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3부
14-1.
한동안 과제에, 동아리 활동에 바빴던 터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으로 가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사실 오늘도 늦게까지 끝날 일을 억지로 마무리 지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오늘만은 조금 빨리 가고 싶어서.
그동안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도 하고, 어수선한 상황이 며칠간 반복되는 바람에 경수와의 연락이 뜸했었다. 그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녀석을 놀라게 할 심산으로 몰래 경수의 학교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를 보고 놀랄 그 얼굴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괜히 좋아서 혼자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 종인아?”
“…안녕하세요.”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 내 팔을 잡으며 아는 체를 해 오기에 돌아봤더니, 과 선배 누나였다. 대충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선 얼른 가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잡은 팔을 놔주질 않는다. 마음이 급했지만 오래 시간을 잡아먹진 않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누나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오늘은 수업 다 끝난 거야?”
“…네. 누나는요?”
“나도 막 수업 마치고 집에 가려고. 저녁은 먹었어?”
“아뇨, 아직….”
“와, 잘됐다. 나도 아직 안 먹었는데…, 같이 저녁 먹을래?”
당황해서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저녁은 경수랑 같이 먹을 생각이었는데. 그동안 나 때문에 마음 상했던 거 풀어주고 싶어서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
“아…, 다음에요. 죄송해요 누나. 저, 약속이 있어서요.”
미안한 표정으로 누나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누나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괜찮지가 않다. 그래서 조금 눈치가 보였다. 선배가 먼저 밥을 사준다고 말을 꺼냈는데 거절하는 꼴이 썩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괜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소문으로는 후배에게 웬만해선 돈을 쓰지 않는다던 누나였으니 신경 쓰이는 강도가 더했다. 어두운 표정의 누나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한 번 더 미안하다고 말했다.
“…괜찮아. 그럼 담에 먹지 뭐. 그나저나, 학교는 다닐만해? 2학기 얼마 안됐는데 바쁘지?”
“그냥, 그렇죠 뭐. 사실 얼마 전까진 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그것도 다 끝나서 괜찮아요.”
“다행이다.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다 알려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친구랑은 오래 만났어?”
“…네?”
뜬금없는 말이라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당황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돌려 누나를 바라보았다.
“왜 놀라고 그래.”
“아….”
“…….”
“만난 지 2년 정도 됐어요.”
“2년? 2년이면 학교 다닐 때부터 만났겠네….”
“…네.”
“학교는 어딘데? 우리 학교 다녀?”
“아뇨. 다른 학교…다녀요.”
누나가 경수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다. 말하면 할수록 머릿속에 경수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 얼른 보고 싶다. 얼굴 보고. 서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리고, 꼬옥 안아줘야지.
“보통은.”
“…네?”
“대학 오면서 헤어지더라.”
그 의미를 모르겠어서 대답 없이 누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환경이 바뀌면서 대화도 잘 안되고.”
“…….”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있잖아, 왜.”
“…….”
“진짜 그렇게 되더라. 나도, 1학년 때 그랬었고.”
잡고 있던 내 팔을 힘주어 고쳐 잡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누나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그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다.
“우물 안 개구리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닌 거 알게 됐을 거고.”
“…….”
“대학 오니까 널린 게 여잔데, 너 정도면 좋다고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여자는 더 많고.”
“…….”
“만난 지 2년 정도 됐으면 이제 식을 때도 됐을 텐데….”
“…….”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잠시간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누나에게 잡힌 팔을 빼내었다.
“누나, 죄송한데 저 먼저 가볼게요. 약속이 있어서요….”
“종인아.”
“…….”
“…….”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이 조금은 무섭게 다가왔다. 아니라고 부인하면서도 사실은, 대학을 다니면서 경수와 조금 멀어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누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지만. 그냥, 얼른 경수의 얼굴을 보러 가고 싶었다.
“괜히 하는 말 아닌 거,”
“…….”
“알지?”
대답도 않은 채 누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얼른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이 멀어져서 마음이 멀어진다면. 몸이 멀어지지 않으면 되잖아. 그러면 되는 거니까 우리는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一
왜일까. 누나의 말 때문에 경수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그 말들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고, 그 기분으로는 경수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경수의 학교 정문까지 도착했다가 결국 녀석을 만나지 못하고 나 혼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괜히 누나에게 잡혀서는 듣지 않아도 될 말까지 들었다. 그냥, 그런 말 따위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걸 알지만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조금 힘들었다. 경수를 앞에 두고 힘든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경수 앞에선 웃고만 싶고, 나의 이 혼란스러움을 녀석에게까지 알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아니, 이게 누구야? 김종인 아니야?”
“…….”
“혼자 바쁜 티 다 내면서 외박을 밥 먹듯이 하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일찍 들어오셨을까?”
“…아, 시끄러.”
혼자 있고 싶었는데, 누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거실에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쪼르르 달려와 이리저리 건드리며 시비를 건다.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은데 누나까지 시비를 거니까 더 기분이 안 좋아진다.
“바쁜 일은 다 끝났냐?”
“어.”
“집에 와서 빈둥거리니 좋냐?”
“내가 언제.”
“너 진짜 과제 한 거 맞아? 여자 때문에 집에 안 들어온 거 아니고?”
“…….”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제 딴엔 장난친다고 말도 안 되게 시비를 거니까 더 짜증이 나서 사나운 눈으로 김혜인을 노려봤다. 그랬더니 뭘 봐.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내 이마를 손으로 툭 치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 그냥 방에 들어가지 뭘 또 소파에 앉고 난리야. 짜증이 나기 시작하니까 끝도 없다. 모든 게 맘에 들지 않는다.
