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훈이 사랑할 때 C
000.
"같이 가자고 했잖아."
"왜 거기서 와?"
"폰은 왜 꺼놨는데. 존나, 하."
"너 뛰어 왔어?"
"..."
"?"
"어."
- 박지훈이 (짝)사랑을 할 때 -
001.
아, 진짜 왜 이래. 지금 여주의 앞에는 퍽이나 자상한 얼굴로, 다정한 물음을 해 오는 지훈이 있다.
"여주야, 뭐 먹을래?"
"내 뭐, 아무거나..."
"입맛 없어? 여기 별로야? 표정이 안 좋은데. 다른 데 갈까."
"아니, 아니다. 내 표정이 왜. 기분 좋다."
"괜찮아? 너 크림 좋아하잖아. 아, 전에 요즘은 로제가 더 좋다고 했던가. 로제로 시킬까?"
"어, 어... 진짜 다 좋은데. 니 먹고 싶은 거 시켜라."
용돈을 받았다며 밥을 먹자더니 평소엔 죽어도 같이 안 가 주던 꽤 비싼 파스타 집을 데려온 지훈이었다. 얼마 전의 일 때문인지 지훈은 화해를 한 날 이후로 화, 수, 목... 굳이 만나야 할 이유가 없고 맞는 시간도 없으면서 없는 시간까지 내어 한 주 내내 꼭 여주와 붙어 있었고, 심지어는 늦은 시간이 아니어도 여주의 자취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금요일인 오늘까지 지훈은 여주에게 눈에 띄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제 딴에는 많이 미안했는지 노력하는 거 같은데, 그냥 평소처럼 하지. 얼마 가지도 못할 거면서.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지훈이 아직도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럴 필요까지 없다고. 항상 보던 얼굴과 밥을 먹는 건데도 이렇게 어색할 수 있다니. 여주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훈은 계속해서 낯간지러운 행동들로 여주를 당황시켰다.
"니 방금 뭐, 뭐 한 건데..."
"여기 묻었길래. 왜, 기분 나빴어?"
"아니, 그런 건 아인데...."
"화장 지워질까 봐 살살 닦았으니까 화내지는 마."
갑자기 제 얼굴을 빤히 보더니 냅킨을 들어 누가 봐도 조심스레 입가를 닦아 주는 지훈이었다. 이 새끼 이제 나 괴롭히는 법을 바꿨나.
"여주야."
"지훈아."
"먼저 말해."
"난 별거 아니라서... 왜 불렀는데."
"그, 어."
"뭐."
"오늘 왜 원피스 입었어? 설마 나 때문이면,"
답지 않게 조심히 물어보는 지훈이었다. 이럴 거면 갑자기 왜 그랬냐고. 자신의 앞에서 쩔쩔 매는, 아니 누군가 앞에서 쩔쩔 매는 지훈을 본 적이 있었던가. 괜히 본인이 미안해지는 여주였다.
"무슨 니 때문이야. 그냥, 며칠 전에 입은 게 마음에 들어서 새로 하나 샀거든. 학교 밖이니까 기분 좀 낼라고 새 옷 입었다. 니랑 전혀, 전혀 상관없으니까 눈치 좀 그만 봐라."
"아, 난 또."
은근히 아쉬운지 여주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달싹이는 지훈이다. 난 또 나 만난다고 입은 줄 알았지.
혹시나가 역시나인 줄 알면서도 기대하게 되는 게 짝사랑이란 것이다.
박지훈이 사랑할 때
002.
"야."
"아."
"밥은 잘 먹고 다니네."
"또 시비 걸려고?"
"밥 다 먹으면 얘기 좀 하자."
"내 바로 수업 있다."
"미안해. 그러니까 카톡 씹지 마."
학교 식당에서 마주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런 일이 있던 금요일부터 주말 내내, 월요일까지 지훈의 연락을 씹었다. 저가 자릴 박차고 나온 후 금세 전화도 몇 통 왔고, 사과의 카톡도 왔지만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많이 서운했고, 실망스러웠다. 내가 속이 좁나? 나도 박지훈한테 시비 많이 거는데.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니지. 지훈에게 그렇게나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다. 여주라고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다.
