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緣]
W. 스페스
“정국아, 그래도 너 태자였다. 뭐 유배가긴 했지만 왕위 계승할 적자였다니까.”
“가시나. 술 취했나?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또 할라고 그러지?”
“넌 진짜 모른다니까. 내가 네 전생을 봤다고. 아, 답답해.”
“또, 또 그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시험 준비나 해라. 너 때문에 안그래도 교양 과목을 고대문학인지 뭔지 선택해서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전화한 지 채 오분도 지나지 않아 주점에 달려온 정국이가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몸도 못가누는 나를 일으켜 세우려던 녀석이 한숨을 쉬고는 업히라는 듯 내 앞에 앉아 등을 보였다. 정국이의 너른 등에 업혀 걷는 동안 녀석은 쉬지 않고 잔소리다.
“가시나 정신 단디 차리고 공부해라. 지난 학기 학점도 말아먹었으면서. 이거 교양과목 필기한 건데 쫌 이따 꼭 챙겨가고. 네 때문에 괜히 교양과목으로 고대문학 선택해서 죽겠다 진짜.”
며칠간의 열대야가 무색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한 밤이다. 녀석의 목에 팔을 두르고 한창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는 동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이제는 절친한 사이가 된 정국이와 나의 첫 만남은 대학 교양 수업에서였다. 한창 강의 도중 뒷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강의실을 잘못 찾았다고 꾸벅 인사하고 나가던 녀석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아마 정국이도 마찬가지 일 거다. 다짜고짜 쫓아와서 자신을 붙잡고 질질 짜던 여자를 어떻게 잊을까. 혹시나 도망갈까 봐 셔츠를 꼭 붙잡고 엉엉 울어대니 정국이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다.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표정이 여태껏 눈에 선하다. 게다가 전생이, 운명이 어쩌고 했으니,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애로 봤을 수밖에.
지금에야 웃으면서 하는 얘기지만 처음 정국이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다. 잘생긴 건 고사하고 정국이는 나를 몰라도 나는 이전에 녀석을 분명 만났으니까. 전생에 대해 하나도 기억치 못하는 정국이와는 달리, 나는 그때 일어난 일들이 아직 눈앞에 생생하니까.
* * *
“말도 안 돼.”
한두 방울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빗물이 머리칼을 적시고, 옷에 점점 스며드는 동안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몇 분이 지나도록 꼼짝없이 제자리를 지킬 뿐이다. 흙바닥이 점점 젖어들어 새하얀 운동화에 치덕치덕 진흙이 묻어났지만 도무지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혹시 꿈인가? 허공에 팔을 뻗자, 손바닥 위로 하나둘 빗방울이 맺혔다. 감각은 여실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또렷한데. 볼을 꼬집어보았으나 그 역시였다. 아니, 그런데 이게 정말 말이 되는 거냐고.
분명 방금까지 교양 과제를 하겠다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고대 유물 전시를 관람하던 중이었다. 고구려 전시관에서 화살촉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본 그 순간. 찰나에 발생한 이 상황에 까무러칠 노릇이다. 다른 세상으로 넘어오다니. 이거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별별 생각이 다 머릿속을 휘저었으나 금세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는 빗줄기에 일단 비부터 피할 심산이다. 주변을 둘러볼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는 것 같다. 눈앞으로 펼쳐진 거대한 호수 위로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지자 희뿌연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호수를 둘러싸고 병풍처럼 이어진 산등성이가 마치 분지를 연상시킨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비를 피할 곳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뿌연 물안개 사이로 드러난 낯선 궁을 보기 전까지는.
물 위로 조성된 낡은 돌다리를 한참 가로지른 끝에 호수 한가운데 있는 궐에 다다랐다. 옛 유적이거나 민속촌 같은 건가. 돌담을 돌아 대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서서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낡은 나무문을 밀어재끼자, 생각 외로 문이 쉽게 열린다. 끼이익. 그 소리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한 발자국 내딛었다. 대문에서 이어진 너른 마당이 꽤나 정갈하다. 여기 정말 사람이 살긴 하는 건가.