“넌 왜 여자 친구가 없냐.”
“…….”
“있는데 숨기고 있는 거 아냐?”
“…아, 귀찮게 왜 이래 진짜. 술 마셨냐?”
“술은 무슨. 입에도 안 댔거든?”
“그럼 그냥 방에 들어가지?”
“아, 존나 싸가지. 너 밖에서는 안 그러지? 다른 사람들은 김종인의 실체를 알기나 할까….”
오늘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다 괜찮았다. 집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다 잘 풀릴 줄 알았는데. 누나들이 왜 이렇게 오늘따라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선배 누나야, 선배니까 무덤덤하게 넘겼을지 몰라도 김혜인은 가족이니까, 아무래도 편해서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리게 된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해? 너 생리 하냐?”
“방에 안 들어 갈 거지?”
“네가 성질이 이 모양이니까 여자 친구가 안 생기는 거다. 그놈의 성질머리 하고는….”
계속 여자 친구 운운하면서 귀찮게 굴기에 짜증이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렸다.
“어디 가는데.”
그 말에 대답도 않고 혼자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끈질긴 누나가 따라 올까봐 일부러 문까지 잠그면서.
경수의 표현을 빌려, 파랑 파랑 열매를 먹은 듯 온 통 파란색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내 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그냥, 녀석을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서. 선배고, 김혜인이고 괜히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어울리지 않게 혼자 짜증을 내고 있었는데. 경수 생각 하나에 무너질 나를 알았다면, 그냥 아까 집에 바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정문까지 간 김에 경수 얼굴이나 보고 올걸. 후회가 된다.
“…….”
핸드폰을 꺼내서 문자를 보내볼까 하다가, 그냥 직접 얼굴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겉옷을 들고 방을 나섰다. 거실로 나가니 소파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앉은 누나가 나를 돌아보며 어디 가냐고 묻는다.
“경수 만나러.”
“경수?”
“어.”
그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귀찮게 안 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신발을 신으려는데 누나가 또 그런다.
“진짜 경수 만나러 가? 여자 친구 아니고?”
“…뭐라는 거야.”
“그렇잖아. 경수를 왜 밖에서 보냐? 나도 경수 보고 싶은데. 그냥 우리 집 오라고 해.”
“됐거든.”
“아, 왜. 경수 부르라니까? 나도 경수 보고 싶어.”
“누구 좋으라고 집에 부르냐. 다음에 봐.”
누나 말마따나 셋이서도 볼 수 있는 거지만, 오늘은 그냥. 둘이서 만나고 싶었다. 오랜만이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든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나 혼자,
“간다.”
우리 경수 보러, 가야겠다.
一
경수네 집 앞에서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이어지고, 곧이어 녀석의 밝은 목소리가 들릴 거라 생각했지만 깜깜 무소식이다. 왜 안 받지? 혹시 자는 건가 싶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잘 시간은 아니다. 한 번 더 전화를 해볼까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녀석의 집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내가 보고 싶어 하면 바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만 바쁘지 않으면, 너를 마음껏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경수야, 뭐해.]
[자?]
전화를 받지 않는 녀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장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모든 신경이 핸드폰에 쏠려있다.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애타는 건지 몰랐다. 요즘은 이리저리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녀석을 기다리는 일도 거의 없었기에 몰랐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1학기에 비해 많이 한가해진 녀석이 내 연락을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더욱더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항상 기다릴 틈 없이 이어지던 너의 답장이 익숙해져서는 이 짧은 기다림조차 길게 느껴진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러면 또 밝게 웃고 있는 네 얼굴이 떠오르고. 머릿속에 떠오른 네 얼굴에 나는 또 보고 싶어서 애꿎은 핸드폰을 한 번 더 보게 되고.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거 보면 나한테 연락 해줘.]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기에, 망설이다가 또 문자를 보내고 말았다. 꾹 참고 기다리는 거 하나를 못해서 이렇게 또 연락을 종용하는 내가 한심하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경수에게 소홀했던 나였으면서.
“종인이니?”
그렇게 녀석의 집 앞에서 핸드폰을 쥔 손만 하염없이 내려다보면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온 검은 그림자에 흠칫 놀랄 틈도 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뭐해, 집에 들어가지 않고. 혹시, 경수 기다려?”
“…아, 네.”
“경수 오늘 늦게 온다던데….”
아….
그 말에 괜히 서운해져서 손에 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집에 들어와서 기다리라는 녀석의 어머니께 괜찮다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방학 땐 자주 오더니 요즘 왜 이렇게 안와. 다음에 놀러 와. 알겠지? 죄송해요. 다음에 꼭 갈게요. 어색하게 웃으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어머니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늘은 꼭, 네 얼굴이 보고 싶었는데…. 미리 연락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머니께 늦게 들어갈 거라고 미리 연락까지 한 걸 보면 또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틈만 나면 마시고 다닌다는 소리를 세훈이에게 들었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나 때문에 속상해서 술을 자주 찾는 건지는 모르겠다.
[너 술 마시지, 또.]
[혼난다.]
너는 매일 이렇게 나를 기다렸던 걸까….
녀석이 늦게 돌아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그냥 들어가기가 아쉬워서, 녀석이 오기 전까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
14편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1,2편으로 나눠요^^;
저는 벌써부터 번외를 준비하고 있네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고보면 저는 참... 대책없는 사람입니다. @_@
날씨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