밤에.
2017/04/08 AM 3:55
새벽 4시. 지훈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고 이른 새벽부터 눈을 떴다. 몸 이곳저곳에 추를 달아놓은 듯한 무거운 기분에 끊임없이 피곤함이 몰려옴에도 불구하고 며칠간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잠에 들지 못했다.
이지훈, 그는 열 두살의 나이로 자신의 아버지를 여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단 둘이서 미국 시카고의 작은 동네로 이민을 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지극히 순수한 어
린 아이에서 이제는 모르고 싶은것도 꼭 알아야만 하는 지독한 어른이 되기까지 그에게 미국이라는 낯선 땅은 행복해 죽을것만 같은 천국일때도, 반대로 차라리 죽고 싶을만
큼 힘든 지옥일때도 있었다.
그가 열 여덟살이 될 무렵엔 모든 의무교육을 마치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 옆 집에 사는, 자신보다 10년은 일찍 미국으로 먼저 이민을 온 중년의 한국 남자 김명우에게 배울수
있는 기계적인 기술은 모두 배웠다. 유독 어릴적부터 워낙 물리와 계산적인 일, 고치는것을 좋아해 집에 있는 물건들중 고장이 난게 있으면 직접 뜯고 고쳐서 사용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게는 어릴적부터 유독 남들과 다른 일반과 기본을 뛰어넘는 머리와 손재주가 있었는데, 열 여섯이 되는 해에는 학교에서 아이큐를 측정한적이 있다. 지훈은 그
당시 동급생들중 최초로 176이라는 높은 수치의 아이큐를 기록했다. 어머니가 학교에서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할때, 정작 지훈은 그것에 대해 신경쓰
지 않았다. 그저 다른 집에 가만히 주차 되어있는 자동차들에만 시선을 두었을 뿐.
그가 가장 좋아했던건 바로 스포츠카였다.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볼 때면 도무지 알 수 없는 흥분감에 사로잡혀 그 어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늘 그것을 동경했고,
자신과 연결이 되길 원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국적을 미국으로 바꾸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나 면허 습득이였다. 그 다음은 사격을 완벽히 이해하는 작업. 명우가 생각보다
많은것을 보여주고 알려준 탓에 지훈은 이미 암암리로 수준급 사격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원거리와 장거리는 일도 아니었고 이동하는 물체를 맞추는건 꽤 쉬운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빼어난 머리를 가진 그가 하버드 대학이라도 가기를 바랐지만 지훈의 꿈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그녀가 아들의 진학을 고민할때 그 아들은 다 쓴 탄피를 갈아 끼
우고 자동차 바퀴가 헛도는걸 관찰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될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게 스무살이 될때까지 5년을 명우의 밑에서 배웠다. 레이싱 경기가 펼쳐지는 날이면 명우는 꼭 두 장의 표를 구했다. 하나는 제것, 그리고 하나는 지훈의 것. 두 사람은 틈
만 나면 레이싱 경기를 보러 가거나, 동네에 있는 나름 큰 사격장이나 미니 야구장에 들러 게임을 하는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마치 가족과도 같았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
치고 지훈의 삶은 굉장히 평범했다. 오히려 그게 좋았다.
어느 날 명우의 아들이 미국에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와이프와 10년 전 이혼을 해서 떨어져 살았는데, 슬하에 아들 한 명이 있지만 이혼한 뒤로 본적도,
목소리를 들은적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절대로 자신을 찾으려 미국에 올 일조차 없을거라고 했다. 아들의 나이가 다섯 살일때 헤어졌으니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할거라 했는
데. 무언가 불편한 가족사가 있어보였다.
명우가 그의 아들을 공항에서 무사히 픽업했는지 차에 태워 데려오는게 보였다. 지훈은 자신의 집 안 창문으로, 두 사람의 어색한 대면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분명 오는 길에
아무말도 못했을것이다. 딱딱한 분위기와 허전한 공기속에서 서로는 할 말을 어렵사리 만들어냈겠지.