“저기요. 엄마, 깜짝이야.”
낯선 노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대로 정신을 놓을 뻔했다.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는 눈빛이 심상찮다. 아니, 그보다 남자의 복장이 더 기묘하다.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옷차림에 길게 내린 수염까지. 혹 영화 촬영장인가. 아니면 뭐 다큐멘터리에 가끔 등장하는 문명에서 잊혀진 도시라던가.
“정말로 거짓은 아닌가 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지긋이 보던 그가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네?”
“오래 기다렸습니다. 일단 드시지요.”
“…….”
어리둥절한 나를 앞질러 노인이 처마 밑을 가로질렀다. 마당에는 아직도 쏟아져 내리는 비가 한창이다. 저 사람을 따라가도 되는 걸까. 아니, 오래 기다렸다는 말은 또 뭐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 투성이라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드시지요. 참으로 신기한 신입니다.”
방 앞에 선 사내가 내 운동화를 흘끗 보고는 슬쩍 미소를 짓더니 내게 방으로 들어가도 좋다며 손짓을 한다. 소박하지만 괘 정갈하게 꾸며진 방이 인상 깊다. 쭈뼛쭈뼛 방안으로 들어서자, 노인이 내게 푹 쉬라고 인사를 건넸다. 문을 닫아주고 나가려는 노인을 불러 세우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지금 여기가 어디죠?”
“정국 태자의 별궁입니다.”
“태자요?”
태자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대한민국에 태자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정말 어디로 타임워프라도 한 건가. 심장이 무섭도록 빠르게 뛰어댄다.
“지금 몇 년도예요?”
“동명성제 70년입니다.”
“....네? 동명성제요?”
동명성제. 동명.... 욕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머리를 번뜩 스치고 가는 글귀에 입이 쩍 벌어졌다. 분명 한 시간 전쯤 고대유물 고구려 전시관에서 보았던 설명이 퍼뜩 떠오른다.
‘고구려는 흔히 주몽으로 알고 있는 동명성제가 건국한...’
쌍욕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허탈한 듯 웃으니 노인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정말 수상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저기. 아니, 그게 아니고요.”
“예?”
“아, 그게 제가 어쩌다 보니 지금 여기에 왔는데…….”
“그러시겠지요.”
그러시겠지요? 남자의 태연한 반응이 수상해 자꾸만 소름이 돋는다. 혹시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으니 머릿속은 실타래를 꼬아놓은 것 마냥 복잡해졌다.
“저기 그럼 혹시 제가 돌아갈 방법을 아세요?”
“글쎄요. 태자 저하가 아시려나. 저는 답해드릴 게 없군요. 그럼 쉬시지요.”
비를 잔뜩 맞아서인지 몸에 한기가 도는 통에 일단 방 한구석에 놓인 비단 이불을 꺼내들었다.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앉아 오랜 시간 생각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와중에 졸리면 안 되는데 자꾸 잠이 쏟아진다. 아, 안 되는데……. 어딘지도 모르는 데서 막 잠들면 안 된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 * *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담긴 장면에 욕이 절로 나왔다. 망할. 꿈이 아니었어. 같은 방에서 깨고 보니 허탈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잔건지 밖은 좀 어둑어둑 한 것 같다.
별궁이라기에는 단출한 규모지만 나름 아담하고 정갈하다. 심심해서 궐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마주친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찮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뚫어져라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리기 일쑤였다. 말수도 적고 표정도 없는 이 사람들 사이에서 난 정말로 이방인이 된 것만 같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궁 안을 배회하니, 나이 많은 노파 하나가 내게 손짓한다.
“끼니를 거르셔서 허기질 텐데, 앉으시지요.”
여인이 상 한가득 찬을 내왔다. 별궁이라지만, 나름 태자의 궁이긴 한가보다. 입맛에 썩 맞지는 않지만 배가 고프니 가릴 것도 없다. 한참 오물거리며 밥을 씹는 나를, 창백한 얼굴을 한 노파가 뚫어질세라 바라본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기묘하단 말이지. 한참 눈치를 보다가 결국 먼저 입을 여는 건 내 쪽이다.
