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림이 심한 여주는 새학기 초반 반에서 겉돌았고 딱히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이 한 번씩 말을 걸면 "아, 그래." "아니." 짧은 대답밖에 하지 못 했고 그런 모습들이 여자아이들에게는 고까웠는지 어느 순간부터 소외를 당하고 있었다. 그중 질 나쁜 아이들은 지나가는 여주에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기도 했고 실수인 척 교과서에 물을 쏟기도 했다. 점점 잦아지는 괴롭힘에도 여주는 개의치 않고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무시로 답을 했다. 햇빛이 쨍쨍한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어제 비가 내린 탓인지 평소보다 햇살이 더욱 강했고 아까부터 살살 아려오는 아랫배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던 여주는 뿌얘지는 시야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마침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고 보건실에 가서 약이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점심을 먹은 직후였기에 다들 자리에 엎드려 자고 있었고 여주에게 시비를 거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려 발을 떼던 여주는 아린 배를 붙잡다 발을 헛디뎠고 '좆됐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밀려와야 할 고통 대신 여름과 잘 어울리는 청량하고 산뜻한 향기와 약간의 땀냄새가 풍겨왔고 눈을 떴을 때는 체육복을 입고 있는 남자 아이가 여주의 허리에 팔을 두른채 여주는 그 아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여주보다 몇 칸 아래의 계단에 있는데도 여주보다 키가 훨씬 큰 그 아이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여주를 바라보다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마, 니 괜찮나? 조심 좀 해라... 내 아니었음 진짜 큰일날뻔 한 거 아나? 어?" 얼떨떨한 여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가만히 남자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와, 어디 아픈 기가? 왜 암 말도 않고 그리 돌이 된긴데"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와 사투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던 여주는 그제서야 그 남자아이가 학교 많은 여자아이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축구부 주장 강다니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여주였지만 반에 앉아 있기만 해도 반 아이들의 입에서 강다니엘의 이름이 하루에도 수백 번은 오르고 내렸기에 그를 모르기는 쉽지 않았다.
꽤 가까운 거리에서 본 그는 얼굴이 하얬고 눈 밑에 있는 점은 매력적이었다. 그의 얼굴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그를 본 건 처음이었다. 여주를 걱정하며 계속해서 괜찮냐 묻는 강다니엘의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그를 바라보다 아차 싶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은 여주는 "...괜찮아."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 하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픈 배도 잊고 보건실까지 뛰어온 여주는 보건실 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대로 주저 앉아 숨을 고르다 제 무릎에 얼굴을 묻고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보건 선생님은 자주 보건실을 비워뒀기에 진통제를 찾아 먹고는 다시 반으로 돌아갔다. 수업을 듣다 지루함을 느끼고 창문 밖을 쳐다본 여주는 축구를 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아까 자신을 받아들었던 강다니엘을 떠올렸다. 자신이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자 풋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뛰어대는 가슴에 의문이 들었다가도 진통제가 몸에 안 맞나 생각하며 넘겨버린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을 가려 가방을 챙기며 머리를 쓸어 넘기던 여주는 엉켜있는 제 머리칼에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뒤에서는 같은 반 여자아이들이 키득거리고 있고 여주의 머리칼에는 껌이 붙어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온 여주는 아래쪽에 붙여놓은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되나, 껌 떼는 방법이 뭐였더라와 같은 생각들을 하며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다. 운동장 쪽에서 여자아이들의 꺅꺅거리는 소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축구부가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갔을 길인데 괜히 누군가를 찾으려 눈을 굴리며 그쪽을 향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 쉬고 있던 건지 운동장 옆쪽에서 땀을 닦으며 물을 마시던 강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 놀라기도 잠시 손을 흔들며 여주 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니 아까는 글케 가버리는 게 어딨나. 내 계속 걱정했다 않캈나. 근디 니 머리는 또 와 이라는데." 강다니엘은 여주의 엉킨 머리칼을 손으로 풀어주다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니 머리에 껌 뱉은 기가."
"아, 니 껌 씹다가 잠이라도 들었나. 바보같이 그게 뭐꼬. 근데 상상하니까 쫌 귀여운 것도 같다. 내 이거 뗄 수 있을 것 같은데, 따라 와라."
여주가 아무 말이 없자 찌푸렸던 인상을 풀고 실실 웃으며 장난을 치던 그는 여주의 손을 붙잡고 학교 건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 약을 정말 잘못 먹었나... 왜 또 심장이 이렇게 뛰는 거야...' - 어설픈 사투리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