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친하던 부서 동료들끼리 점심을 먹던 도중, 그 사이에서 한 사원이 우스갯 소리로 이 회사가 아무리 알파만 득실대는 회사라지만 그 사이에 설마 오메가 하나도 없을리는 없을 거라고 추측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원들은 만약 그랬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걸렸거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사를 했겠지 하고 웃어넘기며 그냥 넘어갔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에 크게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그 이야기에 대해 깊게 생각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 사원이야 원래 그런 농담이나 별 시덥지 않은 류의 생각을 자주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가끔 사내에서 오메가의 달짝지근한 향이 나기야 했지만 그거야 알파의 본능 탓을 하거나, 혹은 밤 생활 문란한 사원 하나가 오메가의 페로몬을 잔뜩 묻히고 온다거나 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가 이렇게 크게 의미부여 하지 않던 한 사원의 실 없는 농담 섞인 말에 의의를 두기 시작한 건 며칠 전 이제 갓 입사한 신입 사원의 말끔한 책상 밑에서 발견 된 약통 하나. 분주한 퇴근시간에 발견해 미처 주인에게 돌려주지 못 한 이 크지 않은 알약 몇 알 남은 약통. 약통 정도야 오다가다 얼마든지 섞여 들어 올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오메가가 흔히 한 달에 한 번, 꼭 챙겨 먹어야 하는 억제제가 아니라 지병이 있어 주기적으로 챙겨 먹는 약 일수도 있을 거라며 그것 또한 주인을 찾아 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원의 말을 듣고 나니 의심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의심만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 뿐이다.
다음 날 출근하고 나서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잡고 앉아 이름이라도 써 있을까 싶어 약통을 들여보길 수 차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못 봤을 미세한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표혜미라는 이름 석 자와 기간. 단지 유통기한이 아닌, 오메가의 히트 싸이클 주기임을 직감 할 수 있었다. 이걸로 약의 성분 검사를 따로 해보지 않아도 이건 오메가 억제제라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으며, 표혜미라는 이름 또한 이 약통이 떨어져 있던 책상 주인의 이름과 동일하다. 가엾게도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필 나에게 걸릴 건 뭐람. 정황 마저도 풋내기 인 거 티 내기라고 하는 듯 정직하다. 작게 읊조리는 혼잣말과 함께 오른쪽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이렇게 일찍 들켜버리면 나중에 재미 없는데."
요근래에 들어 평소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아 항상 가려놓던 사무실 쪽 창문 블라인드를 걷어놓거나, 업무 외에 하게 된 일은 신입사원 표혜미 씨를 줄곧 관찰하는 일이 내 하루 중 일과가 되었다. 그로 인해 내가 혜미 씨에 대해 알게 된 점은 초면에 대해선 낯가림은 있으나 밝고 싹싹한 성격인 탓에 다른 사원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고 있으며 나이도 어려 우리 부서 내에 막내이고 막내란 타이틀에 걸맞게 꽤, 귀엽게 생겼다. 히트 싸이클 기간이야 약통에 쓰여진 것 대로 일 것이고, 그래서 인지 요즘 혜미 씨의 업무 처리량도 나날이 급속도로 떨어졌고, 히트 싸이클 기간에 가까워 질수록 손톱을 물어 뜯으며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혜미 씨의 동기들은 뭐 잃어버린 거 있냐고 묻거나, 불편한 곳이라도 있냐고 묻는 물음의 숫자도 늘어갔다. 속사정을 털어 놓을 수 없어 답답하기야 하겠지만 오메가 주제에 기여코 이런 데 까지 기어들어 온 댓가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들어온 경위에 대해선 나중에 단 둘이 앉아 차분하게 묻기로 하고 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고 먹잇감을 천천히 죄여오는 육식동물이라도 된 것 마냥 사무실 안을 어슬렁 거리다가 혜미 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약하게나마 떨림이 느껴지는 것 정도는 캐치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최대한 아닌 척 하려고 하는 것도.
"혜미 씨, 어디 불편한 곳이나 잃어버린 거라도 있어요?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해요. 혜미 씨 손도 예쁜데, 애도 아니고 왜 물어 뜯어요."
