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디 올림푸스
Hotel The Olympus
소네트 씀.
괜히 뒤숭숭한 새벽. 결국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어차피 낮은 그들이 일을 나가기 때문에 굳이 깨어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만 잤다. 나는 오후가 두시가 넘고서도 계속 자다가 문득 느낀 공복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보니 앞선 며칠 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기억이 없다. 원래도 불규칙적인 식사였으나 올림푸스에 발을 들인 이후는 식사 주기가 영 꽝이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올려묶고 잠이나 깰 겸 세수를 했다. 여전히 으슥할 정도로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에어컨을 끄고 방을 나섰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기척조차 없는 고요한 복도에는 오직 내가 슬리퍼 끄는 소리만 울렸다.
사실 같은 층에 머묵는 남자들 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건물들의 구조를 제대로 익힌 것도 아니어서 기껏 돌아다녀봤자 넓고 긴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급속도로 느낀 지루함에 1107호부터 차례대로 훑으며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혹시 안에 사람이 있는 기척이라도 느껴지면 문이라도 두들겨 얘기를 걸어볼 셈이었다. 내 방을 제외한 나머지 방을 차례대로 살폈지만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다니엘의 방에 귀를 바짝 붙이곤 희미한 소리를 찾으려 온 고막을 열고 집중했다. 그러다가 어깨에 턱 하니 얹어지는 손에 깜짝 놀라 정수리를 박았지만.
"깜짝이야!"
"누나. 여기서 뭐해요?"
번쩍이는 선글라스를 한껏 치켜 쓴 관린이 눈 앞에 나타났다. 다니엘 형 찾아요? 잔뜩 놀라 가슴께를 움켜쥐고 있는 나와 달리 라이관린은 아주 태평했다. 나는 관린의 말에 그제야 놀란 티를 거두며 대답했다. 아니. 일어났는데 아무도 없길래. 관린은 자연스레 제가 머무는 방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다들 할 거 있어서 갔죠. 나는 역시 그렇구나 하며 입맛을 다셨다. 관린이 제 옷 주머니를 모조리 뒤적거리며 카드키를 찾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관린이 드디어 마이 안쪽 깊은 곳에서 카드키를 꺼내 문 도어락에 가져다 댔을 때 타이밍 좋게도 내 배에서 주책맞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아주, 조용한 복도에, 그 소리만 오롯이. 나는 아닌 척 하느라 죽을 뻔했으나 사실을 쪽팔려서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관린은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말고 꼬르륵하고 울린 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누나 배고프구나."
"아니야."
"아닌데. 내가 방금 소리 들었는데."
관린은 음흉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그에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가뜩이나 키도 큰데 긴 다리까지 휘적이면서 오니까 퍽 위험스러워 보였다. 관린은 허리를 굽히며 키가 작은 나와의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곤 입꼬리만 슬그머니 올리며 물어보았다. 누나 심심하면 나랑 놀까요. 맛있는 것도 먹어야 하니까. 나는 배가 고팠고 애초에 거절할 생각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관린이는 내 등을 밀어 방문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곤 내 방 앞에 도착해서는 등을 두어번 두들겨주며 들어가라고 말한다.
"너랑 놀자며. 근데 나 방 가라고?"
"아니요. 저는 제우스 가야하니까. 거기는 부자 많아서 이렇게 입으면 안돼요. 컴플레인 걸리거든요."
"아..."
그러니까 예쁘게 다시 입고오라고. 관린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괜히 간지러운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방에 들어갔다. 평생 해볼 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저절로 발이 화장대 앞으로 향한다. 그 언젠가 홍등가에서 분을 찍어발랐던 언니들을 더듬어 기억해내어 화장품을 찍어발랐다. 한없이 어설픈 모양새였으나 전의 꼬라지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옷장을 열어서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옷가게에서 관린이 가져왔던 미니원피스와 라이더자켓을 꺼냈다. 여름에 입긴 조금 더웠으나 어차피 카지노 안은 냉방이 잘 됐을테니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라이더를 걸치자마자 부랴부랴 방에서 나섰다. 그러자 반대편 복도에 기대서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관린이 보였다.
