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였을까. 영민이 네가 날 더 지극정성으로 대하기 시작했던 게.
영민은 곧잘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며 전화를 하곤 했다. 받지 않으려고 해도, 그날의 영민이 생각나서
여주는 전화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전화를 받기라도 하면.
'내 전화 안 받는 줄 알았어요.'
'...받았잖아.'
'그러니까. 누나가 안 받아줄리가 없는데, 그치.'
영민의 안도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와서 여주는 영민에게 이제 연락하지마라는 말을 도무지 할 수가 없었어.
입이 떨어져야 말을 하는데, 영민의 목소리만 들으면 약해져 버려서. 꼭 민현을 좋아하던 때의 제 모습이 떠올라서.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모습이랑 닮은 너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면 안됐던 거였는데.
'누나. 밥 먹자, 나랑.'
영민과 통화를 마친 여주가 한숨을 내쉬다 제법 부른 제 배에 자연스레 손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아가야, 맛있는 거 먹을까. 엄마랑.
영민은 생각보다 쉽게 허락하는 여주의 목소리를 듣고나니, 어쩐지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나한테, 마음 내주고 있어요. 누나?
얼마전에 봤을때보다 어쩐지 조금 마른듯한 여주를 살피던 영민이 제게 올려붙는 시선에 뒷머리를 털며 웃어버렸다.
그리곤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은 말은 어쩐지 여주의 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뭐가 웃기다고 웃냐.'
'있어요, 그런게.'
안 먹어도 배부른 거 같은 기분, 누나도 알아요. 혹시?
영민과의 식사는 주로 영민이 던지는 말에 간간히 대답을 해주는 식으로 재미없게 이어졌다. 내가 조금 더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었다면.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여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영민은 그런 너를 보며 또 눈꼬리가 접혀 올라갈만큼 예쁘게 웃다,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포크로 콕 찍어 여주의 입가로 가져다댔다.
'아.'
'...내가 먹을게.'
'나 팔 아프다, 누나야.'
마지못해 입을 벌려 받아먹으면, 영민은 뭐라할 틈도 없이 그새 제 긴 팔을 올려 네 앞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잘 먹으니까 더 예쁘다, 누나. 하곤.
..쓸데없는 소리말고 밥이나 먹어.
그 말에 입을 안으로 말아넣는 시늉을 하던 영민이 또 얼마 안 가 저를 불렀다. 왜, 자꾸 불러.
영민이 저를 부르면, 왜인지 몰라도 저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영민은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비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눈으로 애달프게 누나, 누나아. 하고 부르면
대답하지 않고는 배길수가 없었다. 불렀으면 말을 해.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만.'
'...뭐.'
'일찍 전화 받아주면 안되나.'
영민이 제게 하는 말은 별거 아니었는데도 여주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가 힘들었다. 너한테서 멀어지고 싶은데.
영민은 눈치가 빨랐다. 제가 생각하기엔 적어도, 그랬다. 발을 쏙 뺄까치면.
이렇게 처량하고 애달프게, 나에게 말해왔으니까.
간절함을 담은 진심이 또다시, 영민에게서 멀어질 수 없도록 그렇게.
나를 조종했다.
너는 결국. 뒤늦게서야 고개를 끄덕였고, 영민은 네 끄덕거림에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다, 진짜.
..뭐가 다행이냐.
'누나랑 오늘이 끝이 아니라서.'
마지막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영민의 목소리에 입을 합. 하고 다문 여주가 제 앞의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방금전에 영민이 제게 한 그런 말은.
아무래도, 제게 벅찼다. 심장이 퍼석거렸다.
식사를 어떻게 마쳤는지도 모르겠다. 영민을 어떤 눈으로 봐야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여주는 내내 영민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네가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 지, 그거 또한 걱정되었다. 좋아하지말아봐, 임영민.
영민은 저를 일절 바라보지 않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엘리베이터에서 저보다 한칸 위에 선 내 손을 제 손으로 그러쥐었다.
야, 이거 놔. 손을 흔들어도 영민의 큰 손은 저를 놓아주지 않았다. 손을 빼려고 하면 할수록 영민의 손이 저를 더 옥죄어왔다.
뜨거웠다. 영민의 단단한 손이.
식당가가 있던 9층에서 내려오던 중 아동복이 있는 8층에서 여주의 눈이 머물렀다.
흔들던 손이 잠잠해지자, 영민은 다시 나를 불렀다. 누나, 뭘 그렇게 봐요.
'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제 손을 내어준 채로 정신없이 둘러대는 꼴이 이상했던걸까. 넌.
그때 정신이 팔려서 그런 나를 살피던 너를 생각 못했다.
'나 여기서 버스 타고 갈테니까, 이제 좀 가.'
영민에게 얼른 가라는 듯 손짓하자, 영민은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다 다시 네 앞에 한발 다가와선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춰왔다.
'손 잡고 집에 안 갈래요?'
'..까분다.'
'누나 손 쪼끄매서 귀엽다.'
