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 찾기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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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어제 종현 오빠가 말야.."
친구의 수다는 오늘도 종현오빠로 시작했다. 대체 그녀가 말하는 종현오빠가 누구냐 하면 대단하신 그녀의 남자친구다.
솔직히 그의 존재 여부에도 관심이 없을 뿐더러 친구와 그의 스킨십 진도 같은것도 전-혀 흥미가 없었다. 내가 낯선 남자의
설레는 이야기와 간지러운 행동 따위에 대해 들을 의무가 있나? 다시 한번 자문해봐도 역시 없었다. 하지만 친구는 요즘 그 '종현오빠' 에게 단단히 빠져버렸다.
풀네임이 종현 오빠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얼마전에 그를 '김종현' 이라고 하더라. 나는 또 그놈의 김종현이구나 하고
한 귀는 듣고 한 귀는 흘렸다. 내가 얼마나 친구의 연애담을 지겨워 하냐면 모르는 사람보고 '그 놈의..' 라는 칭호를 붙일만큼 이었다.
"종현 오빠가 있잖아..."
"어어..."
뒤적뒤적 스트로우로 레몬에이드 속 얼음을 찾았다. 대충 패션 잡지를 넘기며 호응해주자 친구는 신나서 입을 움직였다.
내가 지금 얘랑 놀아줄 때냐... 한창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니는 신세에 남의 연애담이나 듣고있다니. 어디 김종현씨가
직접 듣고 있다면 여자친구 관리 좀 했음 좋겠다. 이렇게 자기에 대한 썰이 막 돌아다니니 원, 이래도 괜찮은가?
드디어 레몬에이드 속 작은 얼음을 찾아서 빨대로 호로록-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나 종현 오빠랑 드디어 잤다...!"
"푸흡...!"
얼음이 입술에 한 번 닿은 뒤 다시 떨어졌다. 레몬에이드를 친구에게 분사시키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 더러워."
쟨 뭔데 저렇게 태평할까? 갑자기 저런...어? 야한 말을 하는데 내가 안놀라고 배기냐고.
"생긴 건 강아지 같은데 진짜 대박이더라구..내가.."
어이 없는 웃음을 흘리는 내게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야, 아 진짜... 혹시나 카페 직원이 들을까봐 안절부절하는 내가 재밌는듯 친구는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에 분위기가 어떻게 잡혔냐면, 종현오빠가 씩- 웃으면서 나한테 오는거야."
"...."
"그리고는 자기 무릎 위에 날 앉히는데, 평소에는 아담해보이던 사람이 순식간에 멋있어지더라구."
"...."
"그 다음에 내가 빤히 쳐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묘한 상황이 되면서 오빠가 키..."
"야! STOP! 그만해!"
어우, 얘가 왜이래 진짜! 급하게 테이블 위로 친구의 입을 막았다. 아무리 요즘 시대가 개방적이라지만 대놓고 키스가
뭐야, 어? 이를 악물고 복화술로 중얼거리자 되려 카페 안 사람들이 나를 째려본다. 이번에도 쪽팔린건 내 몫이지. 하....
대충 친구의 팔뚝을 안 아프게 때리자 또 입이 잔뜩 나오기 시작했다.
"야, 너 요즘 내 이야기 잘 안들어준다?"
"뭐? 진심이야?"
"그렇잖아- 너 요즘 종현오빠 얘기만 하면 표정 썩거든 진짜? 내가 모른척 해주는거지."
"...와, 너 양심이 있냐, 없냐?"
내 생각엔 없는거같애. 그치? 어. 어디다 팔고 온거 같애, 솔직히 너무 하잖아 이건....대체 종현오빠라는 자식은 어디서
뭐하길래 날 고생시키나 싶어 원망의 경지에 다다랐다. 참다참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건 못참겠어서 친구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야! 진짜 이씨...너 진짜 내 친구면 나한테 뭐라고 하면 안된다. 나만큼 네 지겨운 종현오빠 타령 들어주는 사람이 또 어딨는데!"
"뭐? 타령?"
"그래! 타령! 네 종현오빠 얘기만 모아도 책 한 권 나오겠어. 솔직히 내가 김종현인지 박종현인지 그 사람 얘기 나올때마다
얼마나 환멸나는지 알어?"
"허...너 말 다했어?...환멸?"
