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PERADO
04
'…형아.'
……지우야?
'형아, 나 너무 아파….'
아파? 어디가, 어디가 아픈데?
'모르겠어… 그냥 이상해. 눈도 잘 안 보이고, 속도 울렁거리고, 몸에 힘이 안 들어가….'
괜찮아, 형이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그러니까 조금만 참고 있….
'…거짓말.'
…….
'형은 거짓말쟁이야.'
'사실은 내가 필요 없었던 거지?'
'나 같은 거, 죽어도 상관없었던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형이 나를 안 찾았을 리가 없어.'
'나 혼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리가 없어.'
'내가 죽은 건 형 때문이야. 나는, 형 때문에 죽은 거라고!'
………지우야.
'……죽어, 그냥.'
'형도 그냥 죽어버려.'
"……으."
……보스? 침대 옆, 작은 간이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던 진영은 지훈이 앓는 소리에 얼른 램프를 켜곤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그의 얼굴은 한껏 구겨져 있었다. 요 며칠 불면증으로 잠을 통 못 자던 지훈이었다. 이제야 좀 잠이 든 건가 싶었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닐까, 진영은 걱정되는 마음에 다급히 지훈을 깨우기 시작했다.
"보스."
애타게 그를 부르기를 두어 번, 그런 진영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파르르 떨리던 지훈의 눈은 이내 천천히 떠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장소를 확인하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리번거리던 지훈은 제 시야로 가득 차던 진영의 얼굴에 안도감을 느끼며 팔을 벌렸다.
"진영아……."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진영은 고개를 숙여 지훈의 벌린 팔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준다. 진영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지훈은 그를 놓칠새랴 꽉 끌어안았다. 자신을 끌어안은 그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지훈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 참으로… 불쌍한 사람. 다른 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하겠지, 이런 지훈의 모습을.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한 척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이렇게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이… 약해빠진 사람인데.
"…또 지우가 나온 겁니까?"
진영의 말에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우. 지훈의, 지금은 없는… 4살 터울의 동생. 지우는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지훈이 손쓸 새도 없이, 그렇게. 그 후로 지훈은 이렇게 악몽을 꾸곤 했다. 사실 지훈이 잘못한 게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항상 자기 때문에 지우가 죽은 거라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울고 있었어."
"……."
"얼마나 원통하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지우…."
그의 말은 점점 울음으로 변해갔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지훈을 다독여주는 것밖에 없었기에 진영은 나지막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렇게 한참을 그를 달래주다가 자신을 안고 있던 힘이 조금 약해질 때쯤, 진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울다 지쳐 잠에 빠져든 그의 팔은 힘없이 침대에 툭, 하고 떨어진다. 아직도 눈가에 맺혀 떨어지지 못한 눈물이 선명하게도 보였다. 진영은 그런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다시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며 잠든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 형은.
동생이 자기를 원망한다는…,
자신이 제멋대로 만들어버린 그런 슬픈 악몽에서.
*
APEX
"……솔직히 말해봐."
너 누구야. 성우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곤 다니엘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성우 뒤에 앉아 있는 대휘를 바라보았다. 대휘도 그저 모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뭐, 이런 거 한두 번이냐는 듯한 그런 얼굴로. 뭐예요, 형. 다니엘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성우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으려고 하는데,
"어디 가, 날 봐!"
……에? 갑자기 두 손으로 다니엘의 얼굴을 붙잡던 성우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다니엘의 볼은 성우의 손에 눌려 입술이 마치 붕어처럼 툭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에 자연스럽게 눌리던 발음. 혀엉, 대체 왜 그러는 거예여… 다니엘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묻지만, 성우는 안 그래도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더욱더 게슴츠레하게 뜨며 말했다.
"너, 다니엘 아니지."
"……느에?"
"거짓말 그만해, 이 새끼야."
"그게 므슨…."
"강다니엘이 이렇게 말끔하게 생겼을 리가 없어!"
맨날 상처 하나씩은 달고 다니던 놈이 요즘에는 얼굴이 왜 이렇게 깨끗한 거냐고! 성우는 제 손에 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요리조리 비틀었다. 며칠 동안 제법 고된 훈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말도 안 돼. 너무나도 낯선 다니엘의 모습에 성우는 점점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다.
"봐봐… 이건 내가 알던 강다니엘이 아니야."
야, D! 너도 좀 이상한 거 같지?! 성우는 급기야 대휘 앞으로 다니엘의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다니엘은 대휘가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로 버둥거리면서 도와달라고 붕어 같은 입으로 뻐끔뻐끔 대고 있었다. 그런 다니엘이 안쓰러웠던 대휘는 이제 그만하고 손 좀 놓으라고 말을 하지만 성우는 오히려 그의 얼굴을 더 세게 잡고는 말했다.