수업 끝난 후 여주는 과방에 앉아 지훈에게 카톡을 보냈다. 관계 회복은 생각보다 쉬웠다. 평생 모르는 척할 생각도 없었고, 말은 안 했으나 서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카톡 몇 번 주고받은 걸로 해결이 된 것 같았다. 물론 잠깐 보겠냐는 지훈의 물음에는 상상만 해도 어색할 것 같아 거절했지만.
"누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얘들아. 공강이어서 왔나."
"전 짐 가지러요. 바로 수업이에요. 쟤 공강 동안 조금만 놀아 주세요, 누나!"
"그래. 졸지 말고 수업 열심히 들어라."
과방에 들어서며 여주를 발견한 우진과 그의 동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한 놈은 수업이 있다며 급하게 과방을 빠져 나갔고, 곧 강의가 시작할 시간이라 그런지 과방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떴기 때문에 과방에는 우진과 여주 둘만 남아 있었다.
"혹시 오늘 무슨 중요한 약속 있어요?"
"내? 아, 니도 내 옷 때문에 물어보나."
"네, 평소랑 달라서."
"엄청 많이들 물어보네. 별일은 없고, 그냥... 이래 입으니까 누나 괜찮나? 쪼매라도 이쁘나? 달라 보여?"
"많이 예쁜데요. 누나 평소에도 예뻤어요. 그건 그거대로, 이건 이거대로. 똑같이 다 예뻐요."
"어?"
"..."
단호하게 대답한 우진은 이내 귀끝이 본인의 머리 색처럼 붉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되는데, 그게 될 리가. 괜히 더워져 손부채질을 하는 우진이었다. 우진의 말을 들은 여주는 몇 초 간 멍하게 있다 갑자기 빵 터지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우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우진아. 누나 진짜 감동이고... 진짜 니밖에 없다..."
"누나."
"어."
"누나 혹시 이번 주 금요일에 뭐 하세요?"
"이번 주? 약속 있는데. 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거든요. 근데 누나랑 보고 싶어서, 아니. 그러니까,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누나가 같이 봐 주시면 좋을 거 같아가지고..."
"좀만 일찍 말하지. 약속 방금 생겼는데."
"그르게요."
말은 덤덤하게 했으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우진이었다. 방금 박지훈이 그날 용돈 받는다고 밥 먹자고 했는데.
"다음 주는? 다음 주 금요일에 보면 안 되나."
"네?"
"다음 주 금요일엔 아무 약속 없는데. 그때면 영화 끝나나?"
"아니요! 아니요. 다음 주도 좋아요. 저 진짜 한가해요, 누나. 공강 아닌 날도 맨날 되그든요. 그니까, 진짜 좋다고요."
"그럼 다음 주에 같이 보러 가자. 니가 보여 주나?"
"제가 보자고 했잖아요. 당연하죠. 팝콘도 살게요."
우진이 자신에게 뭘 부탁하거나 제안한 적이 잘 없었기 때문에 괜히 미안했던 여주는 다음 주도 괜찮냐며 우진에게 물었다. 영화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금방 표정이 밝게 바뀌는 우진이 귀여워 흐뭇한 미소를 짓는 여주였다.
"우진아, 닌 동아리 같은 거 안 들어가나."
"안 그래도 하나 들어갔는데..."
"그래? 무슨 동아린데."
"말하기 쫌 쑥스러운데, 댄스 동아리요."
"헐, 대박. 우진이 니 춤 잘 추나. 와, 상상도 못했다."
"아뇨, 그래 잘 추는 건 아니고 쫌 좋아해가지고요."
"야, 우리 학교 댄동 유명해가지고 면접 빡세다이가. 다들 춤도 잘 추고, 얼굴도 반반하고. 드갔으면 면접 붙은 거잖아."
"네, 뭐... 어쩌다 보니 붙었더라고요."
"진짜 몰랐다, 우진아. 그카고 보니까 니 진짜 춤꾼처럼 생겼네. 쩐다. 아, 내 친구도 댄동인데. 우리 우진이 잘 부탁한다 캐야겠다."
"친구요? 누군데요?"
"니 얼마 전에 봤잖아. 화이트데이 때 같이 있던 애."
"...아, 엄청 잘생기셨던데. 친해요?"
"고딩 때부터 친구. 잘생겼긴 한데, 그럼 뭐하노. 그 새끼 싸가지가 존나 없다."