"나 늦었지. 미안."
"괜찮아요. 근데 누나 갑자기 이뻐졌네요?"
"어?"
"음..."
대뜸 이뻐졌다며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관린이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뒤로 쭉 뺐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한참이나 관찰하던 관린이는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딱 소리를 냈다. 그리곤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나 화장 했구나! 나는 나에게로 뻗어있는 손가락을 그대로 잡아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별 일이냐. 관린이는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누나 그러니까, 훨씬 여자같아요."
"여자같은 건 뭔데. 나 원래 여자 맞거든?"
아 몰라! 관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지가 불리한 상황이면 한국말이 낯선 행동을 하는 게 습관인 것 같았다. 여전히 어깨에 올려져있는 관린의 팔은 치워지지 않은 채로 제우스로 향했다. 관린이 제우스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임은 확실했다. 입구 쪽에 들어서자 경호 두 세명 정도가 관린이와 나의 양 옆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관린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관린이는 내려온 선글라스를 한번 추켜세우며 손인사를 했다. 그럼에도 느슨해지긴 커녕 더욱 꽉 조여오는 어깨 위의 손이었다. 힘이 들어간 손은 내 몸을 관린이의 옆으로 더 찰싹 붙이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떨어지는 시선이 종종 있었다.
"꼭 이렇게 가야 돼?"
"누나 길 잃어버리지 말라고 그런 거예요."
풀라고 말한다고 풀 것 같지도 않아서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관린이의 속도에 맞추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9층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어깨죽지에 얹혀있던 온기가 가신다. 뭔지 모를 민망함에 숫자가 올라가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을까 관린이가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아까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냐며 타박을 주자 냉큼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구층에서 멈추고 관린은 다시 자연스레 어깨 동무를 한 채 곧장 커브를 꺾어 옆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관린이 구태여 손대지 않아도 저절로 열리는 문에 감탄을 했다. 그리고 열리는 문 양 옆으로 보이는 직원들은 일렬종대로 서선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같이 인사하려고 했으나 그것을 관린이 말렸다.
"누나는 인사하지마. 이건 당연해요."
"너는 그러냐? 나는 아니거든."
"아무튼 누나 여기서 나랑 같이 밥 먹을 거예요."
한 분의 여자 직원이 나와서는 관린이와 나를 안내했다. 관린은 지정석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게 설명했다. 여기 원래 VVIP를 위해 만들어놓은 식당인데, 나는 맨날 여기서 밥 먹어요. 하데스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 뷰가 좋은 창가 자리로 우릴 안내한 직원은 관린이 자리에 착석하자 익숙한 듯이 늘 드시던 걸로 올리겠다는 말을 남긴 후 떠났다. 관린이는 아차 하며 자리에서 도로 일어나 아직 앉지 못한 내 쪽으로 왔다. 의자를 뒤로 빼주며 공손하게도 앉으라고 말한다. 어정쩡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잔뜩 빼진 상태의 의자를 부드럽게 밀어주더니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기본 매너."
"뭐래. 그런 건 여자친구한테나 하지?"
"나 없어요. 여자친구."
테이블 위 그라스에 따라져 있던 차가운 물을 들이킨 관린이 말했다. 여기 올 때 누나가 해주면 되겠다! 내 여자친구. 맨날 이렇게 에스코트 해줄게요. 나는 그 말에 물 먹다 사레가 들려 켁켁댔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은 관린은 고이 접혀 있던 냅킨을 펼쳐 제 무릎에 올려놓으며 연신 콜록이는 나를 쳐다본다. 어느정도 기침이 멎자 나는 관린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임마.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다른 여자애들한테도 이렇게 해? 그거 하지마. 괜히 착각하는 여자애들 많다."
"나 아무한테나 이렇게 안하는데..."
