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왜 여기에. 그러니까.
너는 머리를 긁적이곤 제 현관앞에 서있는 영민을 바라봤다. 용케도 저를 찾아낸 영민이 대단하기도 했고.
다 끝난 마당에 갑작스레 저를 방문한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널 붙잡고 뭘 할 순 없으니.
나는 문을 닫아야 했다.
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 싶었다. 저 심연의 나락에 가라앉아 너를 영영 모를 것처럼.
누추해진 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도 한몫했다. 네 앞에서 건방떨며, 자존심 높은 콧대를 세웠던 그때와는 다르니까.
'턱-'
"환영인사가 너무 야박하다고는 생각 안해요?"
"......원하는게 뭔진 모르겠는데."
영민의 목소리가 저랬었나. 네 목소리가 원래 이렇게 굵고, 낮은 목소리였나.
그러니까 그 일이 있기 전 그 발랄하던 꼬마는 어디로 가버린건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그 3년새에 영민은 컸다. 완전한 어른이 되었다.
..다행이네.
네가 무사히 어른이 되어서 다행이다. 영민과 저는 지금 마주하고 있으면 안되는 악연이었다.
절대 의도한 건 아니지만, 타이밍의 농간으로 저는 어린 영민에게 좌절을 안겨준 사람이었으니까.
같은 소속사, 한창 잘 나가던 널 따르던 영민이 귀여웠다. 나이는 고작 한살차이였다. 다른 애들과 달리 꼬박꼬박
제게 누나,누나하고 불러오는 발랄한 목소리가 팍팍한 제게 웃음을 던져주곤 했다. 영민은 딱 그 나이대의 아이같았다.
노래 연습을 하다 힘들면 제게 달려와 누나, 저 오늘 삑사리 났어요. 쌤한테 혼났어요. 미주알 고주알 제게 내뱉는 잔잔한 목소리도 좋았다.
네 살가움에 매번 무뚝뚝하게 대꾸해서 미안했지만.
다 좋았다. 특히 영민이 제게 보여주는 한결같은 든든함 같은게.
제 인생에 늘 두고 보고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영민을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소속사가 망하기 전까진.
소속사의 독박을 내가 뒤집어 쓰기전까진, 그랬다.
대표가 도박을 했다. 하루 아침에 야반도주를 했다. 사무실이 풍비박산이 됐다. 내게 투자하던 광고업자들이, 감독들이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매몰차게 돌아섰다. 어중이떠중이 신세가 된 것이 슬픈 건 아니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영민이 갈 길을 잃은 채, 모든 이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게 더 마음이 아팠다.
저는 그때 저도 모르는 새 영민을 부쩍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는 영민이 풀이 죽은 채 힘없이 터덜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마음 아팠다.
평소 제게 마음이 있다던 스폰서를 제발로 찾았다. 돈은 필요없으니까, 영민을 이적시켜주지 않겠냐는 멍청한 조건을 달았다.
해줄 수 없는 건 이런거밖에 없으니까.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널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 나는 네가 너무 눈부시니까.
네가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잘 되었으면 좋겠어.
스폰서는 내가 걸었던 조건을 충실히 이행해 주었다. 그에게 속박되어 몇번이고 기계마냥 그의 부름에 응해야 했지만.
그런건 다 괜찮았다.
영민은 영문도 모른채 다른 소속사로 이적이 되었다며 조심스레 내게 전화를 걸었다. 어물쩡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한 너는
몇번이고 내게 미안한 기색을 가지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댔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너는 그제야 본론을 이야기했다.
'누나, 나 다른 소속사로 옮겨간대요, 내 노래가 좋대요.'
응, 그래. 영민아.
'잘됐네, 축하해.'
'그게 끝이에요?..'
'...'
'나랑 이제 자주 못 보는데,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누나가 더. 누나가 더.'
누나가 나보다 먼전데, 왜.
그때 너는 내게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내뱉었을까.
그건 너도 나와 같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이 이어지다 제게 내뱉어지는 영민의 말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 부질없는 생각들인데.
"사람 면전에 두고 문을 닫으면 내가 닫게 두겠어요?"
"..해줄 수 있는거 없어. 보다시피."
애초에 스폰서를 통해 저도 아닌 영민의 이적을 조건으로 건 것 자체가 무모하고 당돌한 짓이었다.