"너 이 새끼, 강다니엘인 척하는 스파이지!"
"네?!"
"이거 영화에서처럼 막 얼굴 가죽 벗기면 원래 얼굴 나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어디 한 번…!"
"그만해라, 그만해."
그때, 여주와 함께 본부 앞 편의점에 다녀오던 영민이 다니엘을 괴롭히고 있던 성우의 어깨를 아이스크림으로 퍽퍽 때리며 말했다. 이거나 먹어, 인마. 성우가 그것을 잡겠다고 다니엘을 놓자, 그제야 성우의 손에서 자유로워진 다니엘은 제 볼을 감싸며 우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아주 볼이 얼얼해 죽겠다.
"애가 안 다쳐오면 칭찬을 해주지는 못할망정 뭐? 스파이 같은 소리하고 앉아 있네."
"M. 너는 훈련할 때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가장 많이 붙어 있으니까!"
"없어, 그런 거."
"아님 말고."
재미없어. 제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성우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아이스크림 껍질을 뜯고는 그것을 크게 베어 물기 시작했다. 나두, 나두! 성우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보고는 대휘도 얼른 영민에게로 쪼르르 달려와 그의 손에 들린 봉지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영민은 대휘가 더 잘 고를 수 있도록 두 손으로 봉지를 벌려주었다. 그리고 그를 보며 픽 웃었지. 아주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으으."
아직도 아픈 제 볼을 손으로 꾹꾹 누르던 다니엘은, 아까 벗으려던 겉옷을 벗고는 그것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
"자요."
언제 온 건지 자신의 옆으로 온 여주는 볼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대주기 시작했다. 제 볼에 닿던 차가운 아이스크림보다도,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여주라는 사실에 다니엘은 발작을 일으키다시피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네? 아, 볼이 빨갛길래요. 이렇게 하면 그나마 나을 거예요."
"……아."
"하여튼 O도 참. 저렇게 장난치는 게 좋아서, 원."
자신의 옆에서 웃고 있는 여주는 오늘도 여전히 아름답다. 다니엘은 붉게 물든 제 볼이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주는 이게 성우가 잡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사실 지금은 그것 때문이 아닌, 여주 너 때문에 달아오른 거라는 걸 꿈에도 모를 테니까. 다니엘은 괜히 아이스크림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이 열을 분산시켜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정말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난 좋아요."
"……어?"
순간 다니엘의 심장이 발 밑까지 쿵 떨어졌다. 뭐가? 뭐가 좋다는 건데? 긴장감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K가 안 다쳐서 오는 거."
"……아."
"사실 K가 그 말 했을 때 안 믿었었는데… 그때 이후로 정말 다쳐서 온 적 없잖아요, K."
"……."
"약속 지키는 거 보니까 대견하기도 하고…."
참 좋네요, 저는. 햇살같이도 눈부시게 웃던 여주에 다니엘은 그녀를 더 이상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위험했다. 이대로 너를 보는 건 무리야. 여주는 가끔 이렇게 예상치도 못하게 훅 치고 들어오곤 했다. 혼자서 그 타격을 감당해야 할 자신은 전혀 배려하지도 않고. 큼큼, 목을 가다듬던 다니엘은 겨우 옷을 놓고 오겠다는 말을 하고선 도망치듯 제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닫힌 방문에 기대 숨을 크게 내쉬었지.
"……하."
심장이 얼마나 요란하게 뛰는지 굳이 손을 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릴 만큼 뛰는 심장에 다니엘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지만, 그런 울렁거림조차 기분이 좋아 이내 피식 웃는다.
안 다치길 잘했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J는?"
봉지에 딱 하나 남아 있던 아이스크림을 보며 영민이 물었다. 그의 물음에 오물오물 아이스크림을 먹던 대휘가 말했다.
"J 지금 보안실에 있어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던데요."
……아, 한참 예민하겠구나. 그럼 이건 나중에 줘야겠네. 영민은 재환의 것이 녹지 않도록 냉동실 문을 열어 그것을 넣기 시작했다. 옆에서 눈독을 들이는 성우에게 으름장을 한 번 내지르는 것도 꼭 잊지 않고.
-
"……."
ZENITH의 서버를 뚫기 위해 여러 루트를 시도하기 벌써 5시간 째. 하지만 이게 진짜 웬만해서는 뚫리지가 않는다. 여태까지 자신이 뚫지 못한 서버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여긴 뭔데 이렇게 뚫리지가 않는 거냐고! 답답함에 재환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저번 스파이 본거지 소탕 작전 이후로 재환은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스파이 본거지는 총 3개였다. 그들이 했던 것이라곤 고작 APEX에 대한 도발. 그때는 그것을 소탕하기에 바빠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시 그곳을 조사했을 때에는 그들이 ZENITH에 무언가 정보를 보낸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순히 도발을 하기 위해서 스파이를 심어놨다고? 왜? 적진에 숨어있으면 어느 정도의 정보 공유는 기본일 텐데 왜 그런 것조차 하지 않았던 건데? 의문은 의문을 낳았고, 그 의문의 끝에 재환은 깨달았다.