"네? 아, 아니…"
"필요한 거나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나 이야기 하러 와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듯 했지만 술술 넘어가며 타자를 치던 손이 가끔은 엇나가는 것도, 그만큼 불안하다는 거겠지. 편안한 웃음을 지어주며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건냈더니 혜미 씨 또한 웃으며 대답을 한다. 그리고 그 편한 웃음을 짓기 전에 아주 잠깐, 눈빛이 흔들리던 것도. 본인은 최대한 감추려 하는 것 같지만 흔들리던 눈동자며,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을 때 움찔 거리던 건 이미 물증이 있는 나에게는 혜미 씨가 오메가라는 심증을 더욱 확실하게 굳힐 수 있는 계기가 하나하나 늘어나게 될 뿐이다. 혜미 씨에겐 누구에게 걸렸을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가득 찼겠지. 약이야 동네 약국 가서도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겠지만 약 제조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야 4일, 길면 일주일. 약통에 쓰여진 기간과 달력을 번갈아 보니 혜미 씨에겐 그 4일이란 시간 조차 버거울 것이다. 이 약통에 쓰여진 대로라면 히트 싸이클은 정확히 내일 시작되니까. 무단 결근, 월차, 퇴사.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라는 예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니 웃음이 나왔다. 한 번 번진 웃음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제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웃음을 겨우 멈추고 약통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들어오세요."
예상했던 대로 혜미 씨다. 히트 싸이클은 당장 내일인데, 당장 필요한 약은 없고, 그렇다고 그냥 회사에 왔다간 손도 못 쓰고 꼼짝 없이 어느 누군가에게 잡아 먹히고 말테지.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자 별 방법이 없어 나를 찾은 건지 영 나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며 바닥만 보며 내가 자리 잡고 있는 데스크 앞까지 조금 오래 걸린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걸어들어온다. 바닥에서 데스크 위를 한 번 훑고 저와 눈을 마주치려고 시선을 조금 더 올려보려는 찰나, 약통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꽤나 사색이 된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먼저 말도 못 꺼내고 입술만 어물쩡 거리고 있길래 먼저 운을 띄워주었다.
"표정이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어요?"
"팀장님, 그, 제가 내일 월차 쓸 수 있을까 해서요."
"내일이요? 내일은 제가 혜미 씨에게 중요한 볼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좀 그런데."
혜미 씨가 월차를 쓴다고 했을 때 이미 나는 혜미 씨가 오메가 라는 것을 잠정적으로 인정하였다. 정황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니 그렇게 오메가라고 단정 지으며 밑을 수 밖에 없었다. 술술 이야기를 꺼냈더니 당황한 눈치이다. 눈도 커지고 안 그래도 사색이 되어 있던 얼굴이 더 질려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저렇게 내 말 하나하나에 표정관리도 제대로 못하고 쩔쩔매기나 해서 어떻게 이런 곳에서 버티려고 했는지 의문일 뿐이다. 조금만 가지고 놀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에 재미있는 놀잇감을 찾은 것 같아 속으로 흡족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약통의 주인 앞에서 그 문제의 약통을 손에 쥐어 들고는 이리저리 훑어 보면서 길어지는 정적을 먼저 깼다.
""혜미 씨는, 사람을 참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
"…"
"월차, 쓰세요."
"네? 하지만, 내일 저한테 중요한 일이 있으시다고..."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리카락은 귀 뒤로 넘겨져 있으며 눈을 내리깔고 서 있는 모습이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섹시하다고 느껴졌다. 하마 혜미 씨가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월차를 쓰라는 제 말은 혜미 씨에겐 그저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일 것이다. 입구 쪽에 걸려진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어느 새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데스크를 정리 해놓고 혜미 씨의 약통 또한 가방에 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할 준비를 했다. 눈으론 아직 어려서 인지, 아니면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잘 못하는 건지 혜미 씨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담으면서.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앞서 걸어 나가려다가 멈춰서 아직도 데스크 앞에 망부석 마냥 서있는 혜미 씨를 보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월차 쓰도록 하세요."
"…"
"이력서 보니까, 여기가 힘들게 들어온 첫 회사에, 집은 멀어서 이 근처에서 혼자서 자취 한다고 쓰여있더라구요."
"아, 네…"
"단 둘이 할 이야기가 있기도 하고, 중요한 일은 제가 내일 가정방문으로 찾아뵙도록 할테니까 어디 가실 생각 말고 집에서 예쁘게 하고 얌전히 기다리고 계세요. 아, 물론 내일 꼭 필요할 게 없어서 어디 마음 편히 나갈 수도 없겠지만요. 그리고 혜미 씨한테 돌려드릴 것도 있어요."
가방 안에서 약도 얼마 남지 않아 가벼운 약통을 찾아 흔들어 보이며 미소를 짓고 나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내가 본 혜미 씨의 마지막 표정은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울기 직전의 표정이였는데 그 뒤는 어땠을지, 예측은 가능하지만 제 눈으로 확실히 보고 나올 걸 그랬나보다. 약은 돌려준다고야 했지만 그것도 쉽게 돌려줄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단지, 그 중요한 일이 다 끝나면 돌려줄 생각이다. 하지만 혜미 씨에게 개인적인 용무는 자주 생기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