박지훈이 사랑할 때
003.
"그래서 오늘 도서관에서 밤새운다고?"
"밤샐지는 모르겠고, 아마 늦게 들어갈 거 같긴 한데."
"집 가서 하면 안 되냐?"
"자취방 가면 또 누워서 빈둥대다가 새벽에 시작할 게 뻔하다. 차라리 도서관에서 빨리 하고 가는 게 낫지. 오늘 집에도 안 들릴라고 노트북까지 무거운데 들고 왔잖아."
"오늘 동아리 신환회 있어. 데려다주지도 못 하는데."
"닌 기숙사 살면서 무슨 자취방까지 데려다줄라고, 새삼스럽게. 안 죽는다. 신환회나 즐겁게 해라."
"워너원에서 한대. 어차피 너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자. 잠깐 자리 비우면 돼. 이따 꼭 연락해라, 꼭."
웬 유난. 평소엔 놀다 늦게 들어가도 혼자 잘만 퍼질러 자던 놈이. 진짜 오글거려서 미치겠네, 박지훈.
수업을 늦게 마치고 지훈과 함께 저녁을 먹고 도서관으로 오던 길에 나눈 대화를 떠올린 여주였다. 저녁에 신환회 겸 회식도 있다던 지훈은 대충 혼밥을 하려던 여주와 함께 저녁까지 먹었으며 도서관 앞까지 따라왔었다. 화해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다정한 척 얼마나 가나 보자.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과제를 하다 멈춘 여주는 최근 박지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아, 몇 시지. 도서관에 들어와서도 잡생각과 덕질로 꽤 시간을 보낸 여주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꽤 집중을 해 과제를 끝냈다. 나름 빨리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열두 시가 넘었네. 박지훈한테 연락해야 하나. 휴대폰을 드는 여주였다.
배터리가... 아까 멀쩡한 노트북 놔두고 폰으로 트위터를 봤더니. 지훈에게 우선 카톡을 보냈다. '지훈아 내', 썅. 달랑 이름밖에 못 불렀는데 휴대폰이 꺼졌다. 타이밍도. 이럴 줄 알고 보조배터리를 챙겨 왔지. 가방을 뒤적거리는 여주였다.
여주는 한숨을 쉬며 도서관 밖을 나섰다. 생각보다 좀 무섭네. 시험기간이 아니라 그런가 캠퍼스 안인데도 어둡고. 그래도 밖으로 나가면 괜찮으려나. 후문이 자취방이랑 가까워도 정문 쪽이 사람도 많고 시끄러울 테니까.
여주는 분명 보조배터리를 챙겼다. 다만 케이블을 챙기지 않아 보조배터리와 휴대폰을 연결해 줄 것이 없었을 뿐. 잠도 오고 피곤한 터라 짜증이 확 밀려온 여주는 그냥 집이나 빨리 가야겠다 싶어 짐을 챙겨 나온 것이다.
학교 밖을 나섰더니 오히려 덜 무서웠다. 아직 삼 월이라 그런가 다들 늦게까지 술 마신다고 난리네. 여주는 이럴 때마다 억울했다. 나도 알쓰만 아니었음 이거보단 대학 생활이 더 재밌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훈이 있다던 워너원 가게 앞에 다다랐다.
들어가서 먼저 간다고 말할까. 왠지 그럼 또 억지 부리면서 따라 나올 거 같기도 하고. 괜히 들어가 봤자 지훈 외에는 지훈의 과 동기인 재환, 우진이만 겨우 아는 사람일 텐데. 또 박지훈이 아는 여자라고 사람들이 귀찮게 할 수도 있고... 워너원 앞에서 꽤나 고민하던 여주는 빨리 들어가서 지훈에게 먼저 왔다고 연락을 남기는 게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야."
"깜짝이야."
발을 떼려는데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 왔다. 박지훈? 문에서 아무도 안 나왔는데. 골목에서 바람이라도 쐬고 있었나. 근데 숨을 왜 이렇게 헐떡여.
"같이 가자고 했잖아."
"왜 거기서 와?"
"폰은 왜 꺼놨는데. 존나, 하."
"너 뛰어 왔어?"
"..."
"?"
"어."
"술 많이 마셨나."
