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무슨 정신으로 집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확실한건, 김성규가 들어오기도 전에 정신없이 잠들었다는 것.
내 옆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잠이 든 성규가 있었다.
나즈막하게 한숨을 쉬고 배게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찍힌 두 통의 문자는.
[아직 안일어났어요, 우현아? 연락하라니까 말도 안들어요]
[오늘 시간 되려나? 바람 필 사이인데 기본적인건 알아야지ㅋㅋ]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제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 약간은 후회가 되었다.
생각이라도 해볼껄 그랬나.
김성규가 그 남자랑 다정하게 있는 모습, 아마 그것이 화근이었을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곤히 자고있는 성규의 얼굴을 보다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져 김성규처럼 하얀 이불을 꼭꼭 덮어주고 화장실로 향했다.
[30분 뒤에, 어제 그 공원에서 만나요.]
저 멀리,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발을 동동거리는 양요섭이 있다.
딱 봐도 정말 사랑받으면서 살 것같이 생긴 외모에, 어제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였다.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당당했던 어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우현이 왔네, 우현이."
밝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밝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밝은 모습이 괜히 눈에 거슬렸다.
나와, 너무 상반된 모습이라서.
"으- 진짜 춥다. 이 공원은 꼴도보기 싫으니까 카페갈까?"
"...아, 네."
"아, 맞아. 그리고 아까부터 거슬리는데 말 좀 놔. 한살차이가 뭐 대수라고."
양요섭과 남우현.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상반된 모습을 하고있다.
손가락으로 내 볼을 쿡- 찌르며 밝게 웃는 모습이, 너무 낯설어보였다.
양요섭은 내 손을 잡고 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얼굴 표정에 비해 손은, 미칠듯이 차가웠다.
"가자! 형이 핫초코 사줄까, 핫초코?"
그 손이 말해주는 듯 했다.
이 사람이 웃어도, 웃는게 아닐거라고.
어쩌면, 나보다 더 큰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와, 우리 이제 진짜 바람피는 것 같다. 이제 너만 말 트면 될 것 같지 않아, 우현아?"
"노력..해볼께요."
양요섭은 입술을 쭉 내밀며 딸기 스무디를 한번 쭉 빨아먹었다.
우연인지 뭔지, 왜 하필 딸기 스무디인지.
왜 저렇게 김성규와 많이 닮아있는 건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우현아? 남우현?"
"....예?"
"생일을 안물어봤네, 생일. 언제야?"
"아...2월 8일이요."
"오, 나는 1월 5일인데! 겨울 남자들이네, 우리! 운명이야 이건."
양요섭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스무디를 한번에 쭉-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너도 니 애인이 기다릴테니까 들어가야지."
내 애인, 그리고 양요섭의 애인의 애인.
김성규는 이제, 나만의 연인이 아니였다.
김성규는 지금 나의 품을, 벗어나려 하고있다.
저 멀리에 하얀 니트에 검은색 목도리를 맨 김성규와 어제의 그 남자가 보였다.
양요섭은 반응도 없는 날 보며 말하느라 저 두명을 보지못한 듯 했다.
그들의 사이와, 우리의 사이가 점점 좁혀져 갈 수록 가슴이 미어져와 차마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양요섭이 말을 하다가 멈추고, 까치발을 들고 내 얼굴을 양 손으로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남우현."
"....."
"아무렇지않게 행동해. 이거 나에 대한 예의, 아니야."
"....아,"
"미친건 우리가 아니라, 저 놈들이야. 그러니까 당당하게 가라고."
정신이 들었다. 미친건 나와 양요섭이 아니라, 김성규와 저 남자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양요섭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지.
아마 그는, 내가 상처를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픔을 지닌.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