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쿱지] 로맨스는 개뿔 01
w. 우별
내가 미쳤지. 왜 저걸 내 작업실에 들어오게 그냥 둔 걸까. 상대가 이석민인데 방심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저 망할 놈. 아까부터 작업하는 데 정신사납게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녀석을 보자니 머리가 저절로 아파왔다. 제발 맞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손에 들려있던 볼펜을 던졌다.
"악! 아파!"
"응 축하"
"석민이 많이 아픈데..."
"아픈 걸로 끝나고 싶지 않니?"
"미안"
나이스 샷. 내 손을 매우 칭찬하며 다시 코드를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새를 못참고 또다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돌아다니는 이석민한테 정신이 팔려 노트를 내던졌다. 역시 내가 잠깐 이상했던 거지. 작업 중에 저 녀석이 들어오는 걸 허락하다니. 볼펜으로 맞았을 때 정신을 차라길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아 꾸겨졌어... 바닥에 내팽겨쳐진 노트를 다시 주워 손으로 열심히 피려고 하는데 이석민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그나저나 진짜 안할꺼야?"
"뭐"
"OST작업..."
"응 닥쳐. 안할꺼야."
"지훈아 제발 나 말할 때 끝까지 들어주면.."
"응 싫어. 안 들어."
"...진짜 너무하네 너. 나 나름 너의 죽마고우라고? 나 니 절친이란 말이야!"
"너 같은 절친 진짜 쓰잘머리 없으니까 그냥 사라져."
"나 운다? 석민이 울꺼야?"
"이런 씨..."
"...미안해. 그러니까 그 손에 들린 건 그대로 좀 내려주지 않겠니?"
사람이 어쩜 저렇게 학습능력이 없을까. 어렸을 때 부터 봐 온 놈이지만 한숨밖에 안나온다. 이제 정신 좀 차린 듯 구석에서 찌그러진 녀석이 갑자기 불쌍해져 결국 어울려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작업해야 되는데, 아 짜증나게 은근 사람 약하게 하는데 일가견 있어. 의자를 돌려 이석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휴식이라며 좋아할 때는 언제고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냐 너는.
이석민. 데뷔 8년차이자 나름 잘나가는 보이그룹의 메인보컬. 나는 절대 인정 못하는 사항이지만 잘생기기도 했고 그에 반해 성격은 살짝 돌..아니, 매우 발랄해서 얼굴값 못한다면서도 인기가 많은 놈이었다. 얼굴 잘생긴 건 절대 인정 못해도 허우대 하나는 인정한다. 저렇게 쓸거면 나 10cm만 주지. 그래도 지금 내 키보다는 큰...아니,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 어쨌든 이게 아니고.
"그래서 너 왜 온거냐?"
"심심해서."
"너 친구없냐?"
"아니, 많아."
"그럼 그 친구들이랑 놀러가. 왜 나한테 오고 지...아니다."
"자꾸 나쁜 말 쓰면 석민이 상처받아용!"
"...하...."
"...이번엔 내가 심했어. 잠깐 나도 모르게 그만"
"알면 작작해"
"네..."
자꾸 삼천포로 빠지잖아, 저런 말같은 새끼. 진심으로 저 녀석은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떠오를 것이다. 내 전재산까지는 아니어도 10분의 1은 걸 수 있어. 물론 내가 이렇게 필터링없이 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봤자 2명 중 한 명이긴 하다만은. 아무래도 태어난 순간부터 (강제로)친구가 된 케이스라 진짜 상처받을 만한 말은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이석민한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애초에 내가 빠른 속도로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된 것도 이석민 덕분이었다. 차마 입 밖으로 고맙다는 말은 못했지만 이미 저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생각없이 구는 듯 해도 눈치도 있고, 무엇보다 내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애니까.
"그래서 진짜 목적이 뭔데."
"심심해서 왔다니까?"
"구라치지 마라. 내가 너랑 일 이년 본 사이냐?"
"하핫, 그런가?"
"뭔데 이 새끼야."
"이번에 제의 받았던 OST말이야."
"하기 싫다고."
"그래도 해."
"꺼져. 안 한다고."
"해, 무조건 해. 진심이야."