그때는 새파랗게 어려서 철딱서니가 없었던 걸까.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린 여주가 말했다.
여전히 좋아하는 영민에게.
"돌아가."
제게 좋아한다 말했던 영민을 기억한다. 연습도 빼먹고 뛰어왔다는 영민의 말이 영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젖은 앞머리가 뒤집어쓴 까만색 볼캡 사이로 드문드문 보였다.
저를 보고 해맑게 웃는 영민과 다 망해빠진 사무실이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날의 기억중 가장 이질적이었던 건 영민이 저를 보고 덜컥 좋아한다 말했던 장면이었다.
그 고백에 귓가에도 심장이 있는것처럼, 제 심장박동이 거세게 들려왔다.
"해줄 수 있는게 왜 없어, 아. 몸은 파는거라 안되나?"
좋아한다 제게 말하는 타이밍에 뭔가 달라질 것 같다고 희망찬 상상을 하기 무섭게 제 스폰서는 증권가 찌라시처럼
제 얘기를 온통 흘리고 다녔다. 그게 영민의 귀로 들어가는 것도 한순간이었고.
배신감. 그건 배신감이었다.
어린날 제가 마음놓고 사랑한, 여자가 제게 준 매몰찬 배신감.
영민은 그럼에도 너를 여전히 좋아하는 제 자신이 한심했다. 무너지려거든 나한테서 무너져야지.
왜 마음대로, 그렇게 딴 남자한테. 당신을 내줬냐고.
영민에게 자세한 내막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건 제 악랄한 스폰서도 마찬가지였다.
영민이 그 상황에서 저를 오해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도 없었고.
결과가 어찌 됐건, 나는 이제 널 꿈에서도 그릴 수 없으니까.
영문도 모르는 영민은 네게 전화를 걸어 부러 모욕적인 말을 골라했다.
그러면 제 기분이 조금 나아질 줄 알고.
여자는 돌연 자취를 감췄다. 영민은 승승장구했다. 둘은 시곗바늘처럼 닿을 수 없었다.
여주는 그게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 이야기에 한달음에 달려와 저를 감싸안을 가족들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비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괜찮았다. 나때문에 상처입을 사람이 없다는게.
서울에서는 그래도 제가 꽤 얼굴이 알려졌나 보다. 힐끔대는 시선들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서
여주는 지방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숨어 지냈다. 될 수 있으면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
"그래서 나한테는 팔 마음 없고?"
한껏 너스레를 떠는 영민의 얼굴을 흘낏 보던 네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영민에게선 가끔 전화가 왔었다.
이전과 달리 저를 할퀴고 상처내는 말들뿐이었지만, 그게 또 영민의 목소리라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그 상처를 다 받아내고 말았다.
그리고 여주가 그럴 수록 영민은 더 화가 났다. 약이 잔뜩 올랐다.
"나랑도 해요, 비싸게 굴지말고."
면전에 대고 제게 내뱉는 생채기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었지만.
눈 앞에서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긴 또 어떻게 찾았어."
"그게 뭐 별거라고."
"찾아오지마, 다시는."
영민이 다시 할퀴기전에 문을 닫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숨을 참았다.
면전에서 닫힌 문을 노려보던 영민이 제 선글라스를 찾아 끼곤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벗어났다.
흥얼거리는 소리도 잊지 않은채.
"내가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꺼져줄 것 같은가."
아직도 예전 임영민을 생각하네.
사실 여주를 찾느라 고생 좀 했다. 숨는 족족 찾아낼 걸 알면서도 자꾸 사라지려고 구는 여자에 영영 제 시야에서 사라지지는 않을까
애간장을 태우고 잔뜩 조바심을 내는 속내와는 반대로 영민은 기를 쓰고 저를 밀어내는 여주가 못마땅했다. 아니, 싫었다.
영민은 여주의 인생에서 꺼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언제부터 제가 이렇게 영악하고 나쁜 놈이 되었는지,
언제쯤 이 짓을 그만두고 여주를 내버려 둘 수 있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저는 여주의 다리를 분질러서라도.
제옆에 여주를 둬야만 했다. 둘 생각이었다.
비뚤어진 제 마음이었다.
-어....갑자기 여주를 잔뜩 오해하고 나중에 돌고돌아 후회할 영민이가 보고싶어서...
저도 뭐라고 썼는지 모르겠지만...자급자족입니다.....^.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