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요소와 픽션이 섞인 소설입니다. 관련 언급이 불편하신 분들은 읽지 말아주세요.
"너, 언제까지 그따위로 살 테냐?"
한 남성의 묵직한 음성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지훈은 마른 침을 삼켜내며 그 남성이 쏟아내는 지배자의 아우라를 견뎌내었다. 험악한 분위기와 목소리. 박지훈, 그의 인생을 지배한 한 남성의 목소리는 마치 사슬과도 같았다. 그의 혀는 독사와도 같아 불쌍한 조선 백성들의 피를 말려버렸고, 그의 손은 동료를 죽이고 죽인 피 묻은 손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자,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그와 단둘이 남겨질 때에는 차라리 창 밖으로 몸을 던져 투신하는 게 백 번 낫지 않을까 싶은 지훈이다. 한 번은 큰 마음 먹고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려본 적이 있었으나, 그 이상 다리를 뻗어낼 수가 없었더랜다. 지훈의 아버지, 아니, 그 괴물은 눈빛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 조선에서 '박종연'을 모르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처음에는 독립 투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그가, 이제는 매국노라 불리며 악명을 떨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얀 제복을 차려입고 천왕에게 복종하던 신 무서운 줄 모르던 놈이었다. 적어도 지훈은 그렇게 제 아비를 평했다.
"조선이 싫은 게냐, 아니면... 내가 싫은 것이냐?"
"......"
지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둘 다 싫었다. 부당한 지배를 당하고 있는 제 나라가, 무능한 왕이, 어린 나이의 지훈은 너무나도 미웠다. 그저 주먹을 쥘 뿐이었다. 나름의 반항이었다. 낑낑 거리면서도 항복을 외치지 않는 것, 그게 이 나라의 백성들과 지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나도 더이상 너와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다. 총독부가 싫다면 떠나야지, 그럼. 놓아주겠다."
"... 진심이십니까?"
"흐음... 배덕환, 그 자가 누군지는 너도 잘 알지? 조선 놈들 사이에서는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놈이야. 그 새끼가 행방불명이 된 지도 꽤 됐는데... 아직까지도 시신이 나오지 않고 있어."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 배덕환한테 숨겨둔 아들 놈이 하나 있어. 이름은 알려진 바 없지만, 그 녀석의 거주지는 완벽히 밝혀졌지. 그 녀석 집으로 가서 그 아들 놈을 감시해. 운이 좋으면 배덕환을 거기서 볼 수도 있겠지."
"이젠 놓아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훈은 두 눈을 감아내린 채로 소리를 내질렀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의 아버지란 사람은. 놓아줄 듯 하면서도 지훈을 제멋대로 굴리고 희롱했다. 지훈의 손으로 오래된 벗을 죽여야 했던 날, 옆집 이웃을 죽여야 했던 날, 첫사랑이었던 소녀를 제 손으로 보내야만 했던 날. 종연은 지훈의 것들을 하나 둘 지워내며 지훈을 일본 대제국의 노예로 만들고 있었다. '대제국.' 지훈은 그 말을 입에 담지도, 삼켜내지도 않았다. 이 조그마한 땅 하나 집어삼킨다고 지구를 통일할 수가 있을까, 서양을 아우를 수 있을까. '大'라는 단어는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小'에 가까웠다. 이 작은 대륙 하나 제 손에 쥐겠다고 아둥바둥 거리는, 짐승 같은 놈들.
"죽고 싶습니다... 차라리 절 죽이세요, 네?"
"......"
"더이상 제 손으로 오랜 벗들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함께 죽겠습니다."
"... 총독부로 출근할 일은 없도록 해주겠다. 보고를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결국 네 재량이지."
"......"
"다녀, 아니... 가거라."
종연은 몸을 돌려버렸고, 지훈은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정말 이렇게 끝낼 수 있는 것일까. 정말 이걸로 끝인 걸까. 지훈의 머릿속은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굳은 의지에 차있었다.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저 자는 자신이 기억하던 '독립운동가 박종연'이 아니라고.
지훈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처참히 떨어져나간 종이 조각들. 이리도 쉽게 무너질 존재이거늘, 왜 우리는 그리 원통한 삶을 살고만 있었나. 지훈의 손이 책상 끝에 자리한 유리 액자에 닿았다. 반쯤 잘린 듯한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자, 아버지가 새로 맞이한 새 일본인 여성의 얼굴이 액자에 가득찼다. 보기 싫었다. 지훈은 어머니의 사진만을 챙긴 뒤 미련없이 총독부를 떠나갔다. 그들의 제복처럼, 그들의 본거지처럼 조선이라는 나라가 새하얗게 지워지고 있었다.