"너도 생각이 있으면 좀 돌아봐. 내가 너의 남자친구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지겨워하는게 아니라 네가 허구헌날 남자친구
얘기만 하는거겠지! 말을 하려면 똑바로해, 이.. 이자식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날린 뒤 쿨하게 나오려고 했다. 솔직히 반쯤 남아있는 레몬에이드가 아깝긴 했는데,
그런것보다 짜증나는 친구한테 빅엿을 주는게 중요했다. 내가 시킨 음료수 값까지 내라는 의미로 발을 쿵쾅대며 카페를 나왔다.
테이블 하나하나를 지나쳐 오는데 하나같이 나를 미친년보듯이 하더라. 씩씩대며 카페 문을 여는데 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진짜 개그네 개그.."
어떤자식이야?....... 패기롭게 쏘아붙일래도 내 뻔뻔함은 딱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쪽팔렸다가는 얼굴이 벌겋게 익을 것 같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아, 물론. 그 친구는 내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야! 꺼져! 괜히 너 남자친구 없다고 열등감 갖지나 말고!"
거지같은 자식. 저게 할 말이냐. 바보 천치. 그래도 정들어서 쌍욕은 못했고 친구와의 다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난 뒤끝이나 뒷담화는 딱 질색이라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날 부터 내 스트레스가 하나 줄어든 게 큰 기쁨이었다. 김종현에게서 드디어 탈출한 것이다!
김 종 현 찾 기
그 날 뒤로 내게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친구와의 절교였다. 나도 이렇게까지 단박에 인간관계가 끊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물론 원체 사람 사이에 미련이 없는 편이라서 후회라거나 허전함 같은것도 전혀 없었다. 이래서 친구는 가장 깨지기
쉬운관계라고 하나보다. 내가 베프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지금은 얼굴만 보면 껄끄러운 사이가 되다니.
그리고 그 친구때문에 내게 생긴 가장 불행한 일을 꼽아보라면 당장 하나를 말 할 수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얘들아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우리 과의 유일한 아싸가 됐다는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또 과에서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과탑
여신, 소개팅 섭외 1순위...뭐 이런 식으로 인기가 있다는게 아니고 그냥 어디가서 빠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연
애에 관심이 없는 덕도 있었고 소문난 주당 기질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매년 듣던 소리중 하나는
'술자리에서 여주가 빠지면 허전하지!' 였다. 복학생 오빠가 얼마나 그 소리를 해댔으면 복학생들의 노예라는 별명까지 생겼었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하루아침에 밥친구며 얘기할 친구까지 없어진것이다. 강의가 끝나고 난뒤 뻘쭘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오늘도 역시 그렇게 나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내 코앞에서 밥메뉴를 정하는 얄미운 무리가 있었다.
나를 비꼬듯이 얘들아 밥 먹으러 가자~ 하는데.
어후...참. 유치해서 진짜. 푹푹 한 숨을 쉬고 책을 챙기는데
실수로 책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오빤 그거 하나 제대로 못챙겨! 하하."
이런 걸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나. 아님 엎친 데 덮친격? 설상가상으로 책까지 뒤엎고 그 무리의 시선을 잔뜩 받으니 자존
심이 우르르 무너졌다. 급하게 쭈그려 앉자 그 타이밍을 노린건지 내 친구(였던)자식이 그거 하나 못챙기냐며 남자선배에
게 장난을 걸었다. 분명 노렸다 저거. 겨우겨우 책을 쓸어담았을 땐 멀어진 그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여왕벌 납셨네 진짜..."
아련하게 쳐다볼 생각도 없었고 그냥 지들끼리 잘먹고 잘살아라 (엿엿) 이라는 마음으로 마이웨이를 걸어갔다.
강의실이 비어있는 줄 알았더니 책상 한 구석에서 좀비같이 일어나는 한 남자분이 계셨다. 그런데 농담 하나 안치고 진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나 왜 처음보지? 남자가 기지개를 펴는 것을 끝까지 보고서야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왕벌 납셨네...
귀를 쫑긋하자 남자는 갑자기 욕을 했다.
"완전 여우년 아냐 저거저거..."
뭐야, 저사람. 왜 내가 하고 싶은 소리를 대신하는건데. 게다가 저렇게 찰지게. 하마터면 그를 붙잡고 그쵸! 완전 여우같
죠 쟤! 하며 공감을 구할 뻔 했다. 그래도 뒷담화는 안된다! 그 신조를 가지고 강의실을 나섰다.
그래도 진짜 궁금하네 저 사람..... 얼굴도 못 봤는데. 대체 정신이 혼자 깨어있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졌다.
김 종 현 찾 기
"김종현 그 자식 오늘 또 술 마시러 갔어. 불쌍한 새끼..."
