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자리의 주인이 남자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제 저녁이었다. 나름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매일 나보다 일찍 와서 늦게 가는 것 같은, 그러니까 화장실을 가기는 하는건지 제 자리에서 공부인지 뭔지 그것만 가만히 하는, 옆 자리 사람이 한 달 내내 궁금했었다. 저녁 밥을 먹고 독서실 내에 있는 휴게실에서 텀블러에 물을 담는데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자 한 명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검은 모자, 검은 맨투맨, 검은 츄리닝 바지. 양말은 희었다. 그림자를 연상케 하는 대학생의 복장을 바라보다 실례임을 생각하고 다시 텀블러로 눈을 옮겼다. 그 사람은 전화를 했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금방 끝내고 그 남자는 다시 휴게실을 나섰다. 물이 담긴 텀블러를 들고 휴게실에서 나오자 아까 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느 방에서 공부하는 사람일까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자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남자에 나도 헐레벌떡 따라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옆자리 주인이었다.
김과외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독서실에 등록했다. 1월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 달 정도 된 것이었다. 일부러 친구들이 많이 택하는 독서실은 피했다. 세상에서 노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내가 걔네랑 붙어있으면 공부를 할 리 없었다. 덕분에 점심도, 저녁도 혼자 간단히 먹는 게 일상이었고,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두 공부에 매진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마음은 없었는데 옆 자리를 쓰는 사람이 열심히 하길래, 나만 놀면 쪽팔려서 그냥 열심히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고마워하며 독서실을 다닌지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주일 전 저녁 그 사람을 보고 나서는 내내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살짝 스쳐 보았는데도 인상이 너무나 강하게 남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신경이 쓰여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처음 마주친 다음 날 부터 휴게실에서 공부를 했다. 덕분에, 일주일 동안 그 사람을 볼 수 없었고 서서히 잊혀져 가나 싶었다.
열 두시. 옆집 사는 같은 반 친구, 다니엘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10분 정도 남아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웬만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을 시간인이었는데 휴게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들을 가방에 집어 넣고 고개를 들고 나서야 휴게실에 들어온 사람이 내 옆자리에 앉는 그 남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한 손에 텀블러를 들고 있는 그 사람은 왠지 모르게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 정수기로 걸어갔다. 썼던 자리를 마저 정리하고 독서실을 나와 신발을 신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오늘도 검은 맨투맨, 검은 바지. 그 날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는건지 나를 보며 머뭇거리는 그 남자를 그저 말 없이 쳐다보자 그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뭐, 불편하게 한거라도 있어요?"
무슨 말이 나왔어도 예상 외였겠지만, 정말 생각치도 못한 말이었다. 분명 자신이 뭔가 잘못한게 있는지 묻는 말 같았는데 남자의 표정이 없어 괜히 무섭게 들렸다. 벙쪄서 아무런 대답도 못하는 내모습을 보고서는 한숨을 한 번 푹 쉰다. 사실은 당황한거였다. 잠깐 마주쳤는데 자꾸 생각나서 공부도 뭣도 못하게 하는 사람이 눈 앞에 서 있는데, 어느 누가 당황하지 않을까. 심지어, 처음 하는 말이 저런데.
"자리에서 공부 안하고 휴게실에서 하는거, 제가 뭐 불편하게 해서 그런거예요?"
"아뇨, 저는 그냥......"
뜸을 들이는 내 뒷말을 가만히 기다린다. 나를 보면서.
"제 자리가 좀 더워서 그랬어요."
"아."
민망한 듯 한 손을 얼굴에 댔다가 떨어뜨린다. 괜히 무안을 주는 대답을 한 걸까. 그 상황에서 불편하다고 말하는 게 더 이상했을테니 잘못 말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휴게실에서 공부하는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옆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긴 했구나.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오히려, 지난 시간동안 그 쪽 덕분에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하는 말은 다음에 또 말을 할만한 기회가 생기면 그 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왔다. 나는 가볍게 고갤 숙여 인사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 탔다. 엘리베이터 속 거울에 비친 얼굴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나를 알고 있었구나. 콧노래가 흥얼흥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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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 있냐."
제대로 된 인사도 안 한채 나란히 집으로 향하던 다니엘이 물었다.
"티 나?"
"얼굴에 다 써 있다. 신나가지고, 아주."
내가 그래? 물으면서도 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원래 표정 관리를 하려고도 잘 하지도 못하는 나였다. 어이 없다는 듯 쳐다보다 다니엘도 픽, 하고 웃는다. 그러더니 오른 손으로 내 머리를 흐트러뜨린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훨 낫다."
"뭐가?"
"어제까지 골골댔잖아. 공부도 하나도 못했었지?"
"맞아. 근데 이제 열심히 할 거야."
왜? 묻는 대답에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다니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면 분명히 가서 공부 안한다고 잔소리할게 뻔했다. 다니엘은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은 내 스스로 말해 줄 때 까지 묻지 않았다. 다니엘이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역시나 좋은 내 기분에 저도 맞춰주듯 미소만 지은 채 넘어가는 다니엘이었다.
집 가까우면 시도 때도 없이 집에 간다고 독서실은 집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다. 걸어서는 30분 정도를 가야 했는데 열 두시면 버스고 뭐고 다 없어서 늘 걸었다. 밤에 혼자 걸으면 위험하다며 엄마는 그 늦은 시간에 다니엘에게 나를 데려올 것을 부탁했다. 나 때문에 괜히 귀찮은 일 하는 것 같다는 식의 말을 할 때 마다 '가깝던데 뭘. 너나 30분 걸리지 내 걸음으로는 금방이야.' 하고 대답해주는 다니엘은 정말 좋은 친구였다.
"너는 공부 잘 돼?"
"나야 뭐. 늘."
사실 다니엘과 나는 서로의 성적을 모른다. 서로 비밀로 하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는데 굳이 성적을 말 할 기회가 없었다. 시험을 본 후 정오표나 시험 점수를 확인할 때 철저히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도록 진행하는 학교 체제 때문에 우연히라도 서로의 점수를 볼 일은 없었다. 다니엘이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안다. 워낙 열심히 하기도 하고, 옆에서 꽤 오래 지켜봐온 바로는 머리도 좋다. 딱 그 정도가 아는 것의 전부였지만 상관 없었다. 다니엘도 나의 성적을 굳이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고맙게도.
"강의건."
"응?"
"대학도 같이 가자. 나랑."
"그래! 좋아!"
열 번도 더 했을 말이었다. '고등학교 같이 가자.'가 '대학도 같이 가자.'로 변했을 뿐이었다. 나는 다니엘이 그렇게 말 할 때마다 늘 웃으며 좋다고 말했다. 다니엘은 정말 좋은 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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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글이 됐네요.ㅜㅜ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학교육과 3학년에 올라가는 사범대생, 독서실 VIP, 검은 옷 매니아 김재환과
옆집 사는 중학교 동창, 현 같은 반 강의건 절친, 강다니엘과
독서실 옆자리 김재환에게 반한 강의건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김과외인데, 과외하는 이야기가 한 개도 없죠?
제목에서 유추 가능하듯이 재환이가 의건님 과외해줄겁니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가 올라올지 모르겠어요. 고3이기도 하고 반응이 없으면 접을 수 있도록
가벼운 마음으로 올렸기 때문에...!
아무쪼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밤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