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년시대
말문이 턱 막혔다. 여주는 제 손에 들린 아이스티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고, 쏟을 뻔 했네. 영민이 떨어지려던 컵을 받쳐 들었다. 여주는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태연하게 굴어야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영민의 앞에서는 늘 그랬으니까. 태연한 게 더욱 이상한 거였다.
"더워?"
"어, 어?"
"얼굴 엄청 빨개, 너."
영민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여주는 어색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분명 제 마음을 들켜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쩔쩔 맬 이유가 있을 리 없잖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눈을 어디둬야 할 지 몰라 헤매고 있는 여주를, 영민은 빤히 쳐다보았다. 미소를 걸친 채로.
"이름이 김여주야?"
"아, 으응..."
"이제야 이름을 알았네. 명찰이 가려져서 잘 못 봤거든."
약하게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명찰에 영민이 살풋 웃었다. 이름도 예쁘네. 그러고는 작게 속삭였다. 여주는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다. 영민이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티를 다시 여주에게로 내밀었다. 안 마실 거야?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오는 영민에 여주는 잽싸게 컵을 잡아들었다.
"아, 아니! 마실 거야!"
그러고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 순식간에 입안으로 퍼지는 달콤한 복숭아 향에 머리가 띵해졌다. 시원하고 달다. 아이스티가 이렇게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빵빵하게 부풀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여주의 두 볼을 보며, 영민은 작은 실소를 뱉었다.
"...왜?"
"너 진짜,"
"응?"
"아니야. 마저 마셔."
귀엽다,고 하려다 말았다. 여주의 저 두 볼이 또 새빨갛게 달아올라 펑, 하고 터져버릴까봐서. 자꾸만 비짓비짓 새어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영민은 주체할 수 없는 제 입 꼬리를 애써 끌어내리느라 고생을 했다.
"이제 다 끝났어?"
"아, 응... 어느 정도."
평소 지켜보기만 하다 말을 트려니, 이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일인데.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영민은 생각보다 말이 많았고, 다정했다. 여주가 아이스티를 다 마시고 나서도 영민은 가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여주를 쳐다보기도 하고, 간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꼭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남자친구처럼. 김여주 망상 또 도졌네. 세연이 저를 보면 분명 저렇게 말할 것이었다.
"줘. 내가 버릴게."
바닥에 굴러다니는 휴지 조각을 여주가 집어 들자마자 영민이 잽싸게 튀어와 그것을 낚아채갔다. 여주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영민이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에, 여주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에이씨! 내 팔은 왜 이렇게 짧은 거야!"
친구가 입혀준 탓에 어떻게 벗어야 하는 지도 몰랐다. 앞치마를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우스꽝스럽게 바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유연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애석하게 등 위쪽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열심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찰나, 누군가가 여주의 손을 잡아 내린 후 손쉽게 앞치마를 풀었다. 안 봐도 누군지 알 것만 같아서, 다시금 부끄러워졌다. 그럼 제가 바둥거리는 것도 다 봤을 텐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팔."
팔에 걸려 앞치마가 벗겨지지 않고 있었다. 여주는 재빨리 팔을 앞으로 뻗었다. 됐다. 웃음기 섞인 영민의 목소리가 아이스티의 복숭아 향만큼이나 달았다. 갈까? 앞치마를 곱게 개어놓은 영민이 물었다. 여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뒷정리는 웬만큼 해놓았으니, 이제 그만 가도 괜찮겠지. 눈치를 보는 여주에게 아이들은 괜찮다고 가보라며 손을 휘휘 내저였다. 입모양으로 고맙다는 말을 뱉은 여주는 영민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집에 가는 거지?"
"으응."
"같이 가자. 나도 집에 가."
영민이 웃으며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아, 건방져보이려나. 건방져 보이기는 싫으니 금세 손을 다시 뺐다. 여주는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댈 뿐이었다. 아까보다는 영민의 말에 대답하기가 쉬워지긴 했으나, 역시나 말을 먼저 거는 것은 무리였다. 사소한 질문들이 얼마나 많은데. 원래 사소한 것을이 더욱 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여주는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더운데."
"아니, 나는 괜찮..."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
편의점 앞을 지나가는 도중에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 무슨 수를 쓸 틈도 없이 편의점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폐인 상태로 영민과 정면으로 마주쳤던 그 편의점이다. 그 날을 다시 상기시키자니, 또 창피함이 밀려온다.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뒤지던 영민은 노란 포장지의 아이스크림 두 개를 꺼내들었다.
"좋아하지?"
"어, 어?!"
다짜고짜 좋아하냐니. 여주는 티가 나게 당황하며 눈알을 도르르 굴렸다. 영민은 의아한 눈빛으로 여주를 쳐다보며 여주의 눈앞에 아이스크림 두 개를 흔들었다. 망고 아이스크림. 좋아하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냐고 묻는 말이었다. 아, 바보. 급 쪽팔려진 여주는 영민을 쳐다보지도 못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찔려서는. 뒤를 돈 여주는 잔뜩 울상을 지었다.
"이거 되게 맛있다."
얼떨결에 아이스크림을 얻은 여주는 포장지를 뜯고서 입에 물었다. 시원해. 벌써 영민에게 무언가를 얻어먹은 것이 두 번째다. 다음에는 기필코 제가 사주겠노라 다짐하는 여주였다. 아이스크림이 입맛에 꽤나 맞았는지, 영민은 연신 맛있다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기에 바빴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묻은 것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그..."
"어?'
"그러니까, 그... 아이스크림..."
거기 아이스크림 묻었어. 라고 말하면 되는 것을. 여주는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버벅거리고 있었다. 영민은 여주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개만 갸웃했다. 아이스크림 하나 더 먹고 싶다고? 사줄게, 가자. 영민은 여주의 행동을 잘못 해석하고서 다시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여주는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영민의 팔을 붙잡았다. 놀란 건 영민 쪽이었다.