그냥 단지 잠을 자기 위해 존재하는 자취방으로 가던 중이었다. 밀린 월세에 이것저것 생활비를 충당하느냐고 하루에 알
바는 세탕 네탕을 뛰어도 모자랐다. 그래도 과 수석 이라서 다행이지. 장학금이라도 없었으면 나는 당장 파산이었다, 파산.
내가 길거리에 나앉아서 노숙자 신세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니 꽤 오싹해서 알바를 하나 더 구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공부도 할 수 있게 널널하고 적당히 저녁 타임인 알바로. 그러려면 인기 없는 카페가 좋은가? 아님 편의점?
이것저것 플랜을 세우다보니 집 앞 편의점에 다다랐다. 테이블에 앉아서 누가 궁상 맞게 혼자 맥주를 까고 있었다.
전화 상대는 누군지 모르지만 곧이어 그 사람이 말하는 그 이름.....이름이 굉장히 신경쓰였다.
"종현이 그 자식 진짜 호구라니까. 강아지 처럼 생겨가지고 내 앞에서 술마시다가 우는데...와... 내가 마음이 아팠다 진짜로."
"뭐? 종현이 걔가 여친을 차? 그건 있을수가 없는 일이지~ 솔직히 지금 헤어진건 아니고...그냥, 여친이랑 잘 안되가나봐.
걔 여친이 좀 예뻐야지~ 어쩐지 고생 좀 할 것 같더라."
뭔 종현? 지금 김종현이라는거 맞지? 이 쯤되면 내가 전생에 김종현에게 무슨 큰 죄라도 지었나 싶어서 심각하게 사주 보
는것을 고민했다. 내 앞날에 무슨 불운이 끼어있는지 좀 보게. 아니면 김종현이라는 이름과의 궁합이 꽝인가? 겨우 친구의
남친인 그놈의 김종현에게서 벗어났더니 이제 또 다른 김종현이 나타났다. 가만히 서서 통화 내용을 듣다보니 이 쪽 김종현
은 연애사업도 잘 안되고 짠내가 장난 아닌것 같더라. 어쩐지 측은해져서 세상엔 참 여러가지 김종현이 있구나- 했다.
유난히 높은 오르막길 위에 자리한 내 자취방으로 가기 위해 다리를 풀자 맥주를 마시던 남자는 책상 위에 쓰러졌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린데... 술이 떡이 돼서 엎드린 남자의 정수리가 참 동그래서 눈에 걸렸지만 겨우 정수리때문
에 모르는 사람을 챙겨 줄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저 남자를 챙겨주는 순간 또다른 김종현하고 엮일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 모른 척 하자, 모른 척."
이번에도 내 절약쟁이 본능 덕분에 아직 남아있는 맥주 몇 캔이 신경 쓰였지만. 뭐, 아무렴 어때. 나는 일단 집으로 가야했다.
김 종 현 찾 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냥 자취방으로 가던 중이었다.
오늘 하루도 알바를 몇개씩이나 뛰고 고된 하루를 보낸 내가 어깨에 힘 쓸 근육이 남아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여기 오르막길이 좀 높나? 종아리 근육도 무리할텐데... 나는 밀려오는 피곤함에 편의점에서 떡이 된 이웃을 무시하는,
뭐 그저그런 배려심의 소유자 라는 것이다. 분명...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 진짜 왜이렇게 무거워!"
난 왜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걸까. 도저히 내일 아침까지 그 동그란 정수리를 내놓고 찬 바람을 맞고 잘 남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귀엽고 동그란 정수리의 성애자가 아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100명중 10명은 나와
똑같이 느낄것이라고 믿는다. 사람은 원래 동정심을 유발하는 생명체를 보면 마음이 끌리게 되어있다, 이거야..
예를 들면 딱 이 남자 정수리처럼. 정수리에 입과 눈이 달린것도 아닌데 꼭 " 안 데려가면 울어버릴거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 거북이 등딱지 같은 백팩 위로 남자를 또 업어서 골목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남아있던 맥주는 5캔이나 되어서 봉지에 알뜰살뜰하게 챙겼다. 솔직히 내가 건장한 성인 남자를 옮기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알아서 주는 보답이라 생각하고 맥주가 든 봉투도 손에 들었다.
"어디, 이 남자 인맥이 없을까. 아까 누구랑 통화하던데... 전화번호부가.."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전에 잠시 멈춰섰다. 바보같이 무작정 어갈 뻔 했네. 남자의 핸드폰을 뒤적거려서 친한 친구나 가족을 찾았다.
