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슙뷔] 꿈에서 찾던 그대가 당신인가 봅니다.
“어머, 얘 저기 윤기 도련님 지나가신다.”
“어쩜 저리 멋있으실까?”
“내가 윤기 도련님께 시집가면 좋을 텐데….”
“꿈 깨라, 얘. 도련님이 어디 우리한테 눈길 한 번 주실 분이니?”
마을 여인들의 쑥덕거림은 들리지도 않는지 윤기는 잘도 무표정인 얼굴로 집을 나선다. 어렸을 때부터 말도 없고 무뚝뚝한 윤기를 꼬여내보려고 많은 여인들이 치근덕댔지만 윤기는 그저 항상 짓던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하게 내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본디 못 먹는 감이 더 탐난다고, 양반집안의 외동아들에다가 학식도 뛰어난 윤기를 포기하기는커녕 달라붙는 여인들만 더 생길 뿐이었다. 사실 윤기가 마을 여인들을 본채도 하지 않는 이유는 꼭 찾는 사람이 있기 때문인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꿔왔던 꿈속의 아이, 그 아련한 기억의 파편을 찾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얼굴도 보고 이름도 제 입으로 불렀는데 이상하게 꿈만 깨면 얼굴도 흐릿하니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고 이름도 이름은 아예 생각도 안 나는 그 아이. 그래도 혹시 마을에 살까 산책이라도 나가는 척 여기저기 보고 다녀도 눈길이 가는 아이가 없었다. 꿈속에서 저를 향해 지어주던 미소가 너무나 따뜻해 반해버렸는데 현실에서는 눈곱만큼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 그 아이가 야속하기도 하다. 그래도 혹시나 마주칠까 오늘도 집 밖을 나섰는데 역시나 야속한 아이는 저에게 머리카락 한 올도 보여주질 않는다. 허탕을 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자에 들렸다. 집으로 돌아가 봤자 혼기가 차가는 외동아들이라 그런지 빨리 장가들기를 바라는 것 같은 어머니 눈치도 보이고 그 동안은 윤기의 마음가는대로 내버려두던 아버지마저도 요새는 헛기침을 하시며 제게 혼인할 여인은 있냐며 말을 걸어오는 통에 윤기는 집 안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냇물 옆에 예쁘게도 핀 개나리를 바라보는 윤기의 마음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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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주겠다. 그 때까지 혼인할 여인을 데려오지 못하면 내가 정해주는 짝으로 혼례를 올리도록 하자.”
“아버지,”
“많이 기다렸지 않느냐.”
“…….”
윤기가 차마 아버지 앞에서 한숨을 쉴 수는 없어서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왔다. 여태까지 잘 버텼는데 한 순간에 그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 지경에 처했다. 잔뜩 화난 표정의 윤기를 옆에서 달래주던 어머니도 작게 한숨을 쉬셨다.
“아버지가 그만하면 많이 인내하셨다, 윤기야.”
“저도 압니다. 아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 말만 남기고 집을 빠져나온 윤기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살기로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잘 모르는 상대와 혼인하는 것도 싫고, 꿈속의 그 아이가 아니면 혼인하는 것도 싫어서라도 꼭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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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윤기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뒷산도 가보고 조금 먼 옆 동네도 가보고 구석진 곳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마을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봐도 꿈속의 아이는 나타나주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제 속을 태워야 나타날까. 잠을 잘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 할 시간도 아껴가며 찾는 아이는 일주일 째 밤이 되는 오늘에도 나타나주지 않았다. 윤기는 도망이라도 쳐야 되나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 동안의 부모님 은혜가 있고 제가 엄연히 지켜야 할 효가 있는데 도망치는 건 도저히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도 비울 겸 집을 나섰다. 평소 자주 가는 정자에 앉아 흐르는 시냇물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군가 해서 슬쩍 곁눈질로 살피는데 갑자기 제 눈앞에 가지 채 꺾인 개나리가 나타났다. 개나리. 윤기가 놀란 얼굴로 몸을 완전히 돌려 바라보니 화사하게 웃고 있는 한 사내아이가 개나리를 들고 서있었다. 순간 윤기의 머릿속에 여태까지 꿔 왔던 꿈이 스쳐지나가며 그 사내아이의 얼굴이 확 들어왔다. 윤기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너는 누군데 이 늦은 시간에 여기 있느냐.”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어제 이사 왔는데…. 모르셨나 봅니다.”
윤기는 태형의 말에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 제 종인 덕만이가 제가 한참 태형을 찾으러 돌아다닐 때 누군가 이사가 왔노라고 말했던 것 같고. 그 때 태형을 찾는데 너무 열중해서 시끄럽다며 입을 막아버렸던 제가 생각난 윤기가 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윤기가 왜 그러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태형이가 괘씸한데 너무 좋아서 윤기는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태형의 손을 잡았다.
“내가 여태 꿈에서 찾던 그대가,”
당신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