영민은 제 거절에도 빙그르 웃으며 제게 손을 흔들었다. 전화 세번 울리기전에 받아주기!
빨간 머리통이 멀어졌다. 그제야 한숨을 크게 내쉰 여주가 다시 등을 돌려 백화점으로 들어섰다.
아가, 아가는 예쁜 공주님일까, 아님 멋진 왕자님일까.
엄마를 조금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 아가가.
황민현을 닮은 아이의 얼굴을 보면 또 무너지고 말테니까.
아이가 나를 아주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고객님."
싹싹한 목소리에 진열대를 가득 메운 아가용 신발을 살피던 여주가 고개를 돌렸다. 어, 아직 성별은 모르겠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제 말에도 능수능란하게 접대용 미소를 올린 직원이 고객님, 이건 어떠세요? 하고 물어왔다.
"..조금 더 둘러볼.."
"어머! 혼자 오신게 아니었나보네요."
말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직원은 제 손바닥을 맞부딪혀 시선을 집중시키더니 곧 뜻밖의 소리를 내뱉었다.
"혼자 왔는.."
"남편분이신가봐요, 잘 어울리세요."
"감사합니다."
제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 목소리는.
좀전에 제게 손을 크게 흔들어주던 영민의 것이었다.
"누나, 왜 혼자 이런델 오고 그래. 저희 조금 더 둘러보고 올게요."
영민이 당황한 티를 전혀 내지 않은 채 직원에게 입바른 소리를 내뱉곤 여주의 손을 잡아채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이거 놓고. 야, 임영민.
딱딱한 목소리로 영민의 이름을 불러도 영민은 제게 뒷모습만 보인 채 발걸음을 옮겼어.
두눈을 꾹 감았다 뜬 여주가 영민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딸려갔지.
이윽고 영민이 돌아섰고, 여주는 영민의 묘한 표정에 오히려 잘됐다 생각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네가 나를 먼저 미워해서, 돌아서주면 차라리 내 마음이 편할테니까.
체한 듯 늘 답답한 속이 뻥 뚫릴지도 모르잖아, 영민아.
나는 너를 통해, 나를 보고 있으니까.
너는 날 사랑해도, 분명 행복하지 못할거야. 그러니까. 이만 하자, 영민아.
"누나 조카 있어요? 아, 아니면. 누나 주변에 누가.."
"..본 그대로야."
"...본 그대로가 뭔데요?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내가 뭐 생각하는데요."
내가 생각하는 거 아니라고 말해요, 누나. 대답 좀. 나 숨막혀서 그런데, 대답 좀 해줘요.
"내 애 맞아."
영민의 표정이 무너져내리는 걸 보고야 말았다. 나는 너한테 상처를 무더기로 안겨주고야 마는 사람인데.
한번도 네게 사랑을 준 적이 없는데, 왜 너는.
"...누구 앤데요."
"...알아서 뭐하게."
착잡한 제 목소리와는 반대로 싸늘하게 내뱉어지는 여주의 목소리에 영민은 결국 제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고는 말을 했다.
"...누나 너는."
"....."
"왜. 누나, 너한테는 내가 소중한 존재가 아니에요?"
나한텐. 너무 소중해서, 닳을까 애가 타는 사람인데.
늘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난데.
영민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널 울릴 생각은 없는데. 왜 자꾸 나때문에 울려고 그래, 바보같이.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질 거 같아서 눈을 치켜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누나를 좋아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기도 전에 휴학을 하질 않나.
열번 보고싶다 생각해도, 한번 보고싶다 이야기할수밖에 없게 만드는.
늘 서늘한 당신을 좋아하는 게 이렇게 힘이 든데.
왜 나는, 당신을 못 놓을까.
끝까지 말이 없는 여주를 지켜보던 영민이 알면서도 쉬이 오지 못했던 여주의 집앞까지 여주를 데려왔다.
현관문앞에 선 네가 뒤를 돌며 가, 좀. 하고 서늘하게 말하자, 영민은 그런 네 어깨를 쥐어잡곤 화를 참으며 말했어.
"다시 한번 더 물어요."
"...."
"애 아빠는요."
영민은 이런 말을 내뱉고 있는 제 스스로가 비참했다. 근데도, 그런데도 포기가 안되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나.
"임영민, 그만해. 애까지 있는 거 알게된 마당에."
"...."
"그만 해."
"...뭘?"
"....."
영민이 기어코 화를 냈다. 화를 내게 만들었다. 나는 자꾸 나쁜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뭘 그만해야 되는데?"
"...."
"뭘 그만해야 하느냐고!"
"....임영민."
"못해. 나 안해요."
"...."
"계속 해요,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누나가 이거보다 더한 일을 했더래도.
나는 결국, 누나니까. 그만 안 해. 정 떼려고 하지마요.
누나가 모질게 굴고, 자꾸 도망가려고 해도.
나 누나랑 끝까지 갈거니까. 뭐라도 할거니까.
영민이 제 할말만 실컷 하고 돌아서버렸는데.
멀리 사라지는 처연한 뒷통수에 대고, 모진 말로 쐐기를 박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