언제까지 우리 그룹 프로듀싱만 할건데.너 니 사적인 감정으로 이런 기회를 놓칠거야?
이석민의 날카로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다. 난 이제 기껏해야 막 떠오르기 시작한 작곡가였다. 요즘같이 아이돌이 수없이 데뷔하는 만큼 작곡가도 늘어가는 마당에 내 입지를 다져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막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할 때, 이석민의 추천으로 이름도 없는 생초짜 작곡가의 곡으로 활동하고 그걸로 대박을 쳐서 내가 알려지게 된거니까. 한 그룹만 계속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왜, 아직도 최승철이 마음에 걸리냐?"
"그딴 게 아냐. 그런 건 진작에 헤어지기 전부터 없었고."
"그럼 왜."
"아무리 그래도...좀 그렇지 않냐?"
'전 남자친구'와 작업을 하라는 거, 아무리 오래 전 이야기라도 껄끄러운 건 당연한 거 아냐? 내 말에 이석민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입을 여는 그 녀석이었다,
"그것보다 이게 더 중요해. 너 떠오르는 작곡가긴 하지만, 언제 다른 사람이 치고 올라올지도 모르잖아. 연예계랑 똑같아. 나한테는 니가 가장 뛰어나고 작업하기 좋은 작곡가인 건 맞는데. 상황이 어떻게 변할 지 모르는데 언제까지 우리 그룹 곡만 작업할 수는 없잖아."
"..."
"솔직히 말해서 니가 작업하는 곡 중의 8할은 우리 그룹 곡이잖아. 다른 사람들도 맡아야지. 잘 생각해. 물론 니 마음 이해 못하는 건 아닌데..."
"무슨 말 하는지는 알아."
그래, 니가 내 마음을 모를리가 없긴 해. 니 말이 맞아. 내가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 건 이석민의 역할이 99%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이석민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 너무나도 좋은 제안인 걸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보이그룹의 곡작업을 하면 못해도 중박은 치는게 당연하니.
[ "이지훈 진짜 작곡잘해요. 약속할 수 있어요. 친구라서 그런 게 아니라..나름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해보면 너도 여러모로 미친 놈이긴 해. 막말로 '을'인 주제에 사장님한테 가서 그렇게 따질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을거야. 절대로 이석민한테 피해를 끼치고 싶지않아 근 2주간 잠도 제대로 안자고 곡작업을 했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임팩트, 컨셉, 이미지...작곡하면서 그렇게까지 고민해본 적은 절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알려지게 된 건 내가 곡을 잘 써서라기보다는, 내 곡을 잘 살린 Arrive Soui-일명 A.S의 덕분이라고 아직까지도 생각하고 있다.
너한테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물론 너한테는 절대 말하지 않을거야, 앞으로도.
하지만, 아무리 짜증나도 결국엔 니 말은 다 들어주게 되는 나지만...
"...미안, 진짜 싫어."
"지훈아."
"내 근처에 가까이 있을거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아. 그 정도로 싫어."
"..."
"심지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고, 다신 보지 말자고도 했어. 그래놓고..."
"그래도 이건 다르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이건 말 안하려고 했는데..."
OST제안, 나도 받았어.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진심, 니가? 그 영화 OST작업제의를 받았다고?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는데... 하지만, 최승철은 나한테 너무도 껄끄러운 존재였다.
좋은 제안인 건 사실이다. 난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최승철은 우리나라에서 탑급 배우 중 하나였다. 연기력도 최상인데다 비주얼까지 받쳐준다고 업계에서는 캐스팅 1순위. 몸 값이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그만큼의 화제와 수입을 보장할 수 있는...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다만 '흥행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문준휘와 투 톱 주연이고 감독도 영화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아직 뚜껑도 열어보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엄청난 인기가 예상되고 있으니.
그런 영화의 전체적인 OST작업이라.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얼마나 놀랬는지. 하지만 나를 추천한 사람이...
"최승철이 날 추천했다잖아. 넌 그거 듣고도 아무런 생각도 안드냐?"
"설마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 게다가 잃을 게 얼마나 많은 사람인데 쓸데없이 논란 일으키기 싫어서라도 너한테 함부로 못할 걸?"