중얼거리듯 읊조리는 관린의 말을 모른 척하며 물을 한번 더 들이켰다.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을 그렇게 짧지 않았다. 관린과 몇 마디를 더 주고 받으니 이미 음식은 다 세팅되어 있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젠틀한 신사인 척 하는 관린을 한 번 보다 나는 어색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생전 이렇게 고급진 요리는 먹어 본 기억이 없어서 어찌 먹어야 할지 고기는 어떻게 썰어야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고개를 슬며시 드니 이미 익숙한 듯 오물거리는 관린이를 한번 훔쳐보다가 다시 고개를 박았다. 분명 나이는 내가 더 먹었는데. 삶의 윤택함은 차원이 다르게 높은 것 같은 관린이를 보자 쪽팔림이 몰려왔다. 애초에 승패를 가릴 것도 없는 부분이었지만 왠지 몰려오는 패배감에 방금까지도 돌았던 입맛이 둔해지는 듯 했다.
"누나 배고프다며. 왜 안 먹고 있어요?"
"어? 뭐. 그냥. 갑자기 입맛이 없네."
"에이. 또. 거짓말. 내가 먹여주면 먹을 거예요?"
장난이었겠지만 진짜 먹어주려는지 접시를 들었다 놨다 난리를 피우는 관린이에 식겁하며 알겠다고 했다. 여기에 보는 눈이 몇 개인데. 제우스 유명인사 라이관린의 여친 즈음으로 낙인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시 머뭇거리며 포크와 나이프를 집었다. 여태 한 번 남 부끄러운 일을 할지 언 정 낯부끄워 하며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데서 의외의 자괴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여전히 음식은 손도 대지 못하는 나를 힐끗거리며 쳐다 본 관린이는 안되겠는지 내 쪽에 있던 접시를 모조리 제 쪽으로 끌어와 대신 칼을 들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틱틱거리며 말했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되도 않는 허세를 부렸다.
"야. 줘. 내가 알아서 먹을게."
"됐어요. 제가 썰어줄래요."
"아니야. 내가 썰어서 먹을래."
내 땡깡에도 아무렇지 않게 칼질을 하던 관린이는 고개는 여전히 숙여 손 끝에 칼질에 집중한 상태로 말했다. 그러다 내가 한번 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하며 데시벨을 살짝 높이자 눈만 치켜뜨며 대답한다. 고집 부리지 마요. 저는 그거 제일 싫어해요. 나는 분명히 그런 관린을 보며 조금 쫄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얌전히 기다리니 가지런히 썰려있는 고기가 담긴 접시가 내 앞으로 도로 내밀어진다. 아까보다 관린이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먹어요."
"......"
"진짜 먹여줘야 씹을 거예요?"
"아니. 먹을게."
어딘가 묘하게 강압적인 투에 나는 결국 꼬리를 내리며 포크로 한 점을 집었다. 입으로 우겨넣자 채 씹기도 전에 스르륵 녹아내리는 맛이 황홀경에 이를 지경이었다. 나는 말 없이 고기만 입으로 넣고 우물거렸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그 위로 부드럽게 선율의 클래식과 저희들처럼 밥을 먹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만 들릴 뿐 관린과 나 사이에서는 좀 전과 달리 어색한 기류와 적막만이 흘렀다. 그게 어색해 말이라도 걸려던 찰나 먼저 선수를 친 다른 사람이 밥을 먹는 관린이에게 아는 체를 해댔다. 약간은 살집이 있는 몸매에 머리는 노랗고, 눈동자는 푸른 것을 보아 딱 봐도 우리나라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가 입에서 줄줄이 튀어나온다.
관린이 대만에서 온 애라는 걸 얼핏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영어로 관린이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고 내가 대신 당황했다. 정작 관린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똑같이 영어로 대답했다. 나는 여전히 일정하게 포크질만 하며 대화를 하는 그 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남자의 시선이 한 번, 그 뒤로 관린의 시선이 따라 한 번. 그리곤 동시에 고개가 돌아가고 둘은 마저 대화를 나눴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음식은 맛있다. 맛있는 것 분명한데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고, 속이 더부룩 해 방금 먹은 것들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관린이는 다른 접시에 놓여있던 브로콜리 몇 개를 집어먹더니 나와 같이 포크를 놓았다. 의자에 걸쳐놓았던 마이를 일어서며 집어든 관린이는 나도 따라 일어서는 것을 확인하곤 뒤를 돌아 걸어나갔다.