“저기 근데 제가 진짜 궁금한 게 많은데.”
여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나무로 깎아 만든 수저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궁금했던 것들을 쏟아냈다.
“여기 정말 고구려예요? 그리고 여기가 궁이면 주인, 그 태자는 어디 있어요?”
“저하는 만나기 어려우실 겁니다.”
“아, 만나야 되는데……. 근데 태자면 왕위 계승을 할 사람인데 왜 별궁에 있어요?”
“그러게 저도 유감이네요.”
노파의 낮은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꽤나 슬퍼 보이는 여인의 표정이 눈에 밟혀 속이 울렁거렸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 알 수 없는 표정.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의문투성이다. 미스터리 한 별궁. 태자. 그리고 그중 가장 황당한, 시간을 거슬러 어딘지 모를 곳에 떨어진 나.
아니, 지금 별궁이고 태자가 문제가 아니지. 내가 돌아갈 방법부터 생각해야지. 여기에 떨어지고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전공과제 마감 기한이 오늘 자정인데, 게다가 가족들은 엄청 걱정할테고. 어떻게든 돌아가야 하는데.
“저기, 제가 돌아갈 방법을 그 쪽은 아세요?”
“글쎄요. 태자 저하가 아시려나.”
“태자 저하가 어디있죠?”
“저하의 궁에 따로 계시지만, 저희가 드나드는 것도 싫어하시는 분이셔서. 저하의 궁을 제외하고는 어디든 출입하셔도 됩니다.”
여인도 자리를 뜨고 배도 어느 정도 채웠겠다, 방으로 돌아와서 하는 생각이라고는 돌아갈 방법뿐이다. 내가 어쩌다 여기로 넘어왔더라. 일단 처음 넘어왔던 장소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방 문가에 놓인 청사초롱을 집어 들었다.
궁 안 곳곳에 놓인 횃불이 어둠에 싸인 궐을 비추는 모습이 꽤나 운치 있다. 아직 축축한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은 채, 왔던 길을 떠올리려 기억을 더듬었다. 삐걱 열리는 대문을 지나쳐 궐을 빠져나오자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린다. 호숫가 주변으로 드문드문 켜진 불빛에 다시금 기분이 묘하다. 나 정말 시공간을 거슬러 어딘가에 떨어진 게 맞구나.
낮에는 비를 피해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몰랐는데, 호수가 넓긴 넓은가보다. 궁과 호수 밖을 연결하는 돌다리가 꽤나 길게 이어진 걸 보면. 청사초롱을 들고 걷는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하염없이 돌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거기. 누구야.”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 주저앉은 순간 손에서 놓친 청사초롱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빛이 사그라지고 어둠이 들이닥쳤다.
“누구냐고.”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시야가 캄캄해서인지 온 신경이 귀로 곤두선다.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몸이 뻣뻣하게 굳어 고개를 돌리지 못하겠다. 일어나서 설명해야 하나. 자꾸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순간적으로 무언가 날아들어 팔을 스쳤다. 쓰린 감각에 눈물이 핑 돈다. 바닥에 맥없이 떨어진 화살을 보고서야 비로소 상황파악이 됐다. 휘몰아 치는 고통에 옴짝달싹 못하다가 간신히 왼팔을 붙잡은 채 뒤를 돌아보자, 어둠 사이로 점점 사람 형상이 가까워졌다. 이윽고 돌다리를 달려온 남자가 내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 누구.”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는 한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았다. 가까워진 남자의 얼굴이 달빛에 비춰 명확하게 드러나자 숨이 탁 멎는 것만 같았다. 왜 다짜고짜 활을 쏜 거냐고 화를 내려던 참이었는데. 맑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쓰라린 감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첩자가 아니었어?”
말을 마친 그가 턱을 붙잡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의문스러운 눈길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 표정이 너무 기이해서, 나 또한 숨을 멎은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진실이었네.”
“뭐가요?”