차가 움직임을 멈추자 조수석에서 한 사내가 내렸다. 그의 아들이였다. 꽤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다. 얼굴도 제법 생긴게 한국에서 무척 인기 있었을것 같았
다. 지훈은 유심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명우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 뒤로 두 부자는 생각보다 잘 지내는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지훈은 명우의 집에 편하게 갈 수 없었고, 괜히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조금은 외로워진 지훈이 혼자서 기
분전환을 할 겸 사격장으로 가던 길이였다. 그때, 지훈은 그의 아들과 처음 만났다.
'아, 제발 말 좀 들어라. 왜 이러는거야..'
명우의 아들이 그의 차 내부를 건들고 있었다. 그가 뜨거운 태양빛을 오래도록 받은 탓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얼마 전 누군가 잘못 세워 둔 콘크리트에 부딪혀 떨어져 나갔던 범퍼를 새로 고쳤는데, 그 범퍼가 다시금 뜯겨져 나가있었고 바닥에는 수많은 공구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아마 아들이 아버지의 차를 몰고 나갔다가 사고를 치고 들어온 듯 보였다. 지훈은 그걸 보고 무시하고 지나가려다 괜히 시선이 가기에 그의 행동을 천천히 살펴보며 앞서 걸었다.
'...난 이제 죽었네.'
그는 지훈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괜히 땅바닥에 엎드려 범퍼를 쳐다보다가 일어나서 한숨을 쉬기를 반복했다. 흰 티에 청바지를 입었지만 티셔츠는 얼룩덜룩해지고 청바지
는 바지 밑단이 반쯤 찢어져있었다. 아버지에게 죽었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또 한숨을 쉰다. 힘없이 쥔 공구를 바닥에 던졌다. 지훈은 이미 멀리서도 저 상황의 문제가 무
엇인지, 그리고 답이 무엇인지 보였다. 그건 그렇게 하는게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괜한 오지랖이 발동한다.
'밑에 나사가 빠진것 같은데.'
명우의 아들이 놀라서 뒤를 바라보았다. 지훈이 고개로 '그거.' 라며 말하자 사내는 얼이 빠진 얼굴로 물음표를 열 개쯤 자아냈고, 결국 지훈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에게 성큼성
큼 다가가 손가락으로 범퍼 밑 작은 홈을 가리켰다.
'아마 이 나사 사이즈가 안맞아서 그런것 같은데. 다른거랑 한 번 바꿔서 끼워볼래요?'
'...어..가지고 있는게 이것 뿐이라서.'
'아닐텐데.'
'...예?'
'잠시만 기다려요.'
지훈이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머리를 한 번 털며 자신의 집으로 뛰어갔다. 바로 옆 집이라 2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명우의 아들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서 지금 이건 무
슨 상황일까 라는 생각을 그 짧은 찰나에 수없이 반복했다. 이 동네에 나같은 한국인이 있었어? 그것도 내 또래인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지금 내가 뭘 하려는건지는 대체 어떻게 안거지? 뭘까, 저 사람.
'여기요.'
어느덧 그의 곁에 빠르게 달려온 지훈이 자신의 집에서 큰 공구와 볼트 하나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그가 아직도 얼 빠진 얼굴로 무언가에 홀린듯
받아들어 나사를 바꿔 끼웠고, 자신이 몇 시간을 풀지못했던 문제는 마법처럼 해결되었다.
'고마워요.'
'그럼 이만.'
'아, 저기 잠깐만요!'
정없이 돌아서려는 지훈을 그가 불러세웠다.
'진짜 고마워요. 나 아버지 몰래 차 훔쳐 타다가 목장에서 실수로 박은건데, 하마터면 들킬뻔 했어요.'
'조심했어야죠.'
지훈은 충고를 하려다 입을 다물고 다시 뒤를 돌았다. 발걸음을 떼려는데 또 다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이 짜증섞인 얼굴로 휙 돌아보았다.
'안궁금할지도 모르겠는데.'
'......'
'내 이름은 김민규에요. 그 쪽도 한국인이죠? 나 얼마 전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아버지 찾으러 얼마전에 여기 왔어요. 와, 한국인 진짜 반갑다.'
'......'