"아니. 많이 먹이기만 했는데."
"치사한 새끼. 후배들 그런 선배 졸라 싫어하는 거 알제. 니 설마 우리 우진이도 많이 먹인 거 아니제?"
"알 바냐. 그건 걔한테 물어봐."
"잘 챙겨 주라니까. 근데 닌 왜 오늘은 좀만 마셨는데, 술도 좋아하는 게."
"같이 가자고 약속했으니까. 다 왔네, 들어가."
"어... 미안. 니는 다시 가게?"
"이제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래. 가서 도와주고 김재환 집에서 자게."
"그렇구나."
"안 들어가냐?"
"드간다, 드가. 그, 오늘 고마웠다."
"알아. 너도 늦게까지 수고했다. 잘 자."
많이 안 마셨다면서 취한 거 아냐? 미친놈, 진짜. 지가 뭐 내 남친도 아니고 세상 진지한 척 무게 잡고 지랄... 쓸데없이 심장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계단으로 3 층까지 올라온 여주는 혹시나 싶어 복도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봤다. 이제 가네. 여태 뭐 했길래.
박지훈이 사랑할 때
003 - 1.
어차피 신환회 가면 술만 마시지 제대로 된 밥은 못 먹는다, 지금 가 봤자 시간이 너무 일찍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여주와 저녁까지 먹고 도서관까지 데려다주었다. 사실은 그냥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었던 건데. 핑계를 대던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훈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너 더 보고 싶어서, 이딴 말을 할 순 없잖아.
신환회가 시작되고 가게가 시끌시끌했다. 옆옆 테이블에는 박우진의 얼굴도 보였다. '아, 그리고 우진이도 너네 동아리래. 면접 붙었다고 하더라고. 낯가림 심한데 진짜 착하고 귀엽고 그렇거든. 잘 챙겨 줘. 꼭이다, 꼭.' 동아리 신환회가 있다는 말에 다 큰 새끼를, 것도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몇 번이나 당부하던 여주였다.
신입생들이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다녔다. 분위가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쯤 지훈의 테이블로 우진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17 학번 xxx과 박우진입니다."
"나는 16 학번 박지훈. 우리 구면이네."
"네, 여주 누나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지가 먼저 김여주 얘기를 꺼내네. 순간 괜히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지훈과, 꽤나 긴장했는지 시키지도 않은 다나까 말투를 쓰는 우진이었다. 귀엽긴 하네. 김여주 예의 바른 사람 좋아하니까.
"김여주가 네 칭찬 많이 하더라."
"아, 그랬습니까."
낯 진짜 많이 가리나 보네. 금방 표정을 푼 지훈이 소주 병을 우진의 쪽으로 기울이며 말을 건넸다.
"너 나랑 친하게 지내자."
지훈은 우진의 잔을 그득 채웠다.
지훈은 술을 자제하며 계속 휴대폰의 홈 버튼을 눌러댔다. 아직 과제 중인가. 먼저 카톡을 보내면 여주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지훈은 카톡만 몇 번을 들락날락했는지 모른다. 벌서 열두 시 넘었는데, 슬슬 끝날 때가 됐을 텐데. 그때 여주에게서 카톡이 하나 왔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썅, 진짜."
'지훈아 내', 카톡 단 한 개의 메시지 이후로 여주는 말이 없었다. 지훈은 가게 밖으로 나와 여주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지훈의 머릿속엔 오만가지 시나리오가 지나갔다. 학교 후문을 향해 냅다 달리고 있는 지훈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라 미친 듯이 뛰어 도서관에 도착한 지훈은 여주가 있다던 층으로 가 모든 자리를 뒤졌지만 여주는 보이지 않았다. 아, 자리도 물어볼걸. 지훈은 마음이 급해져 다시 학교 밖으로 나왔다. 자취방에도 없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마음이 초조한 지훈은 여주의 자취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던 지훈은 자신이 있던 가게 앞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곤 발을 멈췄다.
"김여주..."
가게 앞에서 서성이는 여주를 보던 지훈은 허탈함 20, 안도감 80의 상태로 한숨을 내쉬었다.
"야."
"깜짝이야."
여주에게 가까이 가 손목을 잡았다. 화들짝 놀라며 저를 쳐다보는 여주였다. 미안, 근데 너도 나 놀라게 했잖냐.