설원에 꽃이 필까요
달곁에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지훈은 떠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돈도, 옷가지도 전부 일본의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손을 떼어내겠다 해놓고서는 막상 그의 일상을 차지한 모든 것들이 대제국이었다. 크긴 크다, 그들의 영향력이. 지훈은 새하얀 한복을 챙겨입고는 출가를 할 준비를 했다. 어머니의 사진과 어머니가 남겨주신 책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버선들, 어머니가 남겨주신 보자기와 손수건만 챙긴 채로 마지막 채비를 마쳤다. 하인들은 도련님이 갑자기 이상해졌다며 문 밖에서 끙끙 앓고 있었고, 영문을 알 리가 없는 새 부인은 복도 쪽을 기웃거리며 지훈을 걱정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진심으로 지훈을 아들로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모두가 기다리던 한 소년이 잊고 지내던 조선의 향기를 내뿜으며 문을 열었다. 한복과 짧게 잘린 머리가 준 괴리감이 꽤 크긴 했지만, 누가 봐도 영락없는 조선의 소년이었다. 손에 꽉 쥐어든 분홍색 보자기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집을 나서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 맑은 눈빛도 흔들렸다.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한 여인이 보였기에.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거니? 아직도 내가 미운 거니?"
"당신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 왜... 집을 떠나는 거니?"
"여긴 제 방이 아닙니다. 카사이 료스케의 방이죠. 제 이름은 박지훈입니다."
지훈은 그렇게 집을 나섰다. 아니, 카사이 가(家)를 벗어났다.
자신을 옭아매던 사슬을 벗어던진 그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한적한 시장이었다. 자신의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서 눈물 자국이 비치는 듯 싶었다. 모두가 아팠다. 어쩌면 병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모두가 아프고, 슬펐다. 그런 곳에서 살아가고 있던 것이었다. 가식적인 웃음으로 가득찼던 연회장과 카사이 가, 그리고 이 지독한 병동. 그 어느 하나 정상적인 곳이 없었다.
시장에서 국수 한 그릇을 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랬다. 무거웠던 어깨가 점점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선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훈의 조선을 말이다. 그러나 그의 사소한 행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의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조선을 팔아넘긴 매국노와 한패인 몸이었고, 잠시 벗어났다고 한들 그는 분명 '카사이 료스케'였다. 그가 남기고 온 짐들의 주인은 '카사이 료스케'가 아닌 '박지훈'이었으니. 그는 아직 '카사이 료스케'의 가면을 완벽히 벗어던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인들이 기억하는 '카사이' 부자의 배신. 독립이라는 말로 백성들을 현혹시켰던 그들의 만행을 조선인들이 어찌 잊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지훈은 묵묵히 견뎌내기로 했다. 일본인이 왜 한복을 입고 있냐, 일본에게서 버림을 당한 것이냐는 몇몇의 질타들을. 주먹질들을. 박지훈은 조선을 배신했고, 조선은 박지훈을 배신했다. 지훈이 돌아갈 집은 없었다. 아직도 카사이 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닐까, 그런 멍청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여긴 카사이 가였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박지훈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한복을 입은 이 어린 청년의 이름은,
카사이 료스케였다.
"......"
상하이로 떠날까. 아예 대륙을 횡단하는 편이 나을까. 어쩌면 지훈의 아버지가 지훈을 말리고, 붙잡았던 이유가 이런 이유는 아니었을까. 이미 늦어버렸다고, 우리가 돌아갈 자리는 없다고.
지훈의 눈에 투명한 열매가 맺혔다. 그것은 금새 과실을 맺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둑, 투둑. 그것이 씨가 되어 더 큰 열매가 맺힌다. 또 떨어진다, 투두둑. 어느새 손등을 흠뻑 적셔가고 있었다. 지훈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 열매들을 수확했다. 따도, 따도 금새 과실이 맺힌다. 멈추지 않았다. 풍년이었다. 지훈은 정말로 행복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오른 산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모든 것을 방관하고만 싶었다, 그래서 오른 길이었다. 그런데 신은, 그런 지훈의 여정마저 허락하지 않은 듯 싶었다. 이젠 비가 내린다. 하늘도 열매를 맺었나 보다. 비가 쏟아지고 지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하나 둘 삼켜내고 있다. 조선 백성들은 행복할 것이다. 이토록 풍년이었던 적이 있던가.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지훈의 입꼬리도 높이 치솟았다. 좋지 아니한가, 행복하지 아니한가. 지훈은 들뜬 마음을 가득 안고 산 정상에 올랐다. 해는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 무엇 하나 지훈을 비춰주는 것이 없었다.
"어머니, 잘 지내십니까. 거기는 평온하신가요. 저도... 저도... 행복합니다..."
산 정상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있었다. 그 놈이 유일한 지훈의 아군이었다. 묵묵히 지훈의 옆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훈은 그 녀석을 벗 삼아, 집 삼아, 아비 삼아 지친 제 몸을 맡겼다. 오늘 처음 받은 위로였다.
그때였다. 나무의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이 낮게 깔리는 것으로 보아, 남성의 것이 분명했다. 그 목소리는 꽤 부드러웠다.
"저기요? 길을 잃으신 건가요?"
"......"
"여행... 중이신가요?"
언젠가 비가 멈춘 듯 싶었다. 지훈의 옷을 가득 적셔오던 빗줄기가 이젠 더이상 쏟아지지 않는다. 부끄러운 듯 제 모습을 숨겨버렸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해는 이미 도망간 지 오래였다. 그래, 넌 누구길래. 구름을 걷어내고 나에게 손을 뻗는가. 지훈은 숨을 헐떡이며 그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피, 피...! 피가 나는데요?!"
"......"
"이봐요,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얼른요!"
이것이 오늘의 두 번째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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