'여기 엄청 살기좋은 동네같아요. 사람도 별로 없고. 차로 막 달려도 되고!'
'......'
'어..그러니까 내 말은.'
'......'
'지금 그 쪽, 완전 멋있었다고요.'
민규가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들어올리자 지훈이 듣던 중 허- 하며 어이없게 웃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였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흘러 지훈의 나이 스물 한 살, 민규가 스무살이 되었다. 지훈과 민규는 그 뒤로 빠르게 친해졌으며 함께 사격장과 레이싱 경기를 즐겨보러 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민규가 미국에서 성인이 된 걸 기념하여 지훈은 자신이 평소 즐겨 가던 바에 민규를 데려갔다. 민규는 지훈의 허리를 껴안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지훈은 그럴때마다 그를 밀어내며 짜증냈다. 워낙 누구든 스킨십을 싫어하던 지훈이였다. 하지만 절대로 놓아주지를 않으면 지훈은 졌다는듯 웃어버렸다.
두 사람이 맥주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실때, 지훈은 민규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1년간을 생각하고, 고민해왔던 문제였다.
'넌 학교 다닐 생각은 없니.'
'형도 학교 안다니잖아. 왜?'
'그냥. 아버지만 보러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하기에는 조금 아깝지 않나 싶어서.'
'그렇다면 형이 더 아깝다. 머리도 좋으면서 왜 아무것도 안해.'
'......'
'나는 아직 아무 생각이 없어. 학교가 전부는 아니잖아.'
'......'
'난 형이랑 이렇게 놀고 먹고 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민규가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는 지그시 지훈의 눈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규의 볼을 쓰다듬었고, 무언가 결심한 듯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나랑 같이 일 안할래?'
'...일?'
'그냥. 돈 번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즐기는거야.'
'그게 어떻게 일하는거야.'
'너 예전에 네 아버지 차 완벽하게 부셔버렸던거 기억나? 그때도 내가 고쳐줬잖아. 맨 처음에도 그렇고.'
'갑자기 그게 왜. 굉장히 쪽팔리네.'
'그리고 그 다음번에 내 차를 부쉈을땐, 네 손으로 직접 고쳤어. 단 하루만에. 그것도 기억나지?'
'왜 자꾸 그런 얘기를 해. 근데 그게 뭐?'
'난 그때 네 가능성을 봤어.'
'..무슨.'
'나야 어릴때부터 아저씨한테 모든걸 배웠다지만, 너는 이제 기술에 눈을 뜬지 갓 반 년도 되지 않았는데 차를 그렇게 다룰줄 안다는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거야.'
'......'
'같이 하자. 민규야.'
'...뭐가 뭔지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하는건지 난 아무것도 몰라.'
'그냥 나만 믿고 따라와줘.'
'형 따라가면 돈 많이 벌 수 있어?'
어린 애 같은 질문을 하는 민규가 괜히 귀여워져 지훈은 그의 볼을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손을 민규가 잡아내려 자신의 손으로 크게 움켜쥐었다.
'장난 치는거 아니야..'
'나도 장난 아니야.'
'위험한 일이라면 그만 두고.'
'난 위험한 일 안해.'
'..나 정말 대단해?'
'그럼. 앞으로 넌 너를 닮은 차를 만들어내게 될거야.'
'......'
'끌리지.'
'...형 완전..영업왕이였네.'
'어디서 그런말을 배워왔어? 웃겨.'
'한국 티비에서.'
'그런거 따라하지마.'
지훈이 민규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고, 민규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 완벽한 사업을 해낼거라고. 어릴때 꿈에만 그리던 내 세상을 만들거라고. 순수했던 지훈의 마음속에 요란한 지진이 울리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팀 A1의 시초였다.
2017/04/08 PM 21:00
"리더는 이런거 안좋아해."
"이거 잘 먹던데. 딸기빵."
"네 취향 아니고?"
"아니야. 절대로 내가 이 딸기가 먹고 싶어서 사는게 아니라고."