스파이 본거지는 그저 미끼였다는 것을.
미끼를 통해 그곳에 설치해놓은 CCTV로 그 둘을 쭉 관찰했던 거겠지, 다니엘과 영민의 패턴을. 하필이면 그 둘이다. 우리 조직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아마 그 두 명은 노출이 되고도 남았겠지, 항상 그 임무에 참여를 하던 사람이었으니…. 그들의 전략을 알아채고 재환은 심란함에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여기는 '평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고, 스파이 본거지도 생각보다 빠르게 소탕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또 이렇게 안일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박지훈과 배진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현 ZENITH의 보스이자 종현을 죽였던 박지훈, 그리고 배진영. 이미 핵심 인물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정보 쪽에서는 우리가 우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속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대는 세상을 둘로 나누어버린 사람이라는 걸 나는 왜 잊고 있었을까. 불안함을 느낀 재환이 먼저 그 둘의 세부 사항을 조사하려고 하지만, 지금 알고 있는 그들의 이름과 생김새를 제외한 그 외의 정보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삭제라도 한 것처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기에.
거기서 재환은 더욱 초조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 두 명을 제외하고 얼마나 많은 간부들이 존재할지는 모른다. 그것을 알아야 대비를 하던가 할 텐데 이건 뭐 들어가지지도 않으니…. 어떻게 성공하는 건가 싶을 때쯤이면 이중, 삼중으로 더 보안을 빡세게 하는 그쪽 해커 덕분에 재환은 그때마다 울분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아오. 존심 상해, 진짜! 직접적으로 전장에 참여하지는 않아도 자신은 어쩌면 여기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바닥에서는 정보가 없으면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정보통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보가 없으면 어떡해… 옛날 Ⅶ에서 살 때는 대기업들은 물론이고 정부의 서버까지 뚫어봤는데. 아, 나 이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아아."
진짜 힘들어 죽겠다. 이럴 때 네가 있었더라면…. 재환은 오늘도 철통으로 막아대는 ZENITH의 서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때마다 네 생각이 난다. 세상이 둘로 나뉘고 난 뒤 본의 아니게 헤어져버린 '너'. 네가 있었더라면 나는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나 알려주던 너였으니까. 너였으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알려줬겠지?
……아. 마침 뚫리지 않던 서버에 짜증이 나던 찰나, 갑자기 그려지던 '너'의 얼굴은 재환이 다시 키보드 앞에 손을 올려놓게 하기에 충분했다. '너'를 찾겠다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틈만 나면 '너'에 대해 조사를 하던 재환이었으니. 하지만 어떻게 보면 ZENITH의 서버를 뚫는 것보다 '너'를 찾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다. 네가 살던 나라의 기록들과 정보들을 다 털어봤지만 너에 대한 기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나, 저거나… 막막함에 다시금 터져나오는 한숨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혹시 죽은 건 아니겠지?"
이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상황이 하나 있다. 혹시 네가 죽은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최악의 상황.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온 사망자 명단을 다 훑어봐도 보이지 않던 네 이름. 이런 걸 보면 네가 살아 있는 것 같긴 한데,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너를 보자니… 정말 너는 죽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에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죽었을 리가 없잖아. 재환은 눈을 한 번 비비고는 다시금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서든 '너'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
"……."
또다시 APEX에서 서버를 뚫으려는 시도가 보였다. 이렇게 티 나게 서버를 뚫으려고 하니, 내가 안 막고 싶어도 안 막을 수가 없잖아. 세운은 고개를 저으며 보안을 더 강화시켜버린다. ZENITH의 정보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오롯이 버티고 있는 이상.
"……아."
가뭄이 난 듯 심각한 안구 건조를 느낀 세운은 눈을 꾹 감았다. 아무래도 어두운 보안실 안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눈이 그렇게 뻑뻑할 수가 없었다. 인공 눈물, 인공 눈물이 어디에 있더라… 서랍을 열어 그것을 찾아보지만 그 안에는 어느새 다 써버린, 빈 통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삑-
"H, W입니다."
연구실로 향하는 호출 버튼을 누르고 세운이 말을 하니, 안에서 약을 개발하고 있던 선호가 그것을 듣고는 말했다.
- 네, W. 무슨 일이에요?
