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자판 위로 가지런히 손을 올려놓은 경수의 표정은 마치 첫 전쟁에 임하는 소년병사마냥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 짐짓 엄한 얼굴로 한참을 빨려들어 갈 듯 검색창을 노려보던 경수는 이내 머뭇거리는 손길로 타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도경수 ]
엔터. 이내 화면은 빠르게 넘어갔고 경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한 얼굴로 스크롤을 내렸다. 가장 상단에는 정식 예술인으로서 자세하게 입력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공들여 찍은 사진과 함께 경수의 간략한 프로필이 기재되어 있었다. 경수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드디어 '도경수'라는 이름을 쳤을 때 나오던 동명이인 도경수(62세.KS그룹 부사장) 할아버지를 누르고 당당히 제 이름을 가장 위에 올린 것이다. 당장 친구들에게 전화를 넣어 확인하라고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경수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스크롤을 주욱 내렸다. 경수는 얼마 전 막을 내린 자신의 뮤지컬 후기와 그들이 본 배우 도경수에 대한 평을 꼼꼼히 읽어나갔다. 대학가 위주의 소규모 음악극,연극에만 전전하던 경수가 처음으로 도전한 뮤지컬이었다. 규모도 결코 작지 않은데다 경수를 좋게 본 제작자들 덕에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꽤 비중있는 역할도 도맡았다.
-도경수님 정말 연기 맛깔나게 잘하심. 얼굴도 완전 귀염상이고 커튼콜때 웃는거 보니까 완전 깨물어주고 싶던데ㅠㅠ
에이, 그정도는 아닌데.
-남친이랑 보러갔는데 뮤지컬 내내 도경수만 보다온 듯.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끝내주더라. 끝나고 옆에보니 왜 오징어 한마리가...
헤헤. 복밭으실 거에요.
-키가 좀 미스.
빠직.
아킬레스건을 저격당한 경수는 아련한 표정으로 정중히 블로그를 나왔다. 때마침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시간 전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갔던 종대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온 종대는 힘없이 경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미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메리카노의 스트로우를 애타게 빨아먹는 얼굴이 잔뜩 지쳐있었다.
"밖에 엄청 덥다."
"어디 갔다와?"
"극작과 건물."
"멀리도 갔다왔네. 거긴 왜?"
"요즘 극작과 애들 졸업작품 준비하느라 집에도 못 가잖아. 거기 친구놈이 뭐 좀 가져다 달래서. 백현이 있잖아, 기억하지?"
"변백현?"
"어. 너희 얼굴 안본지도 되게 오래 됐네."
경수는 얼떨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꽤나 생경했다. 엄밀히 말하면 백현은 종대의 친구였다. 사람이 득실거리는 것에 환장하는 종대가 자신의 친구들을 여럿 몰고오곤했고 백현도 그 중 한명이었다. 같은반이 되어 본 적은 없었지만 언제나 여학생들의 수다에서 백현의 이름은 빠지지 않아 익히 알고 있었다. 못하는 것이 없는 차가운 도시 남자. 순하게 내려갔지만 어딘가 찬바람이 스민 매서운 눈매를 경수는 기억했다. 종대가 다리를 놔줘 친해진 아이들 사이에서도 경수는 유독 백현을 어려워했고, 백현도 딱히 경수를 먼저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수가 한발치 뒤에서 시선이 느껴져 뒤돌아보면 그 곳에는 늘 백현이 있었다. 이도저도 아닌 사이. 백현과 경수는 딱 그랬다.
경수와 종대, 그리고 백현은 나란히 S 예술대학교에 합격했다. 성격도 외모도 가지각색인 세사람은 각각 희망하던 연기과,실용음악과,극작과의 학도가 되었다. 연기과와 실용음악과는 같은 건물인데다 연계되는 일이 많아 곧 잘 만났지만 극작과는 정문에서 가장 먼 건물에 위치했고 부딪히는 일도 별로 없으니 서로 만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신입생때 멋모르고 돌아다니다 몇 번 마주치던 횟수도 시간이 지나자 현저히 줄어들어 경수는 이제 백현의 목소리조차 가물가물했다.
