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틴/버논X정한] 무릎과 무릎 사이 下
비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핏 들은 뉴스에서는 이른 장마라고 했다. 하늘도 컴컴하고 공기도 꿉꿉하다. 번쩍번쩍 번개도 쳤다. 트라우마가 찾아올 때 그랬던 것처럼 눈앞이 새하얗게 되었다가 새까매졌다가를 반복했다. 아니, 이건 번개가 아닌가. 흐릿해지는 의식 가운데 오른쪽 다리가 시큰거리는 걸 느꼈다. 비가 오면 늘 있는 통증이었다. 그러나 늘 겪는 그것과는 달랐다.
집에 들어섰을 때, 오늘따라 어둡고 음침했다. 비밀을 잔뜩 머금은 던전처럼 스산한 기운이 감돌아서 약간 멈칫거리게 된다. 애도 아니고. 겁먹은 건가. 생각해보니 한솔이와 함께 살고부터 항상 내가 귀가할 때면 집엔 늘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못해도 현관 앞까지 마중 나오는 한솔이한테 늘 “우리 강아지, 집 잘 지켰어? 우쭈쭈.” 거리면 묘하게 표정이 변하던 걸 낙으로 삼곤 했는데. 늦는다 말한 덕분인지 한솔이가 아직 안 들어 왔나보다. 한솔이도 이제 친구들이랑도 시간도 좀 보내고, 여자 친구도 사귀고. 평범하게 지내야 할 텐데. 잘생겨서 인기도 많을 텐데, 우리 한솔이. 한솔이는 나처럼 열외인 삶을 살기 바라지 않는 마음이 크다. 죄책감처럼 나를 보필하며 사는데,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사고가 난 덕에 군대도 안 갔고, 귀찮은 체육 실기 평가 같은 것도 늘 열외였으니. 나를 안쓰럽게만 보고, 내 무릎을 상전 모시듯 조물락거리는 어린 손이, 이제 다 커서 나보다 커다란 손이 되었지만, 약간 차가운 그 손이 고맙지만 이제 그만할 때도 된 것 같다. 오늘은 내가 한솔이를 데리러 가볼까. 한솔이네 학교 앞으로 가려 몸을 돌렸을 때였다.
헉. 밭은 숨소리가 들렸다. 약하고 낮은 소리여서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못 알아챌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방문 앞으로 가서 섰다. 한솔이와 내가 함께 자는 침실은 조금 문이 열려있었다. 헉, 헉. 연이어 같은 소리가 났다. 자나? 아니, 어디 아픈가? 확신하지 못하지만 틀림없는 한솔이였다. 홀린 듯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침대에는 한솔이가 기대어 앉아있었다. 방안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앉아 있는 모양새며 윤곽이 한솔이었다. 문을 조금 더 열었다. 한솔이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입고 벗어놓은 옷을 펼쳐놓고. 내 이름을 부르며. 성기를 감싸쥐고. 나도 아는 그 행위를, 동작을 반복하며, 내 이름을 부르면서.
“너, 뭐... 해?”
말을 간신히 뱉었다. 목구멍에 걸려 소리가 잘 나질 않았다. 잔뜩 갈라진 소리가 났다. 한솔이가 내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손은 멈추지 않는다.
“너, 너... 지금, 뭐 한 거야?”
“보면 몰라?”
한솔이가 씩 웃었다. 번쩍. 창문 밖으로 번개가 쳤다. 한솔이의 호흡이 가빠진다. 번개가 치면 이어서 천둥이 따라온다. 사고가 났던 기억이 몸이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굴렀던 그 날. 무력하고 무서웠던 날. 오늘처럼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눈앞도 분간하기 어렵고, 낮인데도 어두웠다. 미끄러져 내린 절벽을 아무리 기어오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부러졌는지 오른쪽 다리도 영 말을 듣지 않았다. 비틀비틀 서있기도 어려웠다. 아무리봐도 사람 다니는 길은 절대 아닌 것 같고, 아까 내려오던 길에서 한참은 굴러 떨어졌으니 위치가 어딘지 영 파악도 안 된다. 비는 점점 더 많이 오고. 이렇게 죽는 건가. 개죽음도 이런 개죽음이 없네. 저체온증으로 죽을까, 굶어죽을까. 어떤 쪽이 더 빠를까. 온갖 비극적인 상상으로 절어가고 있었다.
“형아.”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솔이다!
“한솔아! 최한솔! 형 여기 있어!”
“형 거기 있어?”
“형 여기 있어! 한솔아! 가서 어른들 모시고 와! 여기 너무 미끄러워서 올라갈 수가 없어. 알겠지? 위험하니까 조심하고!”
“형 다리 아파?”
“어? 어... 어떻게 알았어? 다리 조금 다친 거 같아.”
“다행이다. 알겠어, 형. 어른들 모시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어? 어, 알겠어. 형 여기서 기다릴게! 알겠지? 한솔아! 조심해!”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위쪽에서 한솔이의 목소리가 너무도 또렷하게 들렸다. 한솔이가 나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다. 한솔이가 나를 살려줄 거야.
그런데,
다리 다친 건 어떻게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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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쭈쭈, 애 달래듯 한솔이를 대할 때마다 짓던 묘한 표정이 있다. 평소에 한솔이는 아기같고 천사같은 말간 얼굴인데, 내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울상인 건지, 화가 난 건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게 사춘기라서, 저가 다 컸다고 생각해서 내 애기 취급에 심통이 난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사실 조금 무서웠다. 그럴 때마다 한솔이 같지 않아서. 그러니까 나는 무의식중에 의식하는 것을 피해왔던 거다. 한솔이가 짓던 비틀린 그 표정이, 비웃던 입꼬리가, 차갑던 눈빛을. 한솔이가 보이던 그 모든 게 나를 지금처럼, 마치 창녀처럼, 성녀처럼, 그의 아래에 헉헉대는 불쌍한 남창처럼. 그렇게 보는 한솔이를, 애써 무시해왔던 것이다.
“형은 내꺼야.”
비틀대는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솔이가 진득하게 속삭인다. 힘이 빠질 때마다 용케도 알아채고 자세를 고쳐 잡는 한솔이가 무섭다. 얘는 나의 작은 떨림만으로도 내가 좋은지, 싫은지, 힘든지 다 알 터이다. 그러니까 한솔이는 지금, 아마, 내가, 미치도록 좋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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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상 중간에 생략한 부분이 있어요.
이어지는 에필로그도 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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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파는 처지에 서로 돕고 살아야죠 데헷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