다행히 비밀번호도 안 걸려있고 참 사생활이 프리한 사람이었다. 무슨 여자 이름도 많고... 번호가 엄청 많네.
굉장히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누굴 불러야 할지 또 고민이 됐다. 잠시 끙끙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 그러더니 무작정 신호가 가버려서 이름도 확인 못하고 전화기를 귀에 댔다.
얼마 안 있어서 전화기 너머의 단축번호 1번씨는 달칵, 전화를 받았고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저기...안녕하세요?처음뵙겠습니다.."
"...."
"사실 많이 놀라셨겠지만.. 제가 등에 취객 한 분을 업고있는 상태거든요.."
"...."
"지금 이 상황이 뭘까,,, 싶으시겠지만 이 취객분의 단축번호 1번을 확인하니 그쪽에게 신호가 가더라구요. "
"..."
"그래서 이 취객분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가 급한대로 그쪽한테... 부탁을 드려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어디 사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여보세요...?답이 없는 단축번호 1번씨에게 재차 중요한 사실을 강조했다. "지금 제가 건장한 성인 남성을 업고 있다구요.
전 정말 평범한 20대 여성인데 말이죠."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싶어서 무슨 대답이 나올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더니 1번씨는 얌전하게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끊어..? 그냥 이대로 끊었다고?
"아...놔...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 진짜..."
완전히 잘못걸린거네 이거. 나는 역시 내가 미쳤지 하며 감쪽같이 동그란 정수리에 속아넘어 갔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모든 동그랗고 귀여운 생명체는 매정하게 지나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김종현과 친한 사람 또한 모두 피해야 겠다는 생각도 함께.
숙연하게 뚜-뚜- 소리를 내는 휴대폰을 들고 맥주를 들고 남자를 업고 백팩까지 매고 그렇게... 힘의 한계를 느끼던 중이었다.
그 때 골목길 오른쪽 코너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아- 내가 못 살아 진짜-"
촉이 왔다. 방금 단축번호 1번씨가 저 남자가 맞다는 촉. 급하게 뛰어오는 모양새며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온 허술한 모습,
그리고 선량한 인상까지. 저 사람도 딱 보니 호구였다. 내가 남자친구 얘기나 해대는 친구한테 속은 것처럼 허구헌날 술이
떡이 되서 돌아다니는 친구를 자주 데리러 오는듯한 노련함이 느껴졌다. 못산다며 머리를 헝클이는 남자를 보고 나는 대뜸
손을 흔들었다. 맞으면 좋은거고, 아니면 쪽팔리고 마는거지.크게 몇 번 팔을 휘적이자 남자는 내 앞에 다다랐다.
정말 급하게 왔는지 티셔츠가 비뚤어져있었다. 몇 번 숨을 크게 몰아 쉰 남자는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
"제가 전화 받자마자 답을 드리려고 했는데 여자친구가 집에 지금 같이 있어서요."
"...."
"처음 보는 분한테 이런 말씀 드리기도 좀 그렇지만, 어.. 제 여자친구가 좀 오해를 잘 해요.
제가 통화할 때 여자 목소리만 나면 의심부터하고,,"
"...."
"그래서 제가 대답도 못하고 황급히 끊어버렸어요. 최근에 자주 싸웠거든요.
이런 말 안 궁금하시겠지만... 다시 한 번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처음 뵙는 분이지만 제가 예의도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는건 싫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단축번호 1번씨는 내가 다 민망할정도로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어디 가서 사과 좀 많이 해 본 솜씨다 싶은 사람은 다 호구던데. 이 사람 진짜 호구인게 분명하다.
뭔가 인생의 동질감이 느껴져서 위로라도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일단은 등뼈에 무리가 가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업혀있는 취객부터 1번씨에게 넘겼다.
맥주에 대한 언급은 굳이 하지 않고 검은 봉지를 꽉 쥐었다.
"그럼, 이만."
다시 짝짝이 신발을 질질 끌며 취객을 업고 가는 남자에게 정말 제대로 된 오지랖이 발동했다.
"저기, 저도 초면에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
"그런 여자가 당신한테 좋은 여자친구같지는 않네요."
"....."
"뭐, 그냥 그 쪽이 좀 힘들어 보여서요. 제가 연애 박사도 아니고. 제 충고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어요. 그럼 저도 이만."
미쳤지 미쳤어! 나는 혹시라도 남자가 다시 쫓아올까봐 급하
게 골목길을 내려갔다. 나, 진짜 오늘따라 왜이러냐. 집에가서
맥주캔을 시원하게 까고 오늘 일은 다 잊기로했다. 오늘 일은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