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혁]
"아, 추워죽겠네..."
엄마의 심부름으로 집 앞 슈퍼에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두부,파,라면... 주섬주섬 들고 계산대 앞으로 가다가 술이 가득 들어있는 코너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나도 이제 성인인데...봉인해제 해볼까?"
맥주 한 병을 손에 같이 들고 쭈뼛쭈뼛 계산대로 향했다.
오늘은 익숙한 슈퍼 아줌마 대신 낯선 젊은 아저씨.
"야."
"...네?"
"이건 안되지.다시 갖다 놓고 와."
아저씨는 맥주를 가리키면서 손짓하고는 나머지 물건들을 봉투에 담아준다.
"아니, 이건 왜 안돼요?"
"속일 생각 하지마라.얼굴에 '나 고딩이예요.' 써져있네."
"저 스무살인데요?"
"민증 가지고 오던지."
말을 듣고는 자랑스럽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응? 어디갔지.
당황한 나를 보고는 거짓말은 나쁜 거라며 꿀밤을 먹인다.
"아저씨, 지금 민증을 놔두고 와서 그런 거예요!저 올해 스무살이라니까요?"
"아아, 알았으니까 다음부턴 술 사러 오지마라."
참 속이 터지겠다.
내가 그렇게 어려보이나? 다음에는 화장을 하고 와야 되나?
투덜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
고3 시절을 같이 의지하며 보낸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실컷 놀고 집으로 오는 길.
깜깜해진 밤거리를 혼자 걸으니까 좀 으시시하다.
뒤에서 느껴지는 발소리에 괜히 더 빨리 걷게 된다.
그러자 더 빨라지는 발소리.
어떡하지,어떡하지.
핸드폰을 꼭 쥔 채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아,깜짝이야."
"고딩, 넌 발걸음이 왜 이렇게 빠르냐."
바로 뒤에 서 있는 낮에 그 슈퍼 아저씨.
"고딩 아니라니까요?이제 졸업해요!"
"너 얼굴에 뭘 이렇게 진하게 바르고 다니냐."
"왜요?"
"색칠공부했네."
뭐 이런 아저씨가 다 있어.
오늘 화장 나름 잘 된 것 같아서 기분 좋았는데 색칠공부라니...
휙 돌아서 걸음을 재촉했다.
"미안,고딩!같이 가자."
웃으면서 뛰어와서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곤 삐졌냐고 묻는 아저씨.
"그러게 누가 화장 진하게 하래, 치마도 너무 짧고."
"신경쓰지마요."
툴툴거리며 일부러 땅만 보고 걷는데 계속 따라온다.
뭐야, 나 데려다주는 건가? 나 좋아하나? 좀 잘생겼는데 아저씨는 내 취향 아닌데...
"무슨 생각하냐."
"왜 자꾸 따라와요?혹시..."
"혹시 뭐."
말하려다가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그러자 아저씨는 갑자기 웃는다.
"왜 웃어요?"
"너 내가 너 좋아한다고 착각했지? 너 내 스타일 아니거든?"
"저도 아저씨 제 스타일 아니거든요?"
"아저씨?누가 아저씨야."
손으로 아저씨를 가리키자 내가 벌써 그 정도로 늙어보이냐며 한숨을 쉰다.그리곤 자긴 아직 잘 생기고 젊다며 혼자 중얼중얼.
조금 귀엽네.
"여기 우리 집이예요,안녕히가세요."
아파트 앞에 다다라서 인사를 했는데
"우리집도 여긴데."
헐, 이웃주민이었다니.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서 보니 나는 7층, 아저씨는 10층.
이때까지 왜 한번도 못 봤을까.
자주 마주치면 뭐 좋을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