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외워보자! 03
w. 2젠5
"진짜?"
조용히 해! 이동혁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진짜지? 입을 막아도 이동혁의 커다란 목소리는 숨길 수가 없었고, 난 결국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약초학 입문 I " 이라는 두꺼운 남색 책으로 이동혁을 후려칠 수 밖에 없었다. 5학년 학생대표인 이제노의 이름과 함께 그리핀도르 남자애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후플푸프 여자애의 모습을 본 다른 아이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잔뜩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밖으로 뛰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시민! 다시 한번 얘기해봐! 진짜지?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하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 뒤를 끈질기게 따라오는 이동혁은 덤이었다.
"너 미쳤어? 황인준 표정 못 봤냐??"
자칭 레번클로 연금술 박사인 황인준의 흥미롭다는 표정을 떠올리자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앞머리가 잔뜩 헤집어졌지만 신경쓰지 않고 복도를 쿵쾅대며 걸었다. 그런 나의 뒤를 이동혁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킬킬거리며 내 뒤를 따라오고 있어, 난 더욱 걸음을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이 가! 이동혁이 내 망토 끝자락을 약하게 잡아당기며 징징거렸다. 이래서 오래된 친구가 무서운거라니까. 내일부턴 이동혁과의 17년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리라 다짐하며 코너를 돌았다. 그때, 저 멀리서 퀴디치 연습이 끝난 것인지, 저녁식사를 먹으려는 것인지 저 멀리서 후플푸프 팀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고, 파수꾼인 이제노도 보였다. 제노야! 이제노를 부르는 이동혁의 목소리에 또다시 부리나케 반대쪽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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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노가, 내가 좋대."
조용한 도서관 안, 사람이 별로 없는 위인전 코너로 와 이동혁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동혁의 눈이 서서히 커지더니 결국 입과 눈의 크기가 똑같은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말? 이동혁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도서관의 끝 쪽으로 이끌었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이동혁이 제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망토 안 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맣지만 분명하게 빛나는 유리병. 이거 펠릭스 펠리시스 -행운의 물약-야? 내가 잔뜩 놀라 커다랗게 묻자, 이동혁이 제 기다란 검지손가락을 입 앞에 가져다 대며 연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사실 이동혁은 혼혈왕자와 해리포터를 잇는 마법 약의 왕자라 이동혁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동혁의 의미심장한 표정 탓에 예쁘게 빛나고 있는 펠릭스 펠리시스는 너무나 위험한 것 처럼 보였다. 이거 왜? 펠릭스 펠릭시스를 손가락으로 두어번 건드리자, 이동혁이 낮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사실, 나 어제 이거 이제노 오렌지 주스에 탔어.
그러니까, 이제노 어제 이거 마셨다고. 사랑의 묘약의 힘으로 태어나 사랑을 할 수 없었던 톰 리들 처럼, 이제노가 내게 펠릭스 펠릭시스의 힘을 빌어 고백을 한 거라면, 그냥 단지 행운의 힘을 빌어서 부린 객기일지도 몰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어제, 날 바라보던 이제노의 눈빛이 떠올라 더욱 침울해졌다. 5년동안 이제노를 알아왔지만, 아직 부족했나보다.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이동혁이 제 입술을 뜯었다. 그렇지만, 제노가 널 좋아했던게 거짓이라는 건 아냐. 시민. 이동혁이 유리병을 제 망토 안에 급히 쑤셔넣으며 속삭였다. 게다가, 이제노는 자기가 이거 마신것도 모를 걸. 걔는 어제 달빛에 취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할거야. 이동혁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나를 위로했다. 무려 5년이었다. 이제노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긴 시간이. 펠릭스 펠리시스를 마시고 고백을 했다고 해서, 이제노의 기억이 희미한것도 아니고, 난 한번 터져버린 마음을 다시 추스릴 만한 위인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노가 좋다고 말했고, 또 말할 자신도 있어. 이동혁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진짜? 도서실 안이 쩌렁쩌렁 울릴만큼 이동혁이 소리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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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어디가는데!"
이동혁이 제 망토 안쪽을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까 한 말을 잊었냐는 뜻이겠지, 그렇지만 정말, 뱉은지 얼마 안된게 분명한 껌을 밟은 것 마냥, 내 검은 스니커즈는 멈추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벽 뒤에 숨어 땀에 절은 이제노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훔쳐볼 수 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때도, 이제노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여기서 평소란 어제를 제외한 모든 날이다.) 어제의 그 눈빛을 다시 찾기란 힘들었다. 역시, 펠릭스 펠리시스의 힘을 빌린 객기였던 걸까. 이동혁, 나 오늘 밥 안 먹을래. 울적한 마음에 힘겹게 발을 떼 벽 뒤에서 나오면,
"아침도 깨작거리더니, 저녁도 거르면 못 써."
짐짓 단호한 눈으로 날 막아서는 이제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