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소녀가 손을 흔들어보였다. 소년은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벚나무 아래 파란 지붕 집에 사는 소녀였다. 그리고 그 집은 예전부터 버려져 있던 집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그 집을 귀신이 든 집이라 불렀다. 자연스레 그 집에서 사는 소녀의 가족들은 껄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소년은 소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원피스 자락 아래로 보이는 하얀 두 다리가 가냘펐다. 한 손으로도 그냥 잡히겠네.
손이 크지 않은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소녀는 가냘펐다.
다시 소녀와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아무런 말없이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안녕."
소나기
上
w. 갈색머리 아가씨
"감자 먹을래?"
안녕 이라는 인사 다음으로 소년이 꺼낸 말이었다.
소년의 집에서 재배하는 감자는 알이 실하기로 마을에서 자자할 정도로 유명했다.
따끈하게 쪄진 감자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소녀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감자를 받았다.
뜨거울텐데. 소년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소녀는 치맛자락 위로 감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소녀가 얼른 치마로 감자를 감싸쥐었기 때문이었다.
"뜨겁다니까."
"몰랐어."
"방금 찐 건데 당연히 뜨겁지."
"너는 사투리 안쓰네."
강원도 시골인만큼 마을 어른들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소년 역시 사투리를 쓸 줄 알았다. 하지만 고쳤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였다.
소년이 다니는 학교는 마을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때문인지 학교에서는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소년은 교실 안에서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주위에서 다른 학생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을 것만 같았다.
때문에 소년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말투를 따라하며 사투리를 고쳐나갔다.
처음에는 마냥 어색했던 서울말이 이제는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소녀는 그런 소년의 노력을 알아준 것이었다.
"나는 안써."
짤막한 이 한 마디에는 소년의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나는 서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서울말 잘 해. 신기하지?
하면서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 소년과 소녀는 서로 무언가 자랑을 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소년은 감자를 한 입 베어물었다. 소녀는 아직까지도 감자를 손에 쥐고만 있었다.
감자를 싫어하나? 소녀는 서울에서 이사를 왔었다. 소년은 그렇게 들었다.
서울 사람들은 찐감자 안먹나? 그 만날 튀긴 것만 먹어서 찐 감자는 별로 안좋아하나?
마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의 소녀를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의 표정을 보았는지 소녀는 얼른 감자를 한 입 베어물었다. 그제야 소년은 조금은 밝은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감자 맛있다."
"여기서 우리 감자가 제일 실해."
"너도 농사 지어?"
"그럼. 나도 농사 짓지."
그렇구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자를 다시 한 번 베어물었다.
맛이 있나보다. 소년은 조금 더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 한 구석에 있는 이 작은 정자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소년이 가끔 낮잠을 자러 오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소녀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이는 이 마을을 뜻하기도 했고 이 정자를 뜻하기도 했다. 물어볼까? 물어봐도 될까?
우욱!
고개를 돌려 소녀에게 물어보려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소년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자 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소녀가 허리를 숙여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방금 전 먹은 감자는 여전히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먹은 게 거의 없었는지 지금은 허연 위액만 토해내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년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소녀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소녀가 사는 파란 지붕 집이 있는 방향으로.
그제야 소년은 어른들이 한 말을 떠올렸다.
소녀는 몸이 약해서 요양 차 이곳에 온 것이었다.
-
"그 집 안사람이 어디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이라며?"
"하이고. 어쩌다 이런 촌구석까지 왔대. 돈도 많은 사람이."
"돈이 문제야? 당장 지 딸이 목숨 왔다갔다 하게 생겼는데?"
"딸도 참 예쁘게 생겼는데 아까워."
"예쁘긴 뭐가 예뻐. 삐적 말라가지고 복없게 생겼드만."
집으로 돌아오자 소년의 어머니와 옆집 아줌마가 같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마루에는 어머니가 사오신 수박이 곱게 잘려있었다.
소녀는 수박도 먹지 못하는 걸까. 소년은 터벅터벅 걸어와 마루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감자의 뜨끈함이 아직까지도 손바닥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종현이 왔니?"
"다녀왔습니다."
"허이고. 훤칠하네. 언제봐도 인물이 참 훤해."
옆집 아줌마의 칭찬에도 소년은 그저 입꼬리만 말아올렸다.
진심으로 하는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소녀의 앞에서 아줌마가 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이고. 어쩜 이리 고울까. 역시 서울서 난 아가씨는 다르긴 달라."]
화제는 빠르게 넘어갔다.
올해 극심한 가뭄이 이번의 화제였다. 심각하긴 했다. 원래 지금즈음이면 비가 하루종일 쏟아져 내려야하는데.
소년의 어머니의 얼굴에는 금심이 가득했다. 조금 있으면 저수지도 마를 것 같아서 큰일이야.
소년은 방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잘만 나오는데.
티비에서도 어머니도 가뭄이 심각하다 말을 하곤 했지만 사실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오지 않아서 소년은 좋았다.
학교까지 가는데 신발이 젖을 일도,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지 못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와 책꽂이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어머니를 대비한 책이었다. 책상 아래에는 소년이 마련해놓은 비밀스러운 공간이 존재했다.
용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한 만화책이었다.
소년은 조심스레 만화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매일 농사만 짓는 시골마을에서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낙이었다.
어머니께 들키면 안되니 소년의 손길은 매우 느릿느릿했다.
혹시 소녀도 만화책을 좋아할까?
그러고보니 소년은 소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종현아.
소년의 낙은 어머니의 부름으로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소년은 착한 아들이었기에 바로 만화책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네. 라고 대답을 하는 것은 잊지 않은 채로.
-
"안녕."
소녀는 오늘도 정자로 나와있었다.
오늘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서울 여자애들은 다 저렇게 원피스만 입고 있나?
소년은 자신의 누나를 떠올려보았다. 소년이 기억하는 누나는 원피스가 아니라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산을 탈 일이 없어서 그런가보네. 소년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지만 왠지 맞는 것 같았다.
"속은 괜찮아?"
"응. 약 먹었어."
"맛없겠다."
"맛없어."
소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누나 말고 또래 여자애하고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도 남학교였다.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녀가 신고 있는 하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때가 묻지 않은 오롯히 하얀 운동화였다.
운동화를 신고 있으니 조금은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마침 어머니도 아버지도 밭에 나가있어 소년을 부를 사람은 없었다.
지금부터 저녁을 먹을 시간까지 소년은 자유였다.
"저 쪽에 토마토 있는데 먹으러 갈래?"
"토마토?"
"응. 방울토마토."
"..."
"몸 안좋아?"
"아니. 갈래."
소년이 손을 내밀자 소녀는 소년의 손을 마주잡았다.
농사일을 하느라 굳은 살이 잔뜩 박혀있는 소년의 손과 다르게 소녀의 손은 부드러웠다.
해... 핸 뭐더라. 여튼 누나가 바르는 그 크림을 굉장히 열심히 바르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소녀를 마주보며 작게 웃어보였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보들보들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소년이 말하는 토마토 밭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산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했다. 갈 수 있어? 소년이 묻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다 그제야 소년은 어제 자신이 무엇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떠올렸다.
"근데."
"응."
"넌 이름이 뭐야?"
"성이름. 너는?"
"김종현."
"종현아."
"응."
소녀의 입에서 소년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벅벅 문질러댔다. 소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귀에 와닿자 온 몸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산에 오르면서 치마를 입고 있는 소녀의 탓이었다.
라고 소년은 생각하고 싶었다.
-
다들 아시는 황순원의 [소나기] 를 패러디한 단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