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그 일곱번째 이야기.
「어린왕자」
"별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생택쥐페리, 어린왕자 中 -
w.교수
내 가장 청춘에 피었던 꽃.
사막에 불시착 했던 그 6년 전에, 나는 너를 만났다.그 날은 아직까지도 흰 도화지의 까만 선처럼 선명하다.바로 어제의 것처럼.
눈을 감았다 뜨면 펼쳐지는 그 여름의 교실 풍경.
선풍기에 달아놓은 색종이가 펄럭거리고, 적당한 온도의 공기는 나른하게 몸을 휘감는다.
건조하고 눅눅한 그 곳은 내 안에 생생히 살아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어 불러본 적 없던 네 이름과, 항상 창가 옆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나.
오른쪽 대각선으로 시선을 조금만 틀면 친구들과 어울리며 가장 행복하게 웃는 네가 있다.
나는 남들의 머리와 어깨 너머로 흘끔흘끔 널 훔쳐보며 노트에 알 수 없는 선들을 끄적인다.
가만히 흔들리는 머리칼과, 웃을 때 주욱 그어지는 눈매와 입술선, 가슴이 간질간질 해지는 웃음소리, 듣기 좋은 말버릇.
그리고 어느 순간 마주쳐버린 푸르른 빛의 두 눈동자까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도 시선은 엇나가지 못했다.그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바다같은, 또 하늘같은 너의 동그란 세상 안에서 내 모습은 한참이나 일렁거렸다.허겁지겁 눈을 돌린 건 수업종이 치고나서.
나는 무의미한 낙서들로 가득 찬 노트를 덮으머 책상 위로 엎어졌다.
긴장이 풀린 뒷목이 아렸다.그제서야, 비로소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드는 실감에 맥박이 뛰었다.
나는 검푸른 바다 아래 잠시 머물렀었다.
&&&
"야."
귀 바로 옆에서 딱 하고 손가락을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정신 좀 차려.너는 어떻게 그리다가도 자냐?뒤이어 꽤 엄한 잔소리도 이어진다.
게슴츠레 뜬 눈 앞에 유화 붓이 휙휙 왔다갔다 했다.코끝을 자극하는 기름 냄새에 정신이 슬금슬금 돌아왔다.
눈을 뜬 지금.여기는 6년 후다.
"…깨우려면 좀 곱게 깨워주지.아, 기름 냄새…."
"이거보다 더 어떻게 곱게 깨우는데 가시나야."
아래를 내려다보면, 교복 대신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를 멘 몸뚱이가 있다.덩달아 손에 들린 붓과 팔레트.그리고 옆자리엔 동기 김태형.
뒤로는 탁한 색의 시멘트 벽.그 위에 누군가가 어설프게 흉내내어 그려놓은 그래피티 흔적.확실히 6년 후의 지금이었다.
느릿느릿 상황 파악이 끝나고 나서야 모로 쥐고 있던 붓을 고쳐 잡으며 눈을 꿈뻑꿈뻑 감았다 떴다.
다시 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하품이 나오는 거라고, 속으로 혼자 변명도 좀 하면서.
오랜만이었다.그 풍경과, 그 곳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던 박지민은.
내 머릿속 어딘가에 잘게 묻혀져 있었던 기억이었는데.
내 앞에 놓인 캔버스 윗 부분에 검푸른색의 유화 물감이 잔뜩 발라져 있었다.
뭘 그리려고 했더라.팔레트에 짜여져 있는 색들을 봐도 기억이 안 나서 머리만 긁었다.
꿈에 갔다오면서 현실에서의 일을 전부 잊어버린 듯 싶었다.
내가 하는 양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김태형이 혀를 쯧쯧 차더니 타박하듯 말했다.
"김탄소 유통기한 끝났네."
"어?"
"…그냥 너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그리고 냉정하게 내 손에 들린 것들을 거둬가는 것이었다.팔레트며, 붓이며, 심지어는 능숙하게 앞치마까지 풀러갔다.
야, 그래도 나 그 정도는 아닌데…작품 제출도 얼마 안 남았고…내가 괜찮다는데 왜 니가 더 난리야?
