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를 냉큼 알아낸 영민이 동진의 자취방에서 제 과제보다 더 열심히 피피티를 만들었다.
능숙하게 제 할 일을 마친 영민이 옆에서 그런 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동진의 턱을 닫아주며 말했다.
"침 떨어져요, 형."
"...임영민, 능력자였네."
축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씁.
"헛소리하지말고요. 이거 다했으니까 얼른 보내줘요."
"어, 뭘 보내줘?"
"아,진짜. 파일 보내줘야할 거 아니에요."
"아, 맞네. 것보다 임영민. 이 새끼, 사기캐네."
동진이 제 입을 쉬지 않고 놀리며 여자에게 피피티파일을 전송했다. 메일 전송 완료라는 메세지가 뜬
노트북 화면을 보던 영민이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벌써 열두시가 넘었다.
열두시 전에 보내달라고 그러던데.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되새기고 있는 영민을 바라보던 동진이 곧 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수상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왜, 또 무슨 짓하려고.
그 불길한 웃음 뭡니까. 형.
영민이 동진의 불길한 웃음에 벌떡 몸을 일으켜도 동진은 아랑곳하지않고 제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인
제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어디 전화...설마, 형!"
지금이 몇 신데, 전화를 합니까. 진짜.
"...여보세요."
"자는 거 깨웠냐?"
...당연한 소리 좀 하지마라고, 이 형이 진짜.
영민이 옆에서 혀를 쯧하고 차다가도 동진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금새 피곤함도 잊곤 허리를 꼿꼿히 세우며 앉았다.
..얼굴 보는 것도 아닌데, 혼자 간지럽고 긴장되고 난리도 아니었다.
동진은 어느새 그런 영민을 보며 음흉하게 웃어보이곤 야, 이름아. 미안하다.
나 피피티 보냈다, 이름 빼지말고!
"...다 하셨다고요?..이번에도 거짓말이면 진짜 이름 빼요, 저."
놀란 듯 재차 묻는 걸 보면 동진의 그간의 행적은 안 봐도 뻔한 거였다. 여자와는 제법 여러번 팀플과제를 했던 것 같고.
아, 좀 부럽네. 영민은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면서 내가 왜 H대학교를 갔을까로 끝을 마무리 지었다.
"야, 진짜거든! 속고만 살았나!"
"딱 기다려요! 확인할테니까!"
정말로 확인하려는건지 저 노트북 다시 켰어요, 끊지 마세요. 선배. 하는 목소리도 재차 들려왔고
마우스가 달칵거리는 소리도 문득문득 들려왔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동진은 제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와, 선배. 이거 뭐에요? 선배가 한거...아니죠?"
"왜, 뭐 잘못됐어?"
영민은 좀전보다 더 크게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동진을 흘기다가도 여자의 목소리에 실수한 게 있었나. 하고 곰곰히 생각했다.
...실수한건 없었던 거 같은데.
"...진짜 잘했길래. 선배가 이걸 했을리 없어서."
여자는 돌직구를 잘 날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영민은 그 말에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낮은 웃음소리를 들은 여자는 당황했을테지만 영민은 남의 과제를 줄창 피터지게 해놓고도 피곤함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뭐야, 선배말고 누구 또 있어요?
"어, 어. 사실은 그거 영민이가 했거든."
"......? 누구요?"
아까 그렇게 이름을 알려줬는데도 재차 묻는 여자의 표현에 영민이 코를 찡긋거렸다. 두번, 세번 말해줄걸.
내 이름 임영민이라고.
"걔 있잖아, 빨간 머리통."
동진은 결국 영민에게서 날라온 주먹으로 명치를 맞았다. 빨간 머리통이 뭡니까, 형은 진짜.
이 형이, 시작도 전에 쫑을 내려고 이 사단을 내는가 보다.
"아, 임....임영민! 영민이? 맞죠?"
여자가 부르는 제 이름이 귀에 콕하고 박혀와서 영민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아, 임영민.
영민이...그거 내 이름 맞는 거 같은데.
여자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제 이름을 외쳤다.
좀 우습게도, 내 입으로 내뱉긴 그렇지만 그 살랑거림에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감사해요, 아. 진짜, 저 이 부분 결국 다 못해서 포기하고 자는 중이었거든요....선배는 반성 좀 하고요!"
"나한테만 뭐라 그래!"
되려 큰소리치는 동진에 여자는 기어코 한소리했다. 나이를 거꾸로 먹었어요, 선배는? 진짜로! 아, 저 이거 마저 붙여야 하니까 일단 끊을..
영민이 그 통통거리며 마무리를 하는 목소리에 다소 다급히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있잖아요, 그쪽."
"..을게요....네, 네?"
여자는 직접적으로 저를 지칭할 줄 몰랐던 영민의 목소리에 금새 조용해졌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밥 안 먹을래요, 나랑."
...신중은 개뿔. 초면에 밥이 뭐냐, 임영민.
영민은 망했다는 표정을 지었고 동진은 그 표정을 보곤 좆됐네, 새끼. 애도. 하다가.
".....어, 그래요!"
한 템포 늦게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영민이 고개를 들었다. 뭣도 없는 부산 사나이의 서투른 표준어가 먹힌 모양인지
여자는 웃음소리와 함께 꽤 해맑게 긍정을 표했다.
"그럼, 번호 저장할게."
"..어, 네! 응?"
"동갑이니까, 말 놓는다."
"아, 그래! 전화해줘. 나도 번호 저장할게."
그 말을 끝으로 끊긴 통화에 귀끝이 붉어진 영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씨익 웃어버렸다.
동진이 옆에서 미친! 번호 주자마자 썸타냐! 임영민 이 카사노바 같은 새끼! 하고 볼멘소리로 틱틱거리건 말건.
아, 그만 때리고 이름이, 뭐 잘 먹는지나 말해줘요.
점수 좀 따게.
어..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한편만 적고 마려고 했는데 오늘 또 갑자기 생각나서...
자급자족하면서 혼자 햄볶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