"안 들어가냐?"
"드간다, 드가. 그, 오늘 고마웠다."
"알아. 너도 늦게까지 수고했다. 잘 자."
걱정시킨 게 미안했는지 여주는 집앞에 와서도 들어가지 않고 우물쭈물 댔다. 아, 귀엽고 지랄. 고마웠다고 말하며 도망치듯 빌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는 지훈이었다. 1 층, 2 층, 3 층. 여주가 계단을 오르는지 차례대로 불이 켜졌다 꺼졌고 3 층에서 불은 멈췄다. 잘 올라갔네.
'카톡'
김여주(
사진)
니 뒷모습 귀엽네 ㅎㅎㅎ
데려다줘서 감사 ♡
조심히 가 12:48 am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박지훈이 사랑할 때
004.
우진과의 약속이 있는 날. 우진과 학교에서, 과 행사에서, 알바하는 가게에서는 몇 번이나 봤지만 따로 약속을 잡은 건 처음이었다.
여주는 이 옷 저 옷을 꺼내가며 고민 중이었다. 우진이랑 무슨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박지훈 외에 남자랑 약속 있는 게 얼마 만이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원피스는 너무 과하고, 후드는 너무 성의 없어 보일 거 같고. 고민하던 여주는 우진이 평소 자주 입는 스타일과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집었다. 같이 다니는데 너무 튀는 거보단 비슷한 게 나을 거 같았다.
약속 한 시간 전, 개운하게 씻고 나온 여주는 휴대폰으로 노래를 틀고 머리를 털어냈다. 오늘 왠지 기분도 좋고, 날씨도 좋다 하고. 이제 화장만 잘 먹으면 최고일 텐데.
그때 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누나, 혹시 준비 중이세요?"
"지금 화장할라고 앉았는데."
다급한 우진의 목소리. 나 오늘 약속 까이나 보다.
"아, 누나. 정말, 정말 정말 죄송한데 오늘 못 만날 거 같아요."
"왜?"
"갑자기 동아리에서 연락이 와가지고요. 저보고 꼭 와야 한다고..."
"아, 그래? 어쩔 수 없지. 오늘만 날인가. 급한 거면 가 봐. 괜찮아."
"진짜 죄송해요, 누나. 아, 진짜... 제가 다음에 영화에 팝콘에 밥, 커피까지 풀코스로 다 살게요. 저 진짜 많이 기다렸는데."
"괜찮다니까. 다음에 맛있는 꼭 사 줘라. 잘 다녀오고."
"...네, 누나. 푹 쉬세요. 내일 봬요."
목소리만 듣고도 우진의 시무룩한 얼굴이 보인다. 처음엔 그냥 무뚝뚝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귀여운 우진이었다. 거울에 비친 여주의 입이 불퉁하게 툭 튀어나왔다. 우진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여주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야, 너네 동아리 무슨 일 있나."
"벌써 들었냐? 어, 있어."
"무슨 일인데. 심각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갑자기 애를 불러."
"진짜 심각한 일이지."
"왜. 우진이 뭐 잘못했어? 혼나나?"
"내가 불렀는데. 너한텐 미안, 내가 오늘 하루 우진이 좀 빌릴게."
"뭐?"
"우진이 보고 싶어서 꼭 오라고 했는데. 네가 잘해 주라며, 친해져야지."
"미친 새끼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애 첫 짝사랑 중인 지훈이다.
-
이번 화에서는 클리셰지만 단순한 친구 사이에서 흔하게 있지 않는 일들로 조금 설레는 포인트들을 만들고 싶었는데 잘 된 건지 모르겠네요.
시간 순서가 조금 헷갈릴 수 있으실 것 같아서 정리해드리면...
싸운 날 (금) -> 연락 안 됨 (주말) -> 화해 (월) -> 지훈 용돈날 (금) -> 지훈 신환회 (목) -> 우진과의 약속 (금)
이렇게 됩니다.
나름 원하는 대로 흐름을 맞춰가고 있는데 역시나 쉽지 않네요. 흑흑...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도 감사드려요, 독자님들 ♡
다들 날이 너무 더운데 더위 조심하시고 맛있는 거 드시면서 건강 꼭 꼭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