"이번에 되게 크게 벌이나 봐. 박찬열 까지 캐스팅했다던데?"
"진짜? 스포트라이트 장난 아니겠네."
"곧 연기과에도 캐스팅 연락 오겠지. 백현이한테 안부 문자라도 넣어야 되는거 아니냐?"
"됐어. 이제와서 무슨 사바사바야."
융통성 없는 놈. 종대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과제를 한답시고 늘어뜰여놓고 나갔던 종이들을 차곡이 정리하는 종대를 바라보며 경수는 턱을 괴었다. 사실, 졸업공연의 배우가 되는 것이 자신에게 큰 메리트가 되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기과의 아는 사이를 밑바탕으로 캐스팅하는 극작과 학생들 사이에서 경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백현이 있긴 하지만. 경수는 오래전부터 백현이 자신과 남들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경수는 싫은 내색으로 받아들였고, 지레 겁을먹고 몇발치 물러난 것은 저였다. 그 때에도 백현은 딱히 경수를 잡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깝지도 않던 백현과 경수의 거리는 그렇게 더욱 벌어졌다.
M
ː자신이 하는 분야에서의 영감을 떠올리게 하고 열정을 느끼게 만드는 대상
W. 다올
"얘들아 이거 좀 먹고 해."
양손에 분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들이닥친 준면 덕에 타자 소리만 몰아치던 과방은 그제서야 활기를 띄었다. 저마다 장시간동안 한자세로 굳어있던 마디마디를 풀며 걸어오는 모습이 어쩐지 좀비들 같기도 했다. 준면은 야무지게 포장을 뜯으며 가장 끝 쪽에서 여전히 모니터를 노려보는 남자를 불렀다.
"변백현."
준면의 부름에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 백현은 손만 휘휘 내저었다.
"커피나 좀 타줘."
"너 꼴이 이게 뭐냐? 산신령이라도 되게?"
어느새 다가온 준면의 가벼운 타박에 백현은 피식 웃으며 턱 언저리를 매만졌다. 며칠동안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해 까끌한 감촉이 여과없이 느껴졌다. 뻑뻑한 눈가를 두어번 문지른 백현은 준면의 품에 머그컵을 밀어넣었다. 가보라는 손짓도 잊지 않고. 준면은 커피 자욱이 눌러붙어 지저분한 머그잔을 내려다보며 혀를찼다.
"공연 두 번 하면 그때는 득도할 것 같네."
"가 봐."
"글 안써지냐?"
"어, 심히."
백현은 팔짱을 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글을 쓸 때 엉덩이 붙이고 앉아 몇시간은 막힘없이 써내려가는게 백현의 최대 강점이었다. 백현이 소설을 집필하는 모습을 많이 봐 온 준면은 지금의 골머리를 썩히는 백현이 꽤나 낯설었다. 연극이 백현의 주 무대는 아니었긴 하지만. 백현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한 기성작가였다.
화면을 흘끗보니 '마루'라는 인물의 대사에서 막혀있었다. 마루, 준면은 백현 답지 않은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연극 대사가 어렵긴 하지."
"사실 이 역할에 염두해 놓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맞춰서 쓰려니까 어렵네."
백현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준면은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이 봄바람 휘날리는 멘트가 김백현 남궁백현도 아닌 변백현(24.소설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평소답지않게 목소리도 어딘가 부드러움이 묻어난다. 준면은 그제서야 초췌한 백현의 얼굴에서 그동안 찾아볼 수 없던 부드러운 기색을 발견했다. 자신이 아는 백현은 자신의 생일도 깜빡하는 만사에 무관심한 쟈갸운 남자였는데. 그래서 가끔 백현만의 무뚝뚝한 말씨를 따라해보곤 한 것은 물론 준면만 아는 비밀이었다.
"여,염두해 놓은 사람?"
