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숨이 멎었다. '그 날'은, 정말 갑자기 찾아왔다. #1 나름 잘 풀렸던 것 같다. 나쁘지 않다. 나는 머리를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척척한 체육복이 등에 휘감겨 불쾌하다. 호루라기를 물고 있던 체육 선생이 우렁차게 외쳤다. "김 여주, 20점!" 만점이었다. 옆에서 다른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오오~" 하며 환호한다. 나는 장난스럽게 브이자를 그리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3학년에 올라와 새로 사귄 학우, 가연이 제 옆을 툭툭 치며 웃어보인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여주는 뭐든지 잘하는 것 같아." 가연이 제 무릎에 턱을 괴고 투정을 부렸다. 거기다 늘씬하고 예쁘고...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나야 뭐 다 못하지." "거짓말. 공부도 잘하잖아." "나보다 잘하는 애들도 많은걸. 뭐야, 뭘 바라고 이렇게 또 비행기를 태워주실까..?" 가연은 헤헤, 사랑스럽게 웃으며 멋쩍게 머리를 긁는다. "매점에 딸기 샌드위치 나왔대!" "너 또 지갑 안가져왔다 그럴려고 하지?" "아이잉. 빌려조!" "쓰읍. 혀 짧은 소리." "부디 빌려주시길 바랍니다." 급격한 태세전환이었다. 목소리까지 남자마냥 굵직하게 까는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주변에서,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 몇몇이 따라 웃는다. 나는 가연이 아이들에게 놀림받는 모양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를 쓸어 내렸다. 벌써 2년. 2년이다. 속절없이 시간은 빨리 흘러만 간다. 무심하기도 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감옥은 온데간데 없고, 내 눈 앞에는 어린 소녀들이 세상 어두운 줄을 모르고 환하게 웃어제낀다. 나 또한 그 싱그러운 웃음에 감염되어, 어쩔 수 없이 웃고 만다. 만족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녀석에게 달아난 이후로, 이상하게 나는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다만 녀석의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다. 내가 만약 그 방식에 익숙해진다면, 훗날 녀석이 없을 때, 나는 내가 스스로 죽게 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놈은 그 정도로 후유증이 강했다. 그래도 그 후유증은 아마 10년, 20년이 지나면 무뎌질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고작 2년의 기억은 너무나도 강렬했으므로. 언제까지고 평범한 일상을 살 생각이 새삼스럽다. 나는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드물게 혼혈인, 녀석의 눈 색깔. 바람이 순간적으로 거세게 휘몰아쳤다. '평생동안 쫓을 거라고 했잖아.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순간적으로, 문득. 흩날리는 바람결에 놈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싶다. 나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몸을 가눴다. 얼결에 휘청거린 것 같았다. 주변에서 '여주야, 괜찮아!?' 따위의 소리가 울린다. 나는 웃으며 걱정하는 급우들을 안심시켰다. 뭐지. 뭐였지. 바람이 드세다. 어디선가 녀석의 향수 냄새가 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종이 울린 건지, 아이들이 일사분란하게 반을 향하고 있었다. 가연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일어설 수 있어? "괜찮아. 다음 교시 담임이지?" "으응... ." 괜찮다니까 그러네, 시무룩해하긴. 씨익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연이 내 눈치를 보며 내 옆에 달라붙어온다. 그래. 괜찮다.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돌풍은 계속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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