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일어나"
엄청 큰 대왕 연어초밥을 먹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날 흔들어 깨우는 무지막지한 손길에 결국 초밥이 입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에서 깨버렸다.
"...아씨, 일어났ㅈ짢아!!!"
"..."
"뭐야.. 니, 니가 왜 여깄어."
"입에 침부터 닦으세요."
눈을 뜨자마자 앞에 보이는 황민현에 1차 충격, 그 뒤에 이 새끼가 내뱉는 발언에 2차 충격을 받은 나는 멍하게 황민현이 건네준 휴지만 받아들고 있다가 급하게 입가를 닦았다.
최악이다, 김수민 진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그 날의 데자뷰처럼 또 동아리방 쇼파에서 잤나보다.
왜 하필이면 맨날 처 자고 있을 때 황민현이 들어오는거야, 진짜.
그 편의점 사건 이후로 뭔가 묘하게 쌀쌀맞아진 것 같은 황민현의 태도에 괜히 맘 졸이고 있었는데,
여느때와 다름 없이 날 대하는 황민현의 모습에 괜히 내가 예민했나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너 10분뒤에 수업 시작인 건 알지?"
"뭐? ㅇ 헐! 맞네! 헐!"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던 황민현이 내뱉은 말에 나는 곧바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고, 오후수업이 시작하기 약 10분전이었다.
알고 깨워준건가.. 싶은 마음에 좀 고마워져서 황민현 쪽을 쳐다보는데, 그런 나를 거울을 통해 쳐다보는 황민현.
"고맙다는 말은 됐으니까 빨리 수업이나 가세요."
"...웅"
고맙다는 말은 됐다길래 고맙다는 말은 생략하고 최대한 고마운 표정을 지어보인 나는 그대로 동아리방을 빠져나와 강의실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
그렇게 잤는데도 아직도 피곤했던건지, 교양수업을 들으면서도 꾸벅꾸벅 졸던 나는 갑자기 울리는 진동소리에 교수님의 눈치를 보며 카톡을 확인했다.
언니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오늘 집에서 저녁 먹을거니까 끝나면 집으로 와 [혈육]
집이란 말은, 언니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아닌 아빠, 엄마가 있는 원래 집을 말하는 거였다.
보통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은 명절이나 생일, 아니면 중요한 일을 알려야될 때.. 정도인데.
흠, 뭐지..
무슨 일일지 한참동안 머릿속을 굴리느라 또 결국 수업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
"야, 수민아. 오늘 오랜만에 동기모임인데 안오냐?"
"어, 미안 미안. 나 오늘 선약이 있어서.."
"야, 얼굴 까먹겠다. 자주 좀 보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 길에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인사를 했다.
이 정도면 이제 아웃사이더로 취급해줄 만도 한데, 그래도 아직 내 얼굴을 보면 아는 척을 해주는 동기들에게 고맙다고 해야할지.
멋쩍게 웃으며 동기들과 헤어진 나는 우리 과방을 지나쳐 복도를 걸었다.
달칵-
"..다음에 얘기하자."
복도를 걸어가던 중 갑자기 뒷쪽에서 들리는 문 열리는 소리와 말소리에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봤다.
"..."
"어, 종현오ㅃ..!"
문을 열고 나온 인물은 다름 아닌 종현 오빠였고, 그제서야 과방 문을 확인해보니 '일어일문학과'라고 적혀있었다.
학교에서 오빠를 만나는 건 처음이라 괜히 반가워 들뜬 채로 인사를 하려는데,
종현 오빠의 표정이 왠지 좋아보이지 않아 금세 손을 거두고 볼륨을 줄였다.
오빠는 날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 문 뒤로 가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심각하게 얘기중인 것 처럼 보였다.
뭔가 심각해보이는 분위기에 그냥 갈까.. 싶어서 그냥 몸을 돌리려는데, 그때 문 뒤로 가려진 사람이 보였다.
