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승윤이 사준 짙은 청색의 목도리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춥지는 않았지만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목도리 속, 아지랑이처럼 숨이 따스하게 퍼져나가더만 일순 턱 막혀서 제게로 돌아왔다. 잿빛 으로 물든 마을 위로 붉게 물들여져가는 태양. 그, 태양이 하나. 둘. 셋···. 세개의 태양이 일순간 겹치더만, 하나가 되어가며 저물어간다. 말갛고 붉게 번져가는 세상.
잿빛 물감 위를 따스히 물들이는 그 붉은 물감들. 주홍, 빨강, 노랑, 다홍 등 삽시간에 세상 위로 번져가는 그 말간색이 제 눈동자 속으로 가득해져 왔다. 왜인지 그 색깔이 말간 승윤의 웃음을 떠올리게 했다. 뽀얀 피부 위로 붉고 말갛게 번지는 승윤의 웃음. 그것이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져 걸음걸이가 자동으로 빨라졌다. 갈색 워커가 땅을 또각또각 하고 스치는 소리가 목도리에 파묻힌 귀 안으로 제법 또렷이 들어왔다.
띠링-
[마을 청년 존이 당신에게 한 눈에 반합니다!]
[쳐다보지도 않는 당신! 도도함 수치가 3 증가합니다!]
··아.
정말로, 태현은 갑자기 곁에서 싱글방글 웃으며 손을 잡아줄 승윤이 정말로 그리워졌다. 정말로. 입술을 벌려 씹어뱉듯이 알람 끄기를 조용히 외쳤다. 이 세상은 어째 제대로 된게 없다.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남자가 남자에게 이렇듯 삽시간에 반해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이라니. 부들부들 거리는 손을 코트 주머니에 끼고선 잔뜩 손톱으로 짓눌렀다. 정신 차리자. 이 곳에 온지는 꽤 되었지만 아직도 발달되어있는 동성애 문화는 태현의 머릿속을 가득 어지럽혔다.
[알람을 끄면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알람을 끄시겠습니까? Y/N]
-Yes.
알람창을 조용히 끌고와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곤 단호히 눌렀다. 노이로제 걸릴 듯이 귓가에 띠링 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을 울렸다. 미미한 귀 속 진동으로 인해 머리는 잔뜩 당기고 아침부터 이 시간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빈 속이 배고픔에 허덕여 현기증 조금을 만들어냈다. 이 곳에와서 달고 살게된 미미한 고통을 무시하고선 쭉 허리를 곧게 피고선 마저 목적지를 향했다. 피곤하다. 공중으로 부유하는 정신이 기억을 찾아내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목도리 위로 부옇게 흩어져 나가는 하얀 숨.
#2
바스락 바스락. 이불을 젖히고 태현은 일어났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다닌 태현이 근 2년, 오랜만에 온 집에 태현의 방 같은 것이 남아있을 구석이 없었다. 키가 160인 누이의 침대는 키가 180이 넘는 태현에게 있어 작고, 좁을 수 밖에 없었다. 침대 바깥으로 비죽이 튀어나오려는 발을 무릎을 올려 크게 접은 태현이 한숨을 밭아냈다.
2학년 겨울방학. 미친듯이 공부에 대한 열의가 가득 찬 동기들의 불타는 경쟁이 괴로웠던 저로써는 사람의 온기와 적당한 도닥거림이 필요했다. 버스를 타고 오랜만에 도착한 집은 생각했던 것 만큼이나 어렵지 않았다. 기숙사를 떠난다는 홀가분함과 집의 온기에 대한 그리움. 그동안의 노력, 앞으로 해야할 것들로 머릿속이 얼룩졌다. 혼란한 마음. 복잡한 심정. 그 여러 정서더미들을 가득 안고 향한 집은 텅 비어있었다.
3일간의 중국으로 향하는 제가 끼지 못한 가족여행.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다. 텅 빈 집. 휑한 공간. 서늘하게 피부위로 내려앉는, 차갑고 시린 밤공기 특유의 무언가. 가만히 두눈을 깜박여 보았다. 속눈썹 위로 서늘한 공기 한점이 내려앉았다. 짙은 청색과 밤색 그리고 보라색등의 물감이 잔뜩 풀어헤쳐진 어두운 밤. 그것이 너무 추워서 매고온 가방을 내팽겨치듯 던져버리고서는 그 자리에 앉아 펑펑 울어버렸던 것도 같다.