오늘은 팀 A1이 만들어진지 7년째 되던 날이다. 하지만 그것을 기념하기에는 난잡하고 복잡한 상황이라 그냥 지나칠수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팀의 사기를 더 북돋아야 한다
며 파티를 열어 모든걸 다 잊고 즐겨야 한다는게 석민의 아이디어였다. 어쩌다 같이 딸려나온 지수는 석민이 고른 딸기빵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이거 순 사기꾼이네."
"그럴거면 계산 네가 해."
"아. 맛있겠다."
투닥거리며 케익과 각종 음식들을 준비한 두 사람은 A1의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뒤를 따라오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수시로 확인하면서. 몇 번이나 수상한 차량으로 의심되
는게 보이면 지수는 총을 꺼냈다 품에 넣었다를 반복했지만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안경을 벗으며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 어쩌다 이렇게 된건지."
"요즘 세상에 안피곤한 사람이 있나. 내려."
지수와 석민이 파티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빠른 속도로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11층으로 도착하고 그들이 내린 후 룸의 문을 열자, 팀원들이 전부 모여 자유로운 시
간을 보내고 있었다.
파티장은 아직 조용했다. 넓은 테이블 위에는 메이드가 만든 특별한 저녁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고 내부에는 분위기 있는 탱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석민은 들어가면서
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춤을 추기 시작했고 승철은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다 이내 일어서서 함께 따라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수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크게 웃으며 그에게 다
가갔다.
"윤정한, 요새 얼굴 보기 힘들다."
"아, 지수!"
"잘 갔다왔어?"
지수, 승철과 동갑인 스물 여덟살의 정한이 웃으며 지수를 한 번 껴안았다. 그는 독일의 베를린으로 약 한 달 정도의 출장을 갔다가 이제 막 시카고에 도착한 모양이였다. 피곤
한 얼굴을 하면서도 하얀 피부는 꽤 생기있었다. 정한은 원우에게 그동안의 일을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그는 지수를 원우에게 데려가며 의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그래도 리더한테 얘기 들었어. 범인이 누군지 감도 안잡힌다고."
"잡히면 아마 묵사발이 나겠지."
"그런데, 지문 인식 프로그램은 너랑 원우가 만들어내면 되는거 아니야?"
"고민중이야. 시간도 시간일뿐더러 개발 자체에도 돈이 많이 들어가거든."
"아, 그래. 잘됐으면 좋겠다."
정한과 지수, 그리고 원우의 대화였다. 원우는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고 지수는 원우의 옆에 앉아 함께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정한은 입고 있던 수트가
답답했는지 넥타이를 풀어내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두었다. 반대편 쇼파에는 승철, 석민이 춤을 추다가 결국에 지쳐 앉아버렸다.
"민규랑 리더는 어디있지?"
"겐지도 안보이는데."
"저기 오네."
투명한 창 밖을 보며 석민이 중얼거렸다.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는 세 사람의 얼굴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지훈아."
정한이 반가운 얼굴로 지훈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지훈은 그제서야 이제껏 본적 없는 미소로 환하게 웃으며 정한을 가볍게 안았다.
"한 달 안봤다고 보고싶어서 죽는줄 알았어."
"오버하지마."
옆에서 가만히 듣고있던 민규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무시하는듯한 혼잣말이 모두에게 들리자 분위기가 싸해졌다. 정한이 그런 민규를 흘끔 쳐다보며 지훈에게 입모양으로 물
었다. '무슨 일 있어?'
"......"
조심스레 다가온 지수가, 지훈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정한의 손을 조심히 내려두었다. 아. 이것때문에 그랬군.
"질투 좀 하지마라."
"질투 좀 하지마."
정한의 말을 팀 원 모두가 따라했다. 민규가 그제서야 정색한 얼굴을 풀고서 밝게 웃으며 정한을 안았다.
"무사귀환을 축하해."
"한 잔해."
지훈, 민규, 승철, 지수, 정한, 원우, 석민 그리고 유일한 일본인 겐지. 이들만의 파티는 그들답게 시작되었다.
"독일에 예쁜 여자 많아?"
"물론."
"독일어 좀 해봐."