종현오빠와 얘기를 하고 있던 그 사람은 누가 봐도 엄청나게 예쁜 여자였다.
여자친구인가..?
뭔가 흥미가 생긴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둘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건지 예쁜 여자가 이야기를 하다 말고 먼저 내 쪽을 슬쩍 쳐다봤고, 종현 오빠도 그제서야 내 쪽을 보고 날 발견했다.
헉, 너무 대놓고 쳐다봤나 보다.
난 괜히 민망해져서 어색하게 하핫 웃으며 종현오빠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오빠는 그런 날 보고 굳어 있던 표정을 살짝 풀더니, (내가 보기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내게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오빠의 인사를 받고 곧장 몸을 돌려 어서 학교를 빠져나갔다.
내가 괜히 끼어들어서 진지한 분위기를 망친 것 같은 느낌에 또 고개가 절로 푹 숙여졌다.
그나저나 무슨 상황이였던걸까.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둘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
"저 왔어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는데도 집에는 이미 아빠, 엄마 그리고 언니까지 모두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왔니?' 오랜만에 보는 엄마와 그저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고는 우리 집인데도 결코 편하지 않은 걸음걸이로 쭈뼛쭈뼛 부엌으로 갔다.
"왔니? 앉아라. 배고플텐데 밥부터 먹자."
"..네에."
부엌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진짜 오늘 무슨 날이지?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기념일이라고 할만한 기념일은 다 생각해봤지만 오늘은 진짜 아무 날도 해당하지 않는데..
약간 의구심을 가진 채로 먼저 앉아 있는 언니의 옆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
언제나 그랬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고, 나는 뭔가 체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었다.
"나, 결혼하기로 했어."
"...켁-"
갑자기 들려오는 언니의 말에 사레가 걸려서 입을 손으로 막고 언니 쪽을 쳐다보니,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밥을 먹고 있다.
결혼?
뜬금없는 단어에 아빠, 엄마의 표정을 살펴보니, 무덤덤한게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이것 때문에 부른 거였구나.
...
순간, 나는 밥 먹은 게 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황민현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에.
"그 만나던 사람이랑 하는거야..?"
"응. 9월 즘으로 생각 중이야."
"...그렇구나, 축하해."
내 말에 언니는 살짝 웃었고, 나는 그런 언니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언니, 민현이도 알아?'
'민현이? ..아마 알 거야. 엄마가 민현이네 아주머니랑 매일 통화하시니까.'
'...'
몇 시간 전 언니와 했던 대화만 머릿속에 가득 차있었다.
황민현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처럼 이렇게 누워서 잠도 못 자고 있을까?
결국 난 그날 새벽을 꼴딱 새버렸다.
*
다음 날 본 황민현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동아리방에서 친구들과 그저 평소처럼 장난을 치면서 평소보다 더 크게 크하하 웃고 있을 뿐.
"수민. 동아리 엠티 갈거지?"
"뭐? 언젠데."
"아씨, 단톡 좀 봐라 진짜! 다음주 주말! 올거지? 어, 온다고? 알았어~"
"...내 의사 따윈 원래 없는 거였지?"
유진이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종이에다가 내 이름을 슥슥 적었다.
슬쩍 종이를 보니 윗쪽에 '황민현' 이라고 적혀있었다.
하긴, 인싸 황민현이 무슨 행사에 빠질 리가 없지. 하면서 종이에 적힌 애들의 이름이나 훑고 있는데
"김수민."
"...?"
"밥 먹으러 가자."
"나 오늘 기분 좋으니까 밥 사줄게."
거짓말쟁이.
*
늦게 와서 죄송해요 ㅠㅠ 현생이 덕질을 방해하는.. 쥭어라 현생..ㅠ
아마 다음편도 쪼꼼 늦게 올 수도 있을ㄹ 거같아요 ㅠ
이번편 종현이 분량이 별로 없네요..하하 뎨둉
대신 다음화에 종현이 분량이 폭발할 거니까 기대해쥬세용.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