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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이형!"
수척해진 얼굴에 마스크와 목도리로 챙챙 감은 학연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상혁은 학연에게 다가갔다. 학연이 잠적한지 5일만에 다시 돌아왔고, 멤버들은 모두 놀란 듯 학연에게 다가갔다. 다들 어디를 갔다온거냐, 왜 이렇게 속을 썩이냐, 우리가 잘못했다며 학연에게 말을 걸었지만 택운만은 혼자 연습실 개인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학연이 미안하다며 멤버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고, 멤버들은 괜찮다며 학연을 위로해줬지만 학연 역시 보이지 않는 택운을 찾느라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택운이형, 학연이형 왔어요."
상혁이 그런 학연 대신 택운이 연습하고 있는 방으로 향했지만, 택운은 그런 상혁의 말에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택운이형. 다시 한 번 택운을 부른 상혁의 말에 건반을 누르던 손을 멈춘 택운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 문을 쾅 닫고는 나가버렸다. 누구보다 학연을 걱정했던 사람이 왜 저러나 싶어 모두들 벙찐 표정으로 있자니, 학연이 괜찮다고 자기가 가보겠다며 연습실을 나갔다. 두 사람이 떠난 연습실은 한숨소리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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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간 이후는 어떻게 된거에요?"
"택운이형 뒤 따라 학연이형 나가고 나서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학연이형 나가고 30분쯤 뒤에 형들 눈만 벌겋게 되서 온 다음 아무말 없이 콘서트 연습만 했어요.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었고, 당장 눈 앞에 놓여져있는 콘서트가 급하기도 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콘서트 끝난 후에야 알았어요. 콘서트가 학연이형이 빅스로서 참여하는 마지막 공식 스케줄이었다는건."
그 말을 끝으로 녹음기를 끈 하연은 뻐근해진 손을 주물렀다. 학연과 택운의 관계, 빅스의 엔과 레오의 관계가 이 진실의 종착점인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한글 파일을 저장한 하연은 상혁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벌써 밤이네요. 학연이 떠난지 얼마안되서 마음 추스리기도 벅찰텐데 이렇게 도와줘서 고마워요. 학연이에 대한건 제가 무슨일이 있어도 꼭 진실을 밝힐테니 걱정말아요."
"빅스를 배신하고 떠났다라는 소문이라도 잡혔으면 좋겠어요. 진짜 누구보다 멤버들한테 잘했거든요. 사실, 아직도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아무말도 없이 빅스를 떠난건지. 한마디 말 정도는 해줄 수 있던거 아닌지. 그래도 이제는 학연이형이니까 믿어요.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우리가 남의 집에서 너무 오래있었나봐요. 학연이형 아직 안 떠나고 집에 있는 것 같네."
"학연이 유품 정리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학연이형 어머님이 내일 오신다고 하셔서요, 저는 그전에 미리 좀 챙겨두려고 온거였어요. 아마 혼자 들어왔으면 이렇게 오래 있지도 못했을거에요. 학연이형한테 미안해서. 그럼, 멀리 안 나갈테니까 조심해서 가세요. 택운이형에게 물어보시러 가실거죠? 아마 쉽지는 않을거에요. 택운이형도 지금 제정신 아니라서."
컴퓨터와 녹음기를 정리해서 가방에 넣은 하연은 상혁에게 작게 미소지으며 문으로 향했다. 가만히 앉아서 학연의 책장에 꽂혀져있는 빅스앨범들을 하나씩 꺼내는 상혁을 보고 하연은 다시 몸을 돌려 말했다.
"..학연이가 상혁씨 되게 많이 좋아했어요. 자기 그룹에 정말 착한 동생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막내가 제일 착하다고. 상혁씨뿐만아니라 나머지 멤버들 모두 자기한테 너무 과분한 동생들이라고 저한테 볼 때마다 그랬거든요. 그니까 너무 자책하지마요."
하연이 상혁에게 말을 전하고 문을 닫자마자 학연의 집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학연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상혁의 목소리를 듣자니 하연 역시 괜히 울컥한 마음에 눈물을 삼켰다. 아무리 강한 척을해도 아직 상혁은 자신이 믿고 따르던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린 22살이었다. 하연은 자신의 차를 타고 운전을 하면서도 학연과 있었던 지난 날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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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이 메모를 남기고 떠난 그 날, 학연은 하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회사 몰래 빠져나와 다시 호텔에 도착한 하연은 학연의 수척해진 얼굴과 수북히 쌓인 담배를 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회사때문에.. 미안해요. 학연씨만 곤란해졌죠?"
"그쪽 회사 아니었어도, 기사 났을거에요. 차라리 사진 안 찍혔으니 그쪽이 더 나으려나."
하연의 사과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차분하게 대답하는 학연에게 자신을 왜 불렀냐고 물어보니 전혀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하연씨 혹시 차 좀 빌려줄 수 있어요? 혹시 가능하면 핸드폰도 좀.. 제 핸드폰은 지금 난리났거든요. 한 5일 정도면 되는데. 차는 좀 힘드려나? 나중에 사례는 두둑하게 할게요."