나는 왜 갑자기 관린이의 기분이 저기압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원래 감정 기복이 잦은 애인가 생각하려 해도 갑자기 낮아진 기류에 왠지 나도 한 몫을 하는 것 같아 앞서 걷는 관린이를 불러세웠다. 그에 관린이는 몸을 완전히 돌리지는 않고 고개만 휙 꺾어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아까 너한테 뭐 실수한 거 있어? 관린이는 금세 내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살피고는 살갑게 굴었다. 없어요. 에이. 왜 그래요. 표정 되게 안 좋아요. 나는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하려고 마저 걸으려던 관린이를 내친 채 물었다. 나 그렇게 눈치 없지 않거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약간 그런 기분이었다. 왜, 삼류 로맨스 소설에 보면 흔히들 쓰이는 진부한 장면들 있지 않은가. 재벌인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연애 스토리. 그 중에서도 여자가 남자와의 격차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면 괜히 그런 것에 화를 내는 남자. 그 장면의 일부를 겪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보다 나는 관린이와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러자 입을 삐죽거리고 머뭇거리던 관린이가 입을 뗀다. 다니엘 형한테 누나 이야기 되게 많이 들었는데요. 누나 되게 쿨하고, 멋지고, 시니컬한 사람이라고. 나는 이게 그거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 허리에 손을 짚고선 관린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근데 누나 아까 주눅 들었어요. 알아요?"
"......"
"왜 칼질 못해서 눈치 보고 있어요. 그런 거에 쪽팔려 할 필요 전허 없는데."
내 말이 틀렸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는 관린을 쳐다보았다. 제가 생각한 누나 모습은 그게 아니니까. 조금 실망할 뻔 했어요. 조금. 조금을 강조하는 관린이에 그래, 아주 어이가 없었다. 쓸 데 없는 곳에서 핀트가 나가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게 나름 귀엽기도 했고. 나이 차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어린 티가 나는 관린이었다. 나는 내가 한 번 봐주자 싶어 관린이의 등짝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래도 담부턴 쓸 데 없는 거에 승질 내지마. 어린 놈이. 등판을 두들겨주고 내리는 손이 턱 잡혔다.
"왜."
빤히 바라보는 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싶었으나 결국 입을 떼지 못한 관린이는 내 손을 놓고 다시 앞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을 도로 내려가자 천장이 드높은 카지노장이 나타난다. 슬롯이 돌아가던 아랫층과 달리 엄숙하나 조금은 붕 뜬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중인 게임은 판이 큰 게임인 것 같았다. 높이 쌓여 탑을 이루고 있는 수표 뭉치들과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칩들이 그 반증이었다. 나는 그 중 한 무리에 익숙하게 인사를 받으며 앉는 관린이를 따라 그 옆에 후다닥 앉았다. 관린이 사인을 보내자 금방 게임이 시작했다. 딜러에 의해 카드가 나눠지는 것을 보아 포커인 듯 싶었다.
관린이는 게임에 집중했다. 내가 카드로 할 수 있는 놀이는 기껏해야 도둑잡기였기 때문에 룰을 모르는 나는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잔잔한 미소를 띄운 채 게임을 진행하던 관린이는 결국 게임에서 이겼다. 칩과 돈이 줄줄이 관린이의 앞으로 쌓였다. 그 후로도 게임은 몇 번이고 더 진행되었다. 베팅이 적은 판에서는 일부러 져주며 돈을 잃어주는 노련미도 발휘했다. 결국 자리 밑에 있던 검은 가죽 가방에 줄줄이 들어가는 돈뭉치를 보며 휘파람을 불던 관린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신을 경호하는 남자에게 가방을 들라며 손짓을 했다. 카지노를 나서며 기분이 좋은듯 흥얼거리는 관린이를 올려다봤다.