"아니, 애초에 내가 그렇게 유명한 작곡가도 아닌데 뜬금없이 날 추천했다는 게 이상하잖아? 후보로는 다른 작곡가 분들도 있었는데 왜 하필 나인데?"
"정말 니 곡이 좋아하서 일 수도 있지 않냐?"
"뭐래. 끽해야 너네 그룹 노래 아니면 너네가 부르는 OST말고 뭐가 있는데. 남자배우가 남자그룹 노래 챙겨듣고 그러냐."
"너무하네. 우리 나름 남자분들한테도 인기 많은데?"
"그 인기가 널 향한 건 아닐걸. 내가 알기로는 정한이 형이나 민규가 남팬 투톱아님?"
"나도 많거든?"
"응 구라 꺼져라."
너는 나랑 제일 친하면서 왜 나만 그렇게 까는건데? 자꾸 떠들면 너의 치부를 까발릴 수가 있어. 내 협박에 투덜거리는 걸 멈춘 이석민을 보다가 다시 마음을 정리했다.
최승철이 껄끄럽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날 추천했다...아니 그보다 스태프분들도 아니고 아무리 탑배우라지만 그렇게 발언권이 자유롭단 말이야? 생각해보니 열받네. 눈치 안 보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위치란 말이지? 아무리 최승철이 노래도 꽤 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음악쪽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정한 후보에 따르는 게 맞지 않아?
어쩜 그렇게 한결같을까. 어디서든지 '갑'의 위치에 설 수 있다...라...더럽게 재수없는 건 여전하잖아?
...방금 건 많이 열폭이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최승철이라 이러는 거지. 하지만 정말로 이석민말대로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추천했을...리가 없다. 이건 정말 아니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승철이라고? 이제는 끊어진 사이고 최승철의 생각을 제대로 안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이건 확실하다. 게다가 초, 중, 고등학교도 같았고 연인 전에는 가장 친한 선후배 였으니. 그 세월까지 통틀어 10년이다. 3년동안 선후배였고 7년동안 연인...이었으니까 가족을 제외하고는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다고 추정할 수 있는 조건은 충족되어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인 나와 그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석민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이석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지나치게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게 맞을 것이다. 나와 그 사람은 대외적으로 봤을 때는 그 어떠한 접점도 있을 수 없는 사이였다. 배우와 작곡가. 얼마나 거리가 먼 사이인가. 그러니 반대로 말하면 서로간에 대한 소식은 소문과 평판으로밖에 알 수가 없고, 서로간의 갈등같은 게 존재할 수 없는 사이라는 말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 일 것이다. 내가 작업한 노래를 듣고 '괜찮은 작곡가' 라는 걸 알게되고 추천한다. 여기까지가 최승철이 날 추천할 만한 '대외적인 이유'.
그럼 나는?
아무런 커리어도 없는 내가 갑자기 A.S의 곡작업을 맡아 결과가 좋아 떠오르게 된 작곡가. 하지만 흔히 말하는 '믿고 맡기는' 작곡가라고 하기엔 입지가 위태로운 상태. 그런 상황에서 현재 흥행이 보증되고 있는 영화의 전체적인 배경음과 OST작업...이라는 엄청난 제안을 받은, '입지를 확보한 작곡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 대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의 모습.
결론은....
"젠장"
"...역시 힘들까나?"
"할 수 밖에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사적인 이유를 제외하고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거절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래, 몇 번이고 버려왔던 자존심.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버리면 되잖아...그래도 그때는 연애시절이랍시고 내 성격에 맞지않게 자존심이 너덜너덜해져도 참고 그랬었으니. 내가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 최승철이 '노래 잘하는 배우'로서 OST도 꽤 부른다는 걸 생각하면 어쩌면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다만 그 시기가 내가 아직 입지를 잡지 못한 시기라 그 때와 다를 바 없는 '을'이라는 게 짜증나서 이러는 게 맞다.
그래, 좋아. 이석민도 한다잖아? 내가 이번에 잘하면 나는 더 올라갈거야.
"진짜? 진짜지?"
"...어"
"잘 생각했어! 이번에 잘되면 너 진짜 엄청 알려질꺼야!"
"왜 니가 더 좋아하냐."
그래, 그것만 바라보면 되는거야. 사적인 감정은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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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가 나왔습니다. 오타지적 정말 환영하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