"인공 눈물 좀 가져다주세요. 다 써서 없네."
- 잠시만요. 금방 갈게요.
조금만 쉬어볼까… 선호가 오기 전까지 휴식을 가지자 생각한 세운은 고개를 젖히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됐더라… 혼비백산, 아비규환. 이런 걸로도 설명이 부족한 그날. 사람들이 미친 듯이 발악하고, 난동을 부리며 세상이 나누어지던 그날. 아직도 아득하다, 그때를 생각하노라면.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원해서 이곳에 온 건 아니었지만 나름 적성에 잘 맞는다는 거겠지…. 그래도, 그래도…
……네가 내 손을 놓지만 않았더라면.
'W, 접니다.'
문 너머로 들리던 선호의 목소리에 세운은 자세를 바로잡고 그에게 들어오라고 말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선호는 인공 눈물이 가득 들었을 비닐봉지 두 개를 흔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일부러 많이 가져왔어요. 두고두고 쓰라고."
"고마워요."
그에게 받아든 비닐봉지에서 박스 하나를 꺼내던 세운은 곧바로 인공 눈물 하나를 꺼내고는 눈에 넣기 시작했다. 뻑뻑하던 눈에 물이 들어가니 그나마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선호는 그런 세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치 뭐라도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눈을 끔벅이다가 새어나오던 눈물을 닦아내던 세운은, 그제야 선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곤 그를 바라보았다.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나갈 법도 한데, H는 왜 나를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지?
"뭐 할 말 있어요?"
"아…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뭔데요?"
H가 나한테 궁금한 게 뭘까-. 선호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세운은 궁금함을 가득 담고는 물었다.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일은 정말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저번에 회의할 때 말이에요."
"네."
"한 명이 좀 빠진 것 같아서요."
일부러 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세운의 입꼬리는 점점 내려가 수평을 이루었다. 그런 세운과는 반대로 선호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며 웃는다. 의도가 너무나도 빤히 보이던 질문. 유선호의 촉은 가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다.
"아는 사인가 봐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정말요?"
"네. 누가 빠졌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때 제가 수정본을 튼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중요한 정보이다 보니까 수정을 반복하는 게 많았어서, 누락됐었는지도 몰랐네."
"으음- 수정본이라…."
그래요, 뭐. W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선호는 궁금증이 해결됐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세운은 그런 선호에게서 의자를 돌리며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나가보라고 말을 한다. 네, 좀 쉬엄쉬엄하면서 해요, W. 눈 나빠지면 고생하니까. 힐러로서 그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던 선호는 방을 나가기 위해 손잡이를 돌리다가, 잠시 그 행동을 멈추곤 세운을 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을, 세운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런데 W. 회의 시간 때 잘못된 정보 누설하면 바로 사살인 거 아시죠?"
"……."
"보스한텐 비밀로 할게요. 난 W 많이 좋아하니까."
뒤돌아있는 그의 얼굴은 안 봐도 뻔했다. 아마 혼란스러워 죽겠지, 지금. 그 생각이 미치자 선호는 알 수 없는 쾌감에 큭큭 웃으며 문을 닫았다.
그때는 그저 주요 인물만 콕 집으며 어떻게든 주위를 끌어보려던 심산이었나 본데… 보스의 눈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혼자서만 이상함을 알아차렸을 때 느껴지던 그 희열감. 실수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W의 고의적인 실수. 이것을 언제 떠볼까 타이밍만 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친히 먼저 불러주다니. 과연 그는 어떤 변명을 할까? 잔뜩 기대를 하고 온 만큼 자신의 기대에 충족시킬 만한 그럴싸한 변명을 하던가, 아님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 성의가 없잖아.
"수정본… 누락이 됐다, 라."
그리고 누가 빠졌는지 모르겠다고. 어이없기 그지없던 그의 말에 선호는 조소를 내뱉었다. 아주 가소로워 죽겠다. W는 거짓말을 너무 못한다는 게 단점이라니까.
같은 포지션인 해커를 모를 리가 없잖아.
*
"……아."
더 이상은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 결국 ZENITH의 서버를 뚫는 것도, '너'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다 실패했다는 것에 대해 허망함을 느끼며 재환은 책상에 털썩 엎드렸다. 진이 빠져 축 늘어져있으니 전에 성우가 당 떨어져서 죽겠다고 하던 게 생각났다. 그때도 망 봐주랴 통신해주랴 힘들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 당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빈말이 아니고 이번엔 진짜 죽을 것 같다.
"으으…."
엎드려 있으니 저절로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좀 무리하긴 했지…. 재환은 잠에 빠져 들기 전 마지막으로 그토록 애타게 찾던 자신의 친구, '너'를 떠올려본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세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