"있어. 내 뮤즈."
줄곧 모니터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백현은 씨익 웃으며 준면을 올려다 보았다. 푸석하고 피곤에 쩔은 얼굴이었지만 준면이 보아온 백현의 모습 중 들떠있는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결론은, 엄마 변백현이 이상해요.
*
마셔라 마셔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경수는 이명처럼 귓가에 매달리는 악에받친 목소리들에 잔뜩 얼굴을 구기며 눈을 떴다. 길바닥이 아닌, 익숙한 제 자취 방 풍경에 경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지난밤의 과음이 두통과 속쓰림을 불러와 경수는 어정쩡한 자세로 앓는 소리만 흘렸다. 꽤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 상철이의 제대로 평소답지 않게 앞 뒤 재지않고 들이 부운 것이 화근이었다. 뜨거운 분위기에 어쩐지 취하지 않는다고 착각한 자신이 그대로 망나니가 된 모습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바였다.
어차피 오전 수업도 없는 날이라 다시 누워 잠에 들려던 경수는 자신이 입고 있는 출처모를 남방을 발견했다. 얼굴위로 팔을 들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눈을 크게 뜨고 뜯어보았지만 옷장 구석에서도 본 적 없는 처음보는 옷이었다. 빨간 바탕에 검은 체크무늬 남방. 워낙 남방이 교복같은 곳이 대학인지라, 경수는 남고 출신다운 시커먼 숫놈들이 드글대던 어제의 술자리에서 빨간 남방을 입은 사람을 기억해내려 애쓰며 머리를 헤집었다.
그때 경수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용케 방전이 되지 않은 휴대전화가 진동을 울렸다. 액정위로 뜨는 느닷없는 번호에 경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익숙하지 않은 숫자들을 뜯어보았다. 불분명한 발신자는 어쩐지 남방의 주인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경수는 많이 당황하셨쎄요?따위의 어눌한 목소리가 튀어나오질 않길 바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평소보다도 더 낮게 흘러나왔다. 짧게 이어지는 적막에 경수는 전화 너머 상대를 추측하려 머릿속을 힘차게 굴렸다.
-도경수.
"…누구?"
-나, 변백현.
짧게 이어지는 건조한 음성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아,하고 외마디를 내뱉었다. 어제 술자리에 변백현이 있었나? 충분히 백현이 있을법한 자리였지만, 동창녀석들 사이에서 변백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결론에까지 미치자 경수는 더욱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 녀석과 이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 할 사이던가? 백현과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교류는 경수가 연초에 단체문자로 보낸 '새해 복 많이받고 다음에 밥 한번 먹자^^' 따위의 문자 한통이 전부였다.-그 마저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어제 일 기억안나?
이게 무슨 기집애들이 멋모르고 만난 원나잇 상대가 다음날 찝쩍거리는 듯한 멘트인가. 경수는 조약한 머리속을 탈탈 털어내고싶은 심정이었다. 가뜩이나 붕 뜬 머리를 더욱 못살게굴며 입을 달싹였다.
-어제 니가 막 술취해서 나한테 토하고 때리고…
"……."
-는 구라고.
경수는 일자로 입을 다물며 진심으로 정색했다. 뭐야 이새끼?
-니가 어제 춥다면서 내 남방 뺏어 입었는데.
"……."
-이건 진짜.
"내,내가?"
-어, 술취한 도경수 꽤 볼만 하더라.
건조하다고만 생각했던 말투에는 어쩐지 웃음기가 스며있었다. 경수는 허망한 얼굴로 벽에 작은 머리통을 기댔다. 전화 너머 백현은 애써 자꾸만 삐져나오는 웃음을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참고 있었다. 방금 출력한 대본들이 제 앞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지만 방금 샤워를 한 듯 개운하기까지한 느낌이 나쁘지 않아 백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전화 너머로 경수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근 2년만인 백현과 경수 사이의 첫 대화는 뜬금없고 미적지근했지만, 제법 자연스러웠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