“정유년이야. 곧 정월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는 순간 팔을 타고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비명에 남자가 내 팔을 붙잡고는 상처 부위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일단 치료해야겠네.”
나를 앞질러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한다. 자꾸 그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한동안 혼자 걷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왜 여기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달빛에 드러난 그 눈빛을 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너무도 기묘하고 애달파서.
***
상처가 아무는 며칠동안 여기 생활에 꽤 익숙해졌지만 걱정은 한 줌도 줄어들지 않았다. 과제 제출은 고사하고 지금껏 나를 찾아다닐 가족들과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니, 자꾸 가슴께가 먹먹해진다. 이 세계에 처음 도달한 그 장소에 몇 번을 가보았으나, 아직까지 돌아갈 방법은 미지수다.
듣자 하니 활을 쏜 그 위인은 태자라던데, 여기 있으면서 알게 된 건 태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여간 쉽지 않다는 거다. 처음 이 궐에서 마주쳤던 노인의 말에 따르면 평소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내가 나타난 이후 그 얼굴을 보는 게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태자를 만나야 되는데. 분명 노파도, 처음 본 그 노인도 태자가 돌아갈 방법을 알 거라고 했는데.
고심 끝에 태자의 궁으로 뛰어갔지만 그는 없었다. 노파의 경고가 귀에 맴돌았지만, 얼른 다시 내가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게 먼저니 죄책감이랄 것도 딱히 없다.
그의 방은 벽면을 제외하고는 단조롭기 그지없다. 긴 검과 활이 줄줄이 벽을 수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벽면을 주욱 둘러보다가 갑작스레 더오른 생각에 머리가 아파온다. 활? 화살. 촉. 분명 중앙박물관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게, 검게 녹슨 화살촉이었는데. 그럼 혹시 그 활촉에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벽에 걸린 화살을 하나씩 뚫어져라 바라본다. 다시 나를 돌려보내주지 않을까 싶어서.
“남의 방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다니. 예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군.”
갑작스런 인기척에 뒤를 돌았을 때엔 이미 늦은 후였다. 낯익은 목소리에 몸이 굳는 것만 같다. 뒷짐을 지고 선 태자의 눈매가 꽤나 날카롭게 변했다.
“일단 주인 없는 방에 들어온 건 미안해요. 그런데 저도 제가 있던 세계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가 없어요. 일단 협조 좀 해봐요.”
그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와 내쫓을 기세로 내 팔을 세게 잡아당긴다. 아직 덜 아문 상처에서 찌릿한 감각이 몰려왔다. 팔을 붙잡은 채로 얼굴을 찡그리니 그가 손을 멎고는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아, 미안.”
“미안하면 협조해줘요.”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일단 여기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줘요.”
“마음대로 해. 쉽지 않겠지만.”
“저기 근데 그 쪽 몇 살이에요?”
내 말에 태자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아니, 대화를 곱씹을수록 기분이 별로다. 한참 어려보이는 데,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려니까.
“방년 스물.”
“뭐야, 나랑 동갑이네. 그럼 나도 말 놓을게. 우리 나이 같으니까. 뭐 그쪽이 태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곳은 계급이 없거든...요.”
태자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리고 한참 끝에 그가 뱉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누가 태자래?”
“밖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러던데.”
“저주받아 별궁에 쫓겨난 내게 태자라니. 더 이상 난 유리가 아니야. 그건 심복들의 바람일 뿐이지.”
“저주?”
정국이 침묵한 채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표정이 어딘가 애달파서 자꾸만 눈을 피하게 된다. 오랫동안 바닥만 보고 있는 내 귓가에 태자의 음성이 가까워진다. 그가 갑자기 나를 등진채로 뱉는 말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리고 정유년 정월에 그 저주를 풀어줄 귀인. 너.”
*
안녕하세요. 스페스입니다.
일단 느낌의 공동체 다른 작가님들과 신알신 한 여러분들께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노잼에다가 단편이라는데 분량조절 및 시간조절 못해서 또 올라올 예정이고요...
봐주실지 모르겠지만 다음 편은 화요일 저녁 10시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죽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