"거기서 제일 어린 거 치곤 게임을 잘하더라."
"......"
"너보다 나이 든 사람들 다 이겨먹으면 좋냐? 좀 져주기도 해라."
"...나 몇 번 져준 거 같은데."
"결과적으로 네가 다 따먹었잖아."
속으로 얼마나 빡쳤을까. 그 사람들. 새파랗게 어린 놈이 지 피같은 돈 다 가져갔으니. 나는 키득대며 말했다. 그러나 관린은 제자리에 우뚝 서 고개를 삐딱하게 튼 채로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정말 순수하게 왜? 하고 물어봤다. 그러자 더 구겨지는 관린이의 표정. 아까부터 궁금한건데 왜 자꾸 어리다고 해요? 관린이의 말에 나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서우리만치 갑자기 능숙해진 관린이의 한국말 구사 실력에 여태껏 어눌했던 발음은 다 연기고 구라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애새끼 취급해요 누나."
"......"
"그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어리다는 거."
"...그런 말 어디서 배워왔어. 이제까지 어눌한 척이란 척은 다 해놓고,"
"말 돌리지 마요."
여기 있으면서 어리다는 말이 제일 싫었어요. 그래서 내가 머리에 구멍 낸 사람만 몇 명인데.
어리긴 하나 꽤나 척박하게 굴려졌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것인지 눈매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나는 이런 애 앞에서 감히 나이의 깊이를 가늠한 것이다. 당황한 나는 도대체 누가 한국말을 가르친 것일까 하는 상황에 맞지않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네거티브 한국인 같은 관린이의 구사력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제 말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 심기가 불편했는지 머리카락 사이로 관린이의 손가락이 얽허들었다. 차마 그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고 고개를 들게 하지는 못하는지 조금 부족한 길이로 커다란 손이 뒷통수 전체를 감쌌다. 고개가 관린에 의해 들려졌다. 180이 훌쩍 넘는 큰 키가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야 느껴진다.
"누나가 나를 어리게 안 봤으면 좋겠어요."
"...알았어."
"나 그렇게 어리지도 않고, 어려보이고 싶지도 않으니까."
어르고 달래며 뒷통수에 닿아있는 손을 조심히 잡아내리자 유순히 따라 내려 오는 손길이 있었다. 나는 먼저 관린이의 한쪽 팔을 들어 내 어깨에 걸쳐놓았다. 내가 말을 잘못 했으니 용서해달란 의미가 담긴 나름대로의 사과였다. 그러자 관린이는 나를 내려다보며 끝내지 못한 말을 마저했다. 이제 앞으로 나랑 밥을 매일 같이 먹어요. 내가 에스코트도 해주고 매일 고기도 썰어줄게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그러자 관린이는 눈을 부라리며 성을 냈다. 아, 어린애 취급 하지 마요. 나는 그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한번 더 성의있게 대답해주었다. 고개도 나름 열심히 끄덕이며.
알았어. 알았다. 관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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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관린이 특집인 이유는 남주인공이 5명이다 보니 개개인과의 러브라인을 이어보려는 저의 부질없는 노력의 결과물입니다...오늘은 관린이가 혼자서 한 화 다 독식했으니 다음엔 진영이랑 민현이랑 엮고,,,, 그 다음엔 차례대로 한 명씩 ㄹ ㅓ브라인으로 한 편 채우고.....(아무말) 저 한국말 서툰 외국인들이 빡치거나 듣고싶은 말 있을 때 갑자기 네거티브 한국인화 되는 거 좋못사합ㄴ디ㅏ...제 사심 듬뿍 담은 관린이...생각보다 과분한 관심 감사해요.. 초록글도 올라가보고 감격했어요ㅠㅠㅠㅠㅠ더 열심히 쓸게요.
참고로 호텔 디 올림푸스는 장륵 특성이 느와르, 조직물 느낌보다는 러브러브러브러브한 느낌이 더 많을 글이랍니다. 애들이 막 들이댄다고 당황하심 안돼요^____^ 느와르, 로맨스 둘 다 포기못해...못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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