더듬 적반하장으로 이어지는 내 변명같은 말에도 단호하게 문 쪽으로 날 죽 밀어낸 김태형이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너 요새 계속 이래.지가 자는지도 모르고 자고, 계속 정신 놓고 있고.그럴 바엔 그냥 집 가서 푸욱 쉬고 멀쩡한 사람 되서 돌아와."
"아니,태형아 나 진짜 괜찮다,"
…니까?
쉬는 게 싫으면 놀기라도 해.쿵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문이 닫히고 강제로 쫓겨났다.마치 언제든 내쫓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잘 자다 깨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멍청하게 문만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들어가야할지 아님 김태형 말대로 집에 가서 마저 자버릴지 고민했다.
사실 아직도 꿈에서 완전히 깬 건 아닌 것 같긴 했다.
전이라면 잠깐 아른거리다 갈 그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혔다.그 꿈이 평소와는 다른 흐름으로 돌아가게끔 초침을 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국 작업실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냈다.오늘은 왠지 순순히 김태형 말을 들어야 될 것 같은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뭔가 이 곳을 떠나는 순간부터 일상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예감이 들기도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학교에서 멀어질 때마다 일분 일초가 뒤틀리는 것 같이 이상야릇한 느껴졌다.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처럼.아까처럼.오늘도 여름이었다.
태양은 작열했고 아스팔트 바닥은 지글지글 끓었다.
이마 앞으로 손그늘을 내어 뙤양볕을 가리며 사람들을 반대로 지나쳐 걸었다.
학교 앞 익숙한 사거리 신호등 앞에 멈춰 서서 불이 바뀌길 기다렸다.
이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일상, 오른쪽으로 가면 일탈.
그 방향과 선택까지도 오로지 내 몫이었다.
"저기요."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던 차들이 정지선에 맞춰 미끄러지며 멈춰섰다.
붉던 신호등 빛이 파랗게 바뀌고 사람들이 지나쳐 횡단보도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고, 몸이 한 쪽으로 쏠려 돌아갔다.
오른쪽으로.
뱅 돌아간 시야 사이로 꿈이 가득 차올랐다.
&&&
어린왕자는 집채만한 별에 살았다.
그 별에는 어린왕자와, 가시를 날카롭게 세운 오만스러운 장미꽃 하나가 살았다.
어린왕자는 그 장미꽃에게 물을 주었다.
꽃은 늘 자신의 피처럼 붉은 꽃잎과 싱싱한 줄기를 어린왕자에게 자랑했다.
그리고 늘 그런 자신을 사랑해달라 요구했다.
넌 날 사랑해야 돼.사랑해줘야 해.
어린왕자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그 어떤 대꾸도 없이.
"너 박지민 좋아하지?"
"……."
"변태처럼 매일 흘긋대는데, 누가 모르겠어.지민이는 얼마나 불쾌할까."
그런 적 없어.
그 여자애가 하는 말은 화살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포근하다고 생각했던 노을의 주황빛은 고통의 색이 되어 공간을 물들였다.
막다른 벽으로 밀려났다.더듬어 짚는 손에는 딱딱한 시멘트 감촉 뿐이었다.
내 눈 앞의 장면처럼.
"…나는 잘못한 거 없어."
"니가 박지민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는 생각 안 해봤니?"
내 책상 서랍과 가방엔 수도 없이 많은 그림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주인은 전부 박지민이었다.다 그 애를 생각하고 그린 것들이었다.
언젠가는 선물하고 싶었다.말로는, 행동으로는 다 보여줄 수 없는 내 마음이 그림에 담겨 전해지길 바랬다.
전해지지 않아도 전해지길 바라는 소원들이 그 안에 전부.담겨 있었다.
"주제 파악 좀 해.지민이는 너 같은 애 좋아할 리 없으니까."
그게 그 애의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저 타인의 질투에 비춰진 거짓일 뿐이라는 것도.그냥.그렇게 치부하면 되는데.
나는 가시가 박힌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손에 꼭 쥐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박지민을 좋아해서,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어도, 그 마음이 너무 커서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그 거대한 감정은 폭풍이 되고, 소용돌이가 되어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만 몰아쳤다.
