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아메리카노 00
마감을 하기 위해 바래진 테이블을 닦고 있었을 때 오늘도 어김없이 유리문이 열렸다. 해가 지기 전에 깨끗하게 닦아놓은 유리문 위에 그의 손자국이 남겨졌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회사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주변에서 카페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게 싫어서 시작했지만, 더 큰 이유는 나의 로망과 연결 지을 수 있다. 내 로망은 서로에게 정성을 담아 따뜻한 라떼 한 잔, 아니 믹스 커피여도 좋으니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커피 마시면서 작은 이야기도 하고. 어렸을 적,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고 생긴 로망이었다. 물론 로망은 로망일 뿐 남자친구도 없는 처지에 무엇을 바라겠냐며 씁쓸한 입맛을 다지곤 했다. 카페 알바를 시작하면서 손님들이 대부분 커플이었는데 가끔은 나의 모습이 처량해지곤 했던 일이 다수지만 연애세포도 죽어가고 있는 터에 먼 산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마음만 가질 뿐 사실 귀찮은 것도 있고. 맞다, 괜히 못해서 변명부리는 거. 당차게 혼자다니는 모습도 멋지다며 매일같이 위로하는 나 자신을 뒤로 한 채.
“아이스아메리카노 샷 추가해서 한 잔 맞죠?”
그렇게 문이 열릴 때면 나는 늘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그도 늘 언제나 그래왔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표시를 해왔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땐 취직하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 같았다. 훤칠한 키에 말끔한 인상이 아마 내 머릿속엔 신입사원으로 박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그의 수화기 너머로 ‘팀장님’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아, 신입사원이 아니라 액면가가 낮은, 굉장히 동안이구나 하며 곱씹었고 어느새 단골이었던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팀장님이라는 단어가 흔한 카페 아르바이트생인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고, 처음엔 아저씨도 당황한 눈치였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쿠폰 위에 도장을 차곡차곡 모았다. 늘 내가 마감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카페를 찾았으며 아마도 높은 직급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야간근무를 자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말끔한 정장 차림과 곧 목을 조를 것만 같았던 넥타이 그리고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깔끔한 구두까지 변함없는 옷차림으로 카페를 찾아왔다.
학교와 병행하면서 알바를 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오후 타임을 자주 맡게 되었다. 과제와 시험기간을 동반할 시기에는 그만 둘 까 생각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악을 쓰며 버텼던 것 같다. 악을 쓰며 버티는 것이 표정에 다 드러나 있었는지 평소 말이 없던 아저씨는 걱정된 얼굴을 하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힘든 일 있어요? 오늘따라 축 처져있는 게 마음에 걸려서.”
별일 아니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컵에 얼음을 담았다. 처음엔 아메리카노 하나 만드는 것도 힘들었지만 어느새부턴가 이 아메리카노 하나는 눈 감고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빨대까지 꽂은 뒤 아저씨에게 가져다 주자 고맙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지쳐있던 내게 감히 뿌듯했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카페에 걸려있던 시계를 보자 늦은 시간에 밖을 내다보자 어두컴컴해진 배경에 마음이 다급해져 탈의실에 들어가 유니폼을 정리하고 나오자 문 앞에 웃으며 기다리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한 손엔 차 키와 그리고 다른 한 손엔 아메리카노와 함께.
“오랜만에 차 가져왔는데 데려다줄게요. 부담스럽다고 거절하지 말고, 진짜 힘들어 보여서.”
뜬금없는 아니 뜬금없다기보다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니 뭐가 좋은 건지 푸스스 웃으면서 고개를 떨구는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떨군 나의 모습이 얼마나 웃길지도 상상이 갔다. 아저씨에게는 별 것도 아닌 일에 고민하고 있는 게 말이다. 사실 남의 차 아니 외간남자 차에 타본 적도 없고 단 둘이 탔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될 지 모르겠고 더군다나 서로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통성명도 되지 않은 상태인데 아저씨는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주관적으로 봤을 때 무언가를 바라기보다는 온 몸에 매너가 갖추어져 있는 사람 같았지만 그래도.
"힘드실텐데 괜찮아요, 더군다나 시간도 많이 늦어서..."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데려다 주는거에요."
아무래도 민폐인 거 같아 거절의 손을 건넸지만 아저씨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훅 치고 들어왔다. 그래, 뭐... 한 번쯤이라며 자기합리화를 할 때쯤 나갔었던 정신을 되찾은 것 같았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다시 거절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고개를 들어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진짜 괜찮아요, 괜히 신세 지는 거 같아서."
"신세는 무슨. 괜찮으니까 데려다줄게요. 나쁜 사람 아니니까 겁 안 먹으셔도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