학연의 말에 하연은 차키와 핸드폰을 내밀었고, 차키를 받은 학연은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는 꼭 돌려주겠다며 문으로 향했다. 몇발자국 걷지 못하고 휘청이는 학연에게 다가간 하연은 차키를 뺏은 뒤 말했다.
"어디갈껀데요, 저랑 같이가요."
그냥 여자의 직감이었다. 무언가 위험한 느낌, 이대로 학연을 보내면 크게 사고라도 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연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던 학연은 그럼 차키 줄 수 없다는 하연의 말에 조용히 긍정의 표시를 했다. 학연이 준 수표로 대신 호텔비를 지불한 하연은 학연이 타고있는 자신의 차로 향해서 운전석에 앉았다.
"자, 이제 어딜갈까요? 잘나가는 아이돌은 보통 이렇게 잠적 탈 때 어딜가죠?"
"일단은 회사로 갈까요?"
하연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 피해서 도망 나온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었지만 일단은 학연이 원하는대로 하연은 학연을 회사 뒷문에 데려다 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어차피 같은 배 탔잖아요, 나 회사에서 징계 받으면 학연씨가 나중에 독점기사 같은거라도 하나 줘요."
독점기사라는 말에 웃던 학연은 다시 눈만 냅두고 칭칭 감은 다음 주위를 살피더니 급하게 회사로 향했었다. 한시간쯤 지났을 때 급하게 자신의 차문을 두드리는 학연이 나왔고, 입술에 피딱지를 달고 이곳저곳 맞은 흔적으로 가득한 학연의 모습에 하연은 놀란듯 학연을 쳐다봤다.
"이게, 아니 뭐에요. 대체 이 상처는?"
"하하, 그니까요. 이번에는 우리 집으로 갈까요? 상처도 치료해야되고. 이 집에 사람은 처음 들이는건데. 특히 여자는 하연씨가 처음이에요. 저도 계약한지 얼마 안 된 집이라. 이걸로 독점기사 한 번 써볼래요?"
"아니 지금 웃음이 나와요? 얼굴이 이게 뭐에요. 나으려면 3~4일은 걸리겠네."
"그러니까요. 상처가 나으려면 그정도 걸리겠죠? 상처가 얼른 나아야 빨리 콘서트 연습하러 갈 텐데.. 뭐해요, 안 데려다 줄거에요? 우리 한 배 탄거라면서요."
하연은 학연의 뜻 모를 말들과 뜯어진 입술의 피를 닦으면서도 웃는 학연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학연의 말 대로 학연의 집으로 향했다. 서울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작은 마당까지 딸려있는 집에 도착한 학연은 하연의 부축임을받으며 집으로 향했고, 학연의 말 처럼 정말 아무것도 없이 휑한 집 안은 삭막함 그 자체일 뿐이었다. 하연은 학연에게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더 물어볼세도 없이 학연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쇼파에 기대어 그대로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판단이 되기도 전에 하연은 부장의 불호령이 가득 담긴 전화를 받고는 얼른 회사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집 앞슈퍼에서 대충 몇일 동안 먹을 것과 약국에서 약을 사다가 냉장고와 부엌에 내려놓은 하연은 다시 필요하면 부르라는 메모를 남기고 그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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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신호가 빨간불에서 녹색불로 바뀌어 있었고, 빨간불에 걸린 신호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던 하연은 놀란듯 다시 핸들을 잡았다. 그 때 남긴 메모에도 학연은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연도 바쁜 일때문에 더 이상 학연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고, 빅스 콘서트의 기사를 따러갔던 선배에 의해 학연이 잘 돌아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때 조금 더 학연에게 집요하게 물어봤으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내릴 수 없었다. 하연 조차도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진정 학연을 위한 일인지 헷갈렸으니까.
"..어둡구만."
택운의 집 앞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학연의 장례식장에서 조차도 멤버들에게 인터뷰를 따려던 기자들이었다. 하연은 자신이 기자로 일하면서도 도무지 이런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하연은 택운의 집으로 향하는 대신 아까 상혁이 보내 준 주소로 향했다.
[택운이 형 개인 작업실 주소에요. 집에 안 들어가고 작업실에서 죽치는 것 같더라고요. 저랑 다른 멤버들이 찾아가 봤는데 문도 안 열어줘요. 사람들한테 걸릴 것 같아서 앞에 오래는 못 서있었지만.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 XX빌딩 3층]
오긴 왔는데 이제 뭘 해야되나. 일단 차 안에서 내린 하연은 무작정 건물의 3층으로 향했다. 3층에는 택운의 작업실만 있었지만 문이 굳게 닫혀져 있었다. 섣부르게 문을 두드리면 택운 성격에 열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4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걸쳐 앉았다. 학연이 1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오늘 밤만 지나면 학연이 떠난지 딱 7일이 되는 날이었다. 학연을 생각하니 다시 드는 담배 생각에 담배를 물었다. 아까 낮에 산 담배 두 갑 중 한 갑이 벌써 끝을 보이고 있었다. 남은 담배를 다 피기 전에 학연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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