울고, 소리치고, 다시 울며, 괜찮다며 자기 현혹을 반복한 입시라는 이름으로 가득찬 누구와 섯불리 말을 나누지도 않으며 경쟁 속에서만 가득 타올라 스스로 묶였던 감옥. 그 속에서의 그 동안의 한이란 한을 전부 풀어내려 애썼다.
추웠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겨우 일으켜 기억 속의 제 방으로 기어 들어가 침대 위 몸을 누이고는, 쿵. 쓰러지듯 깊은 잠에 빠진 후 깨어나보니 지금이었다.
새집이 된 머리를 아무렇게나 쓱 쓸어넘기고 누이의 책장 위 컴퓨터를 키려 하다 머리 위 선반과 부딪혔다. 쿵. 키가 160 쯔음인 누이를 무시했다. 반성.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붉어진 눈매로 반성하는 의미로 선반을 보니 역시나 잔뜩 문제집이라거나 씨디 같은 것들이 흐트러져있었다. 꼼꼼한 누이의 성미로 선반 위의 것들을 방치해두었을리 없으니 제가 부딪힘과 동시에 흐트러진것이리라. 대강 사건을 넘겨짚은 태현이 아무렇게나 성의없이 씨디나 문제집 같은 것을 정리라는 단어 아래 잔뜩 휘저어댔다.
"?"
씨디나 문제집 속 뽀얀 먼지를 둘러싼 푸른색의 체크리본으로 묶인 꾸러미 하나. 그리고 맨 위에 적힌 To. 태현. 5월 10일날 생일 선물이라면 분명 택배로 받았었는데···. 전하지 못한 선물? 태현의 눈가가 길게 좁혀졌다가 되돌아왔다. 망설임 없이 무자비한 손길로 태현은 꾸러미를 해체시켰다.
[미연시]
딱 세글자 적혀있었고 표지에는 거대한 푸른 빌딩이 그려져있었다. 하나하나 섬세히 그려진 유리창은 마치 정말 빛에 빛나는 것 마냥 빛났고, 묘하게 섬뜩한 분위기를 일궈냈다. 뒷장에는 낡은 초가집과 개울이 흐르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보통 미연시라면, 짧은 교복을 입은 분홍빛 양갈래를 가진 귀여운 여동생 스타일의 한 명, 시크하게 긴생머리를 풀어헤친 누님 한명, 안경을 벗으면 갑자기 예뻐진다는 설정을 가진 뱅글이 안경을 낀 포니테일의 여자애와 남장 설정을 가진 숏컷계의 여자같은 것들이 그려져있지 않나. 예전에 교실 뒤쪽의 오타쿠에게 잘못 잡힌 바람에 질리도록 들은 미연시의 설명과는 너무도 다른 그림에 태현은 당황했다.
묘하게 구매욕구를 저하시키는 표지다. 이런 유치한 연애게임을 왜 산걸까. 어차피 1과 0으로 이루어진 사랑이건만.자신이 딱히 할리가 없었다. 아마도.
·· 정말로 할리가 없었는데.
생각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시디를 풀어헤쳐 컴퓨터 본체 속에 집어넣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 당황했다. 분명, 유치하기 짝이없는 게임인데.
태현은 한숨을 쉬었다. 할 일이 없었다. 방금 흘깃 본 휴대폰 속 문자 메세지는 당연하게도 0. 전화기록도 0. 연락할 사람··0명. 컴퓨터 화면이 까매짐과 동시에 푸른 색의 글자로 미연시가 써지고 동시에 아까 그 표지 속 건물이 등장했다. 사실과도 같은 그래픽에 감탄한 태현이 건물cg를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을 때, 지지직 소리와 함께 컴퓨터가 꺼졌다.
"!"
이,이거..누나가 앞으로 공부가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산 컴퓨터인데. 삐질 하고 솟은 식은땀이 태현의 뒷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남은 제 용돈이,그러니까 이 컴퓨터 수리비가··· ··· . 정말로 괜한 짓을 저질렀다. 아으으,하고 정체불명의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입맛이 까끌했다. 에라. 아무렇게나 침대 위에 털썩 누워 몸을 구겼다. 창 밖, 하늘이 맑았다. 지직거리는 컴퓨터의 소음을 뒤로한 채 태현은 다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평범히 우울한 하루였다. 그저 한참 뒤 태현이 일어난 후,게임속이라는 것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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