내 손에 쥐여 있는 장미조차도 모르게.
'맞서지 마.너도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다면.'
사막은 황량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알들의 산이 정신을 피폐하게 했다.
내 심장은 모래로 만들어졌을까.
고철이 되어버린 작은 비행기 몸체에 기대어 앉아 속으로 가사도 생각나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
내 위로는 어디 있을까.
&&&
"혹시 여기 미대 다니는 김탄소 학생 아닌가요?"
"……."
"고1 때부터 쭉 같은 반이었었는데."
반듯한 눈썹 아래 형형하게 번쩍이는 눈동자는 나를 꿰뚫을 듯이 향했다.
"맞지?너."
"…박지민?"
"맞다.김탄소."
오른쪽은 일탈을 넘어선 이상의 세계였다.
어린왕자는 나를 자신의 별에 초대했다.
두 명이 있기엔 비좁은 곳이었지만 그 어느 집보다 아늑했다.
이 별에도 이름이 있냐고 물었더니, 지구인들이 'b-612'라고 부른다고 했다.
딱딱했지만 그의 마음에 들어서 이 별의 이름은 'b-612'가 됐다.
나도 이 작은 별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왕자는 내가 마음에 들어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넌 지구의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에 있어도 네가 날 보는게 느껴졌어.
나도 널 보고 싶었나봐.너는 하얀 종이에 다른 어른들처럼 숫자들을 적는 대신 내 얼굴을 그리더라.그것도 여러 장이나."
"…너를 좋아하니까."
좋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네 얼굴을 그리는 것.손으로든, 마음으로든.그
안에 너를 위한 나의 마음을 전부 담았다.
이렇게, 언젠가는 네가 알아줄 것을 알았다.
"이거."
대답해주고 싶었어.
졸업식 날, 손에 쥐어주었던 수채화.다시 내 손 안으로 돌아왔다.
하얗게 빛이 바래서 이제는 꽤 오래되어보이는 그 그림이.
푸르른 보랏빛이 도는 새카만 하늘.
그 아래 별 대신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아늑하고 둥그런 별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몸체.
헤아릴 수 없을만큼 붉게 물든 장미밭.
"매일 들고 다녔어.꼭 좀 만나게 해달라고."
"……."
"우리."
조용하게.
캔버스에 물감이 스며들듯, 수면 아래로 무지개가 퍼지듯, 아주 얌전하고 잔잔했다.비행사의 존재는.
그저 지구에서 하나의 점일 뿐이었고, 몇 억이 넘는 인간들 중에 하나였고.
손날에 잔뜩 묻은 연필자국과, 반쯤 열린 가방 안의 묵직한 스케치북들.
그리고 그 안을 가득 채우던 건 창 밖 풍경도, 그 아이의 머릿속의 세상도 아닌 나의 얼굴이라는 걸 알았을 땐 네가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
책상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앉은 물리적 거리감보다 조금 더 가까이.
어쩌다가 내가 그 도화지 안에 남아야할만한 무언가를 넌 발견한 걸까?
간혹 뒷통수에 길게 와서 꽂히는 시선이 네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림을 그려내는 도구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많이 바뀌었네."
"…너도."
그때처럼.아까처럼.오늘도 여름이었다.
손에 쥐어지는 종이의 질감과 온도의 안정감.
악수를 하듯 내 손을 감싸 쥔 그 하얗고 작은 마른 손.
"할 말이 많은데."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지민이는, 나의 어린왕자는 완연한 여름 하늘 아래서 겨울처럼 웃었다.
&&&
잠시 꿈에 들렀다.
졸업식 날.모든 행사가 끝나고, 나는 교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손에 든 것은 그 그림이었다.
나의 어린왕자 박지민.지민이.
목도리에 코를 묻고 가만히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돌아올 수 없는 이 곳에.지금이라면 너에게 이 그림을 전해줘도 되지 않을까.
접히고 접혀 손바닥만해진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뭐해?거기 서서.혼자.'
이해할 수 없었다.그 마법같은 순간을.
네가 돌아오면 안 되는 곳이었는데.온몸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발소리와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눈 앞에 모습이 드러났다.