"아이스크림...묻었어."
"아, 그래? 여기?"
"아니, 그 옆에..."
영민의 손이 아이스크림이 묻은 부분을 자꾸만 피해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닦였냐 물어오는 영민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든 여주가 영민에게 휴지를 내밀었다.
"아, 어디 묻었는지 모르겠는데."
영민은 자꾸 엉뚱한 곳을 닦아댔다. 저거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입 옆에 묻었다고 했는데, 왜 볼을 닦는 건지. 여주는 제가 닦아줘야 하나 싶어, 손을 머뭇거렸다.
"장난이야. 닦였지?"
여주의 표정을 살피던 영민이 웃음을 터트리고서 입가를 슥 닦았다. 아이스크림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생각보다 장난기도 많구나. 여주는 방식 올라간 영민의 두 볼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여주의 끄덕임을 끝으로 둘은 편의점에서 걸음을 뗐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나 설렜나, 싶었다.
"집이 어디야?"
"누리 아파트."
"그렇구나. 나랑 별로 안 멀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제 집은 여주와 항상 만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물론 제 집 앞에도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그래도 아침 일찍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이 단 한 번도 피곤한 적이 없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랬다. 저번에는 늦잠을 자는 바람에 버스를 놓칠 뻔 했지만. 그 덕분에 여주와 말 할 계기를 마련했으니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달려오느라 잔뜩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것이 창피할 뿐이었다.
"피곤해?"
"응, 조금..."
여주가 연신 하품을 해댔다. 무릎에 올려 진 가방을 꼬옥 쥐고서 몰려오는 잠기운을 떨쳐내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자면 안 돼. 영민이랑 한 마디라도 더 해야하는데. 머리와 몸은 역시나 따로 놀았다. 고개가 자꾸만 축축 처졌다. 영민은 꾸벅꾸벅 조는 여주를 쳐다보며 살풋 웃었다.
아, 이거 어째 영화에서 보던 상황 같은데. 영민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여주의 조그만 뒤통수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럴 때는 꼭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해주던데. 영민은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영화 속 남자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여주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아주 컸다. 아마 영화 속 남자주인공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뭐 이렇게 예쁘게 생겼어..."
여주의 머리를 조심스레 끌어다 제 어깨에 기댄 영민은 여주를 빤히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헙. 말을 뱉고서 스스로도 놀란 영민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영민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의 풍경들이 오늘만큼은 느리게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와, 이거 완전 변태 아니야. 아마 지금의 저를 보면, 세운은 저렇게 말할 것이었다. 좋은데 뭐 어떡해. 영민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할 것이었다.
"여주야."
"으음..."
"이제 내려야해. 다 왔어."
다음 정류장이 내려야 할 곳이었다. 영민은 조심스레 여주의 어깨를 흔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여주가 참 귀엽다고, 영민은 생각했다. 제가 영민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인지한 여주는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바로 했다. 어, 어떡해. 딱딱하게 굳은 채로 가방을 고쳐 매는 여주를 보며 영민은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어깨 아프지."
"아니, 하나도 안 아파."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걷는 와중 여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영민은 웃음기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괜찮다 대답해왔다. 졸리면 알아서 자면 될 것이지, 왜 기댄 거야. 여주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집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야, 괜찮은데!"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아, 이러면 진짜. 진짜 잠 못 자는데. 침대에 누워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을 제가 벌써 눈에 선했다. 여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 지, 영민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여주는 영민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마저도 오래 쳐다보지 못하였다.
"가방 무거워? 들어줄까?"
"하나도 안 무거워! 괜찮아."
영민은 조금이라도 여주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듯 했다. 뭐든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 여주는 괜히 민폐가 될까 싶어 무게가 있는 가방을 무겁지 않은 척 번쩍 들어보이고서 웃었다. 거짓말. 무겁네. 눈치를 챈 영민이 여주의 가방을 제 어깨에 맸다. 정말 괜찮은데. 여주는 영민의 다정함에 머리가 핑 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구에게나 다 다정한 걸까. 아마 그렇겠지. 제가 영민에게 특별하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영민은, 만인에게 다정하고 착한 그런 사람이었으니.
"저... 다 왔어."
"아, 그래?"
"가방 들어줘서 고마워."
"그럼,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여주에게 가방을 넘겨주려다 멈칫한 영민이 물었다. 여주는 영문을 모른 채로 두 눈만 꿈뻑였다. 무슨...부탁? 작게 물어오는 여주에 영민은 씩 미소 지었다. 갑작스런 영민의 미소에 당황한 여주가 시선을 돌렸다. 언제쯤이면 저 눈을 마주볼 수 있을 지.
"버스 타러 같이 가자."
영민의 부탁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 범주에 없던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것과 같은 부탁이었으면 당장이라도 가자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응? 여주는 혹여나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영민은 가방을 여주의 어깨에 매주었다.
"아침에 여기서 기다릴게."
그러고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주는 여전히 멍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영민이 제게 아침마다 만나자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여주는, 순간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누군가가 제 심장을 마구 때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누군가는 아마 영민일 것이었다. 여주는 가방끈을 꼬옥 쥔 채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거절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영민이 활짝 웃었다.
"내일 봐."
오늘따라, 하늘이 참 맑다.
현생에 치이다보니 1편 올린 게 일주일 넘은 것도 몰랐던...
영민이는 집 앞에 있는 버정에서 버스를 타면
도착지는 같지만 가는 방향이 달라서 여주를 못 마주치기 때문에
굳이굳이 먼 곳을 가신다고 합니다 ㅎㅎ
읽으신 분들이 행복해하시니 저도 기분이 너무 좋아요!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