모두가 현 시점의 문제를 지금만큼은 잊으려 즐길때, 겐지는 아무도 몰래 불안한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억지웃음을 지었다. 석민이 겐지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과일안주를 입
에 넣어줄때, 그는 또 다시 인조적인 웃음을 지어보였다.
"겐지. 너 어디 아프냐?"
"..아니! 전혀."
"근데 오늘 왜이러지? 너 너무 조용해."
석민은 미심쩍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평소같았으면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자신의 옛날 얘기들을 쓸데없이 늘어놓아야 하는게 정상인데 오늘따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석
민이 겐지의 이마에 손을 한 번 올렸으나 미열 하나 없는 적당한 온도에 아픈건 아닌것 같은데, 하며 손을 내렸다.
지훈은 테라스에 앉아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다 슬며시 와인을 마셨다. 한 모금만 마시려 했는데, 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차를 고칠때처럼 답이 쉽사리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외면하고 있다는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지훈은 아파오는 머리에 두
눈을 꽉 감았다. 제발. 내가 틀렸으면 좋겠어.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누군가의 부자연스러운 행동과 인위적인 미소에 지훈은 이미 모든걸 알아버린것
처럼 시도때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각자 적당히 술을 마시고 제 방에 들어가 쉬고 있을때였다. 파티장의 테라스에는 민규와 지훈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마티니를 한 잔씩 나눠마시고 시원한 바람을 만끽
하고 있었다. 무드있는 재즈가 흘러나오자, 민규는 그것을 조용히 따라 허밍했다.
"7년이나 흘렀어."
민규가 먼저 마티니 한 모금을 마시고,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땀에 조금 젖은듯한 앞머리가 차분히 내려온걸 보고 있자니, 마치 7년전 그를 처음 봤을때와 같
은 모습으로 오버랩 되었다. 그때도 넌 땀을 흘리고 있었고, 지금처럼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 머리 색도 지금처럼 까맸고, 앞머리는 정갈하게 내려와있었어.
"그때 넌 되게 어렸는데."
"나만? 아니. 형도 어렸어."
"알아. 그래도 너보다는 아니였지."
"형은 정말 옛날 얘기 하는거 좋아해."
"그러게, 누가 그렇게 아버지 차 때리고 부수고 다니랬나."
"귀에 딱지 앉겠네."
"..민규야."
"어?"
지훈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민규는 마티니를 마시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늘 그를 동경해왔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한시도 동경하지 않은적이 없
었다. 요즘들어 그에게 그 이상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걸 눈치 백단인 상대방에게 들킬까봐 하루하루가 힘들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라는걸 민규도 잘 알기에 애써 다
른 생각을 했다.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은 나를 본적이 없어."
"......"
"어떤 감정인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대비 할 수 있을까. 위험상황에 대비하는건 익숙한데, 감정적인건 도저히 익숙치가 않아."
"......"
"그럴 때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올까봐 불안하다."
"무슨일인데 그래. 팀에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무겁다. 많이 무겁다. 이 기분. 민규는 처음 느끼는 분위기에 지훈을 보채지 않고 물었다. 하지만 지훈은 대답대신 여린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형은 늘 나를 궁금하게 해."
"그랬나."
"지금도."
"......"
"나 그래도 이지훈 당신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이야."
"알아."
"물론 나에게도 말 못할 사정같은건 언제나 생길 수 있고, 있겠지. 알아."
"민규야."
"섭섭하다고 말하려는게 아니야. 내가 형에게 서운할것도 어디 있겠어. 그런거 아니야. 그냥 나는."
"......"
"그냥, 나는. 다른 사람들이 형을 다 떠나도. 나는 아니라는거야. 그 뿐이야."
"......"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적이 없다고 했지."
"......"
"내가 떠나지 않는 한, 형은 그런 상실감 가질 일 없어. 절대로."
민규가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잘하고 있는게 맞나. 이런식으로 위로 하는게 맞는건가. 모르겠다. 그저 자신이 은연중에 뱉고 있는 모든 말에 담긴 진심이 지훈에게 닿길 바라
고 있다. 지훈이 입술을 벌리지 않고 미소 짓는다. 예전 그때처럼, 민규가 지훈에게 '멋지다'라고 처음 말했던 그 순간처럼 어쩌면 어이없어 하는 미소를 보인다.