발소리와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눈 앞에 모습이 드러났다.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 얼굴에는 궁금증과 호의 가득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여기 내 자린데.'
'…알아.'
'왜.나한테 할 말 있어?'
반사적으로 고갤 저었다.
내 강한 부정에도 웃음을 잃지 않은 네가 책상에 걸터 앉았다.
밤색 코트가 참 잘 어울렸다.오렌지빛으로 염색한 머리칼도.그림처럼 떨어지는 옆얼굴도.
구도가 바르게 맞물린 풍경화처럼 너무 잘 어울렸다.
'그럼 왜 여기 있는데?'
'…그냥.놓고 간 거 없나 보러 온 거야.'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고개가 스르륵 돌아왔다.마주친 눈에 악의는 없었다.
아래로 떨어진 동공이 내 손을 비췄다.
반사적으로 등 뒤로 숨겨버리자 네 손이 흠칫했고, 입술은 달싹였다.
내 거짓말처럼 네 반응도 속이 빤히 보였다.그런 건 처음이었다.
'찾으러 온 게,'
'…….'
'그거야?'
그깟 종이.종이 한장 찾으러 여길 다시 온 거야?
돌아서 떠나버리면 다신 돌아오지 못 할 여기.아무 것도 없는 너와 나의 여기에.
'…너는 왜 다시 왔어?'
'…….'
'여긴 아무 것도 없고, 이제 아무 것도 아니잖아.니가 좋아하는 친구들도 없고, 좋아했던 시간도 없고, 좋아했던 그 어떤 것도 없는데.'
'…….'
'왜 왔어.'
지민이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니 그림, 나 주라.믿을 수 없는 말도 덧붙었다.
죽은 것처럼 고요하던 심장이 다시 꿈틀대는 것 같았다.
등 뒤로 꾹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분명 전하려고 했던 게 맞는데, 전할 수 있게 되니 선뜻 내밀기가 힘들었다.
'방금 니가 말 한거.'
'…….'
'아직 전부 다 여기 있어.'
좋아하는 친구들.좋아했던 시간.좋아했던 그 어떤 것.
네 손, 그림, 마음.
그리고 그 위에 지어진 우주.안의 나의 행성.
흑연으로 그어진 내 얼굴.
무릎 아래에 핀 새빨간 꽃잎의 장미 한 송이.
고장난 비행기.
상자 안에 갇힌 바보같은 비행사.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걸까.
기쁨보다 불안함에 가슴이 뻐근했다.
부끄러운 것 같기도 했다.분명 나만 알고, 내 세상 안에만 있던 존재였는데.
사하라 사막의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똥별이 떨어졌다.
'좋아해.'
'…….'
'내 비행사.'
어느새 바오밥나무처럼 높디 높게 자라있었다.나와 너의 키는.
&&&
"한국에 일주일 전 쯤에 왔어.아예 들어온 거야.한국 지사 소속으로 아예 발령나서.
시차적응 하느라 좀 힘들었다?와서 짐도 안 풀고 이틀 동안 잠만 잤어.
한창 프로젝트 진행할 때는 3일도 꼬박 세웠었는데, 장비행은 나도 좀 무리였나봐.
아, 맞아.애들 중에 네 소식 아는 애가 아무도 없더라.그래서 찾아오는데 애 좀 먹었어.
어떻게 찾았는지는…말하면 니가 좀 집요하다고 무서워할 것 같긴 한데,말해줄까?"
6년의 공백.꿈과 현실의 괴리.그 장애와 불가능을 넘어서 다시 만난 우리.
지금은 이상에 갇힌 현실일까, 현실에 갇힌 이상일까.
확실한 건 눈 앞의 박지민이 진짜라는 사실 뿐이었다.
손을 뻗어 만지면 잡히고, 나의 반응에 표정과 태도가 시시각각 변화한다.
나는 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서 어린왕자가 마주친 역경과 고난을 전해들었다.
그 이야기 속의 어린왕자는 꽤 행복하고 즐거워보였다.
"결국 교육청 홈페이지까지 접속해서 담임 선생님한테 연락했다니까?
번호랑 집주소는 바뀌어도 학교는 웬만하면 그대로 다니고 있겠지 싶어서.
그리고 무작정 지금 온 거야.
니가 학교를 계속 다니고 있는지, 아님 졸업 했는지, 방학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냥…무작정."
근데, 나는 왠지 어떻게든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더라.왜, 그런 거 있잖아.쉬운 말로 하면…직감?육감?같은 거.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하고 오묘한 느낌 같은 거.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낯선 건물에서든, 수 백 명의 사람이 오고가는 거리에서든, 아니면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에서든.
네가 아무리 모습이 바뀌었어도 알아 볼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있었어.왜냐면,
"아까 잠깐 졸았는데, 그때 내 꿈에 니가 나왔어."
"…내가?"
"응.신기하지."
너도 날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게.정말 다시 만날 수 밖에 없었네."
졸업식이 끝나고, 이상한 마법에서도 풀려났다.
지민이는 어린왕자가 아닌 그냥 박지민이 되었고, 나도 불시착한 비행사가 아닌 그냥 나로 돌아왔다.
지민이는 스무살이 되자마자 그전부터 계획 되있었던 유학길에 올랐고, 난 1년의 재수 끝에 희망하던 대학에 입학했다.
자주 연락할게.진심이었던 그 말은 우리의 거리처럼 멀어졌고, 종국엔 희미해졌다.
바쁜 삶에 치여 첫사랑은 꿈에서만 얼핏 모습을 드러냈다가 깨어나면 쉽게 잊혀졌다.
봄이 여섯 번, 겨울이 다섯 번 돌았다.나는 이제 그림 그리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미안해."
아메리카노 잔의 얼음이 달그락 녹았다.냉한 에어컨 바람이 피부를 차갑게 만들었다.
굳은 살이 가득 박힌 내 손이 부끄러워서 자꾸 아래로만 감추었다.우리 사이엔 종이 한 장이 그대로 접혀서 놓여 있었다.
6년 간 잊고 지냈던 그 기억이 자꾸만 차올랐다.
그대로 내버려두고 나왔던 이젤 위의 검푸른색 물감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다.
잠들기 전, 가득 짜놓았던 팔레트 위의 청록의 밤하늘.
그 아래에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도, 무엇이 있었는지도 선명히 기억이 났다.
"괜찮아."
"……."
"정말로."
이미 충분해.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이 가장.
"지민아."
"응.탄소야."
그러니까,
"아직도…좋아해."
좋아하고 있어.다시, 우리 안의 우주에 살자.너의 행성, b-612에.나의 어린왕자야.
&&&
6년 만에 그 그림은 캔버스 위에 다시 재구성되었다.
붓을 잡는 사람이 된지 꽤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막 처음 선을 그었을 때처럼 모든 것이 생경했다.
꼬박 일주일을 걸쳐서 물감을 뒤집어 쓰다시피하며 작업실에서 살았다.
고장난 비행기에 갈아끼워 넣은 엔진이 탈탈거리며 비행의 재시작을 알렸다.
"김탄소 학생이 만점을 받아 종합 점수 1위입니다.축하합니다."
내 그림은 보란듯이 졸업 작품전 한 가운데에 걸렸다.
번지르르한 심사위원들의 호평,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고 내리는 어린왕자 이야기가 참 이질적이라고 느꼈다.
내 기억과 내 스케치북 속에만 살았던 그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이상하게도.숫자 한 줄 적혀있지 않은 그 물감 덩어리에.
"기분이 이상해."
늘 혼자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 서있으니까.
조용히 다가온 지민이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에 와서 달라붙었다.간지러운 미소도 함께였다.
"이제 우리 둘만 있을까?"
"……."
"난 그러고 싶은데."
누군가의 시선도, 관심도 다 필요 없긴 해.
니가 날 보고만 있다면.너의 눈동자에선 사랑이 느껴져.
보고 있으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벅차.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나는 알아.
네 비행의 종착점이 나라는 걸.
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꿈, 그림, 전부 다.
나는 내 그림과, 6년 전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등지고 섰다.
이제 내 뒤에는 네가 없으니까.
너는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꽤 오래 전부터, 드넓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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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ㅏ 지민이 얼굴이 다해따~~~~~~!(와장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