그러다 결국 크게 웃어버렸다. 민규 역시 지훈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정말."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민규의 앞으로 가 자신의 그림자로 민규를 덮었다.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하겠네."
민규의 방으로 들어가 실컷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나온 지훈은 자신의 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벽에
기대어 신호를 기다렸고,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정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졸린 목소리에 지훈은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고 있었어? 미안해."
- 아니야, 미안할 필요 없어. 방금까지 자료 정리중이였거든.
지훈이 걱정할까봐 없는 말을 지어낸건 아닌지 싶었다. 그가 소리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주위를 살피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어."
- 응. 말해. 뭔데?
"독일에서 사람 한 명만 찾아봐줘."
- 사람? 그래. 어려운건 아니지. 정보는?
"나이는 스물 일곱. 나랑 같아.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고. 아마 지금쯤 베를린에 있을거야."
- 그래. 근데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돼? 나야 뭐, 리더가 찾아달라면 이유따위 필요는 없지만 그 사람에게 할 말은 있어야지.
"전화로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으니까, 잠깐 내 방으로 와줘."
- 알았어. 5분만 기다려.
지훈은 지금까지의 상황과 자신의 생각했던 것들의 일부를 정한에게 일러주었다. 다른 팀원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이번 상황은 핀트가 달랐다.
"뭐? 겐지가 의심스럽다고?"
지훈은 다시 한 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차분함을 벗어난 정한의 날이 선 목소리에 가만히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자면 그래."
"...복잡하게 됐네."
정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하다, 생각했다. 그도 최근들어 겐지에게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낀건 사실이였다. 다른 팀원에 비해 자신이 예민하기에 괜히 의심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던 지금까지의 복잡미묘한 감정이 다 날아가버리는것 같았다.
"사실 독일에 출장을 가있는 동안 겐지가 내 전화를 받은적이 손에 꼽혀."
"......"
"안부를 묻기 전에 나도 몇 가지 정보를 받아야 했거든. 그런데 받지를 않더라고. 그래서 쓸데없이 다른 애들을 닥달해야 했지만."
"......"
"겐지가 그럴때마다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했어. 중요한 바이어와의 미팅이라던가, 아니면 개인적인 일이라던가."
"......"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마음을 넓게 쓴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후자쪽에 가깝겠어."
"......"
"스파이짓을 하고 있었네. 겐지 그 녀석이."
지훈은 정한의 말을 듣고 눈을 아래로 굴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스파이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 결국은 그의 눈 앞에 거세게 아른거리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솟
구쳤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겐지는 전적이 있는 놈이야."
"..뭐?"
"그걸 다 덮어주고 그 자식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게 나고."
정한은 지훈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역시나 실망의 대상은 지훈이 아닌 겐지에게 있었다.
뒤이어 지훈은 겐지의 전과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정한은 역시나 충격적인 얼굴로 말도 안된다며 믿지 못했다.
"..알겠어."
"일단은 모두에게 비밀로."
"그래. 그렇다면 아까 그 한국인은 왜 찾는건데?"
"그 자가 당했어. 겐지에게."
"..맙소사네."
"더 자세한건 나중에 설명해줄테니까, 찾아줘. 부탁이야."
"알겠어."
지훈이 입술을 꾹 다문채로 정한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긴장을 해야 할 때이다.
"아, 그 사람 이름은?"
정한이 자신의 노트북 속 인트라넷을 접속하며 지훈에게 물었다. 밝은 갈색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게 꽤나 진지해보였다.
"..권순영."
지훈은 낯설은 이름 석 자를 일러주며 그대로 유유히 제 방안으로 사라졌다.
캄캄한 새벽은 오늘도 구름사이로 걷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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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얼른 전개하고 싶은 마음이 크네요^.^ 하지만 느리고 재미없는 글솜씨 탓에 창작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흑흑
그나저나 다음 편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건가요? (본인에게 묻기)
암호닉 - 카나슈